글: 양계파(楊繼波)
중국문헌에 포르투갈(Portugal)에 대한 중국명칭은 아주 많다. 예를 들면, 불랑기(佛郞機), 포도려가(蒲都麗家), 노서달니(盧西達尼), 대서양(大西洋), 서양(西洋), 포도예(捕道倪), 박이도갈아(博爾都噶啞), 파이도기(波耳都欺), 포로아(布路亞), 포도아(葡萄牙)등등이 그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20여종의 칭호가 있다고 한다.
중국-포르투갈의 관계는 명나라중엽부터 시작하고, 마카오문제가 더해지면서, 포르투갈에 관한 기록은 명청역사자료문헌에 비교적 풍부하게 나와 있다. 언어와 지역의 차이로, 명청시기의 중국은 거의 봉쇄상태였다. 지리지식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에 대한 여러가지 칭호가 나타난다. 아마도 이러한 요소가 바로 포르투갈이 중국문헌에서 일국다명(一國多名)의 현상이 나타난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명청자료문헌의 포르투갈에 대한 여러가지 칭호가 탄생한 원인을 정리해보고 문헌에서 사용하는 현황을 알아보는 것도 중국-포르투갈 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문은 명청 중앙정부자료와 공식사서등 문헌자료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칭호를 모으고, 그 원류를 정리하고, 변화과정을 논하여,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불랑기(佛郞機)는 11세기말에서 12세기초에 아랍인과 이슬람교도들이 유럽인, 서방의 기독교도를 부르는 칭호였다. 11세기말, 유럽의 기독교도는 교황의 호소하에 동으로 진격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세계에 대한 토벌을 시작한다. 동정의 구성원중 거의가 프랑크인(Francs)이었다. 프랑크인은 나중에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등지에 흩어져 거주한다. 지중해의 아랍인들은 이들을 "Frangi"라고 불렀다. 불랑기는 중국의 관방자료와 사서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포르투갈에 대한 칭호이다.
16세기초, 포르투갈인은 해상의 실력을 가지고 동방으로 온다. 식민주의의 침탈과 중국에 대한 약탈은 중국인들에게 아주 나쁜 인상을 남긴다. 당시의 중국은 이들 식민자들이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를 몰랐다. 나중에 그들을 불랑기라고 부른다. 동남아에서 무역을 하던 아랍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을 "Frangi"라고 불렀다는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불랑기라 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명나라때 공식문헌에서 사용한 칭호이다. 예를 들어, 숭정원년(1628년) 복건순무 주일풍은 조정에 보낸 글에서, "해외에는 동서의 이양(二洋)이 있는데, 서양은 점성(占城)이 가장 크고, 섬라(暹羅)가 그 다음이며, 자바(爪哇)가 그 다음인데 지금의 하항(下港)이며, 그 다음이 진랍(眞臘), 그 다음이 부니(浮泥), 그 다음이 삼불재(三佛齋), 만랄가(滿剌加, 말라카), 소문답랄(蘇門答剌, 수마트라), 팽형(彭亨)등의 나라가 있다. 동양에는 여송(呂宋), 지금은 비랑기(狒狼機, 즉 불랑기), 다음이 소록(蘇祿, 줄루)등 국가이다. 서양에서 판매하는 자느 그 진기한 물건에서 이롭고, 동양에서 판매하는 자는 그 광물에서 이롭다." 이외에 <<명세종실록>>에는: "...불랑기는 조공국가가 아니다. 인근나라를 침탈하고 위법을 법하니..."
<<명사>>에는 <<불랑기국>>을 두었다. 어떤 사학자는 이 부분의 사실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한다. 다만, 불랑기가 포르투갈을 가리킨다는 점은 의문이 없다. 하물며, <<명사>>의 편찬은 일찌기 명나라에서 이어내려온 관부자료에 따른 것이다. <<명사. 여송국>>에는 "그때 불랑기는 이미 말라카를 겸병했다. 그리하여 여송에 이로와졌다. 세력이 더욱 강하여 해외에서 횡행한다. 마침내 광동 향산오를 점거하여 성을 쌓고 살며, 사람들과 서로 시장을 열어 교역하니, 광동의 우환이다"
불랑기는 포르투갈을 가리킨다. 이 칭호는 명나라때부터 사용되고, 청나라초기에도 여전히 연용된다. 예를 들면, 순치4년(1647년)에 "광동총독 퉁양갑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불랑기나라사람은 마카오에 거주하며 광동상인과 거래한다. 명나라때부터 이미 여러해가 되었는데, 나중에 광동성내로 깊이 들어와서 금지하였다. 청컨데 이후 배를 대고 서로 시장을 열어 교역하도록 해주십시오." 순치15년 오월이십칠일 예부상서 호세안이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도: "불랑기나라는 조공한 적이 없다. 돌연 큰 배를 광주의 마카오에 대고, 총소리가 우뢰와 같다...."
강희초기에 불랑기라는 명칭은 이미 관부의 공문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강희37년(1698년)에는 프랑스인이 강희제에게 유럽지도를 바치는데, 포르투갈을 "파이도아국"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불랑제아(拂郞濟亞)" "불랑제국(拂郞祭國)"이라고 부른다.
"대서양", "서양"은 명말청초에 사람들이 포르투갈이 위치한 지리적 위치를 인식하면서 나타난 명칭이다. 그러나, 이 칭호는 거의 전체 청나라의 관방자료와 문헌에 나타난다. 명청의 자료문헌중 대서양은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가 있는데, 광의로는 널리 대서양을 가리킨다. 오늘날 얘기하는 유럽과 아메리카대륙 및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지구를 가리킨다: 협의로는 포르투갈을 가리킨다.
포르투갈을 대서양으로 칭하는 것은 명나라말기부터 나타난다. 만력9년(1581년), 이탈리아인인 마테오 리치는 마카오에서 광주로 온다. 나중에 북경까지 온다. 그는 스스로 "대서양인"이라 칭한다. 예부는 <<회전>>에 "서양쇄리(西洋瑣里)"라는 곳은 있지만, "대서양"이라는 곳은 없다고 보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실제에 따라서, 선교하는데 조정의 허가를 받고, 중국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마테오 리치는 역법에 능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측면에 장점이 있다. 조정도 신역법을 적극 지지한다. 사람들은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거주하므로 마카오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들을 "대서양인"으로 불렀다. 그리고 포르투갈을 "대서양국" 혹은 "서양국"이라고 불렀다.
명나라 천계4년(1624년)에 조정은 만주족을 막기 위하여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대포를 사고, 포르투갈병사를 모집한다. 약망리아(若望里亞)라는 포르투갈 대포기수라가 대포시험때 폭발하여 사망하고, 그를 북경에 묻어준다. 중문 묘지명에는 "누르하치가 난을 일으켜 우리는 요녕왼쪽을 잃은지 금년이 5년되었다. 내가 그들을 막아낸 것은 화공때문이다. 화공기기는 총이 가장 좋고, 총의 제조는 서양국이 가장 잘한다. 총을 쏘는 법도 서양국인이 가장 잘한다" 이로써 볼 때, 서양국이라고 포르투갈을 칭하는 것이 이미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정식으로 포르투갈을 서양국 혹은 서양으로 부르는 것은 청나라초기 강희연간부터이다. 강희4년(1665년)의 몇 가지 만주어자료에는 모두 서양이라고 포르투갈을 칭하고 있다. 광동총독 육숭준이 올린 글에서도: "향산오에 사는 서양인들은 오랫동안 중국에 살면서 돈과 양식을 납부하는 자들이 있다." 예부상서 기철백은 황제에 올린 글에서 여러번 포르투갈을 서양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왕여망이 말하기를, 나는 순치8년에 서양에서 향산오로 왔다."고 적었다. 강희17년, 신하들이 강희황제를 대신하여 적은 "칙서양국왕아풍숙고"는 포르투갈인들이 조공을 바친데 대하여 쓴 글인데, 여기서도 포르투갈을 서양국이라고 부른다.
옹정제때, 황제의 주비(朱批)와 대신의 상소문에서도 절대다수는 포르투갈을 '서양국' '대서양국'이라고 불렀다. 옹정2년(1724년) 십월 이십육일, 양광총독 공육순은 황제에 올린 글에서, "명나라 광동 향산현에 속하는 마카오에는 서양인들이 계속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신이 부임한 후 오랑캐의 호구와 서양의 선박을 조사했다..."
강희제이후 청나라말기까지, 공식자료에서는 포르투갈을 대서양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많다. 광서13년(1887년) 십월십칠일, 북경에서 체결한 중국-포르투갈의 '우호통상조약"에도 중국측이 사용한 국명은 '대청국'이고, 포르투갈은 '대서양국'이라고 하였다. 조약의 첫머리는 "대청국 대황제, 대서양국 대군주, 양국은 피차 우호적으로 삼백여년을 지냈다. 우의를 배가시키고....대서양국의 수도 리스보아..." 이는 정식외교문서에서도 청나라정부는 포르투갈을 대서양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말기 외무부의 자료에는 이런 조회(照會)가 있다: 선통3년(1911년) 칠월 초구일, 포르투갈국 공사는 병으로 휴가를 가겠다는 조회를 중국외무대신 경친황 혁욱에게 낸다. 번역문에서는 "대서양국 서리흠차전권대신은..."이라고 적었다. 이를 볼 때, 청왕조가 끝날 때까지 여전히 포르투갈은 대서양국으로 불리웠다.
"포도아"(포도예, 박이도갈아, 파이도아, 노시달니, 포도려가, 포로아)는 Portugal의 음역이다. 그중에 비교적 일찍 역사서적에 나타나는 것은 포도려가이다. <<명사. 불랑기>>에는 "호경은 향산현 남호도무의 밖이다. 먼저 섬라, 점성, 자바, 유구, 발니의 여러 나라와 호시(互市)를 열었다. 모두 광주에 있고, 시박사를 두어 이를 주재했다. 정덕때, 고주의 전백현으로 옮긴다. 가경14년(1535년) 지휘 황경이 뇌물을 받고 상관에 청하여 호경으로 옮긴다. 연 2만금을 받는다. 불랑기가 섞여 들어와서, 높은 집을 속속 지어서, 복건, 광동의 상인들이 많이 몰려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피하니, 그들이 전적으로 점거한다. 사십사년 말라카라고 사칭하며 조공을 바쳤고, 포도려가로 이름을 고쳤다. 신하가 이를 듣고, 논의를 했는데, 반드시 불랑기가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하여 이를 거절했다"
청나라때 자료에서, 순치10년 예과사서에서 포도예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예부상서 랑구는 황제에 보낸 글에서, "...광동통지에 네덜란드가 광동에 들어와서 조공을 바친 사실이 없었다..네덜란드는 해외에 있고 털이 붉고 눈이 푸르다...그들은 무역을 하면서 포도예와 사이가 벌어졌고...포도예는 바로 오랫동안 향산션 호경오ㅇ에 거주하는 서양의 종족이다."
강희때 불랑기라는 칭호는 이미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서양, 서양이라고 칭하는 동시에 "파이도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희37년 프랑스 선교사가 황제에게 유럽지도를 바칠 때, 포르투갈을 "파이도아국"이라고 하고, 그 수도를 "리시파나(利西波納)"이라고 적었다. 프랑스는 '불랑제아국'이라고 썼다.
옹정5년(1725년) 포르투갈국왕 후앙5세가 사신을 보내어 옹정제의 즉위를 축하한다. 포르투갈 사신인 마이더러는 북경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내각은 이 서신을 등기하는데, "옹정오년 박이도아국 공진원표"라고 쓴다. 여기에서는 포르투갈을 "박이도아"로 번역했다.
건륭18년(1753년), 포르투갈신이 북경으로 가면서 국왕의 서신을 가지고 간다. 이번 서신은 중국제일역사당안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뒤에 붙여둔 것에는 "건륭18년 박이도아국 공진원표"라고 되어 있다. 내각에서는 "박이도갈이아국"이라고 번역했다. 내각이 황제를 대신하여 초안한 것에는 "칙명 박이도갈이아국왕 조셉"이라고 썼다.
건륭18년 12월 광동순무 소창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서양사신이 배를 타고 귀국하는 날짜를 보고하면서, "파이도갈이아"라고 불렀다.
건륭때 만든 <<곤여전도>>에느 포르투갈을 "파이두와(波爾杜瓦)"국이라고 적었다.
청나라말기가 되면서는 "포국(葡國)" 혹은 "포도아"라고 부른다. 광서14년 삼월초십일, 군기처의 전보에는 "광서14년 삼월초십일 성지를 받들어: 이홍장을 호국사신으로 명하여 조약을 상호교환하게 한다..."라고 되어 있다. 광서6년에 편찬된 왕지춘의 <<청조유원기>>에는 여러번 포도아로 표현하고 있다.
명청의 자료를 보면 중국이 포르투갈을 부르는 칭호는 세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불랑기인데, 이것은 아랍인 혹은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도를 부르는 칭호인 "Francs"에서 왔다. 종교전쟁은 아랍인들로 하여금 유럽인들을 두려워하게 하였고, 그들은 유럽인들을 "Frangi"라고 불렀다. 아랍인들이 동남아에서 상업에 종사하는데, 마침 포르투갈인들이 고아, 말라카에 도착했다. 아랍인들은 습관대로 이들을 "Frangi"라고 부르게 된다. 중국사람들은 그 연유를 잘 모르므로 그 말을 듣고 그냥 포르투갈을 "불랑기"라고 적게 된 것이다.
둘째는 대서양 서양인데, 이것은 포르투갈의 지리적 위치에서 온 명칭이다. 이 점에 있어서 마카오는 상당히 큰 역할을 한다. 마테오 리치는 스스로 "서양인"이라고 칭한다. 많은 서양선교사들은 천문, 기술, 의학등에서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이 마카오를 통해서 왓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인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이들을 "서양" "대서양"이라고 불러왔다.
셋째는 포도아인데, 이는 Portugal의 음역이다. 중국방언의 차이와 번역때마다 쓴 것이 달라서 10여가지 번역방식이 존재한다. 박이도갈아, 포락아, 포도예, 파이도기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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