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휘(許暉)
[한국에서 연이라고 부르는 것을 중국에서는 풍쟁(風箏)이라고 부른다]
"풍쟁(風箏)"은 처음에는 "철마(鐵馬)"의 별칭이었다; 송나라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을 날리다"는 의미의 연이 되었다.
명나라때 진기(陳沂)가 쓴 <<순추록(詢芻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풍쟁"은 즉 종이연(紙鳶)이다. 풍연(風鳶)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오대(五代)의 한(漢)나라 이업(李業)이 궁중에서 종이연을 만들어 선을 매달아 바람을 타고 띄워서 놀았다. 나중에 연의 머릿부분에 대나무로 피리(笛)를 만들어, 바람이 들어가면 쟁(箏)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래서 속칭 "풍쟁"이 되었다. 이로써 볼 때, "풍쟁"의 첫 이름은 "종이연" 혹은 "풍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속박물지>>의 기록에 따르면 연날리기에 의학적인 기능까지 있다고 적었다: 오늘날의 종이연은 줄을 매어서 위로 올리면, 어린아이가 입을 벌리고 멀리 바라보아서 몸속의 열을 배출하게 된다"
"풍쟁"의 기원에 관하여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풍쟁"이 바로 간첩행위라는 것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趙)나라의 상국인 진희(陳豨)가 스스로 대왕(代王)에 올라 반란을 일으킨다. 유방은 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러 나섰고, 마침내 진희의 반란을 제압한다. 진희의 반란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한신(韓信)이 연루되어 있었다. 한신과 진희는 서로 교분이 깊었고, 진희가 조나라 상구에 임명받은 후 한신을 찾아가서 작별인사를 했다. 한신은 진희의 손을 잡고 정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네가 관할하게 되는 지역은 천하의 정예병력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너는 폐하가 아주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이다. 만일 누군가 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면, 폐하는 분명히 믿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다시 고발한다면, 폐하는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누군가 세번째로 고발한다면, 폐하는 반드시 대노하여 친히 병력을 이끌고 소탕하러 나설 것이다. 내 생각에 너는 일찌감치 준비를 해놓는 것이 좋겠다. 만일 네가 조정에 어떤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조정에서 너에게 호응하겠다. 이렇게 하면 천하는 우리 것이 된다."
진희에게 내부에서 호응해주기 위하여, 한신은 사람을 보내어 종이연을 만들게 하고, 공중으로 띄운다. 이것을 가지고 유방이 거주하는 미앙궁의 원근을 파악하여 궁으로 쳐들어가서 유방을 붙잡을 때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물기원>>에 기록된 내용이다: "풍쟁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한신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고조(유방)이 진희를 정벌할 때, 한신은 그 가운데 기병하려고 꾀하였고, 미양궁의 원근을 측량하고, 땅굴을 파고 궁중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한신이 미앙궁의 원근을 쟀다는 것은 지하땅굴을 파서 미앙궁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였다면 유방은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음모는 성공하지 못한다. 진희와 한신은 모두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풍쟁"이라는 이 발명품은 후세에 계속 전해내려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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