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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신)

한신(韓信)의 "무행(無行)"

by 중은우시 2009. 2. 9.

글: 독서삼미(讀書三味)

 

<<사기.회음후열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위포의시, 빈무행(始爲布衣時, 貧無行)"이라고 적혀 있다. <<한서. 한신전>>에도 마찬가지로 "가빈무행(家貧無行)"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글에서 "무행"의 의미에 대하여 일부 명가들은 모두 "한신이 품행이 좋지 못했다"라고 해석해놓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처음에 한신을 읽을 때, 나는 시종일관 그를 품행이 엉망인 가난뱅이소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고 깊이가 있게 되면서,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행(行)"이라는 것은 당연히, "품행, 덕행"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행위, 행장(行爲, 行狀)"을 가리킬 수도 있다. 즉, "무행"이라는 것은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덕행이 결핍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행위가 궤이하고, 행동이 특이했으며, 세속관념에 맞지 않아, 통상적인 상리에는 어긋난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신의 "노절정장(怒絶亭長)", "표모반신(漂母飯信)", "수욕과하(受辱下)", "택지장모(擇地葬母)"의 네 가지 일들을 보면, 한신의 "무행"은 확실히 한신의 행위, 행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혼자서 남들과는 다른 행동을 드러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흉금과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이 4가지 사건의 기술은 <<사기>>의 기록이 <<한서>>의 기록보다 훨씬 잘되어 있다. 사마천의 붓아래에서, 한신은 가난하지만 시원시원하고, 가난하지만 뜻이 있고, 가난하지만 담담하고, 가난하지만 이성을 가진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그는 품행이 엉망인 가난뱅이 소년이 아니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람은 가난하지만 뜻은 크게 세웠으며, 정신세계가 아주 풍부했던 뜻있는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첫번째 사건부터 보자: 노절정장.

 

이 사건에 관하여, <<사기>>의 기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한신은 몇차례 남창정장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다. 몇달이  지나서 정장의 처가 이를 귀찮게 여겼다. 그리하여 아침일찍 밥을 해서 자기 방으로 가져가서 먹었다.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한신이 찾아갔지만, 식사를 차려주지 않았다. 한신은 그 의도를 알고 화를 내며 관계를 단절하고 가버렸다,

 

<<사기>>는 한신이 정장의 집으로 몇번을 갔는지 얼마나 긴 기간동안인지를 모두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몇차례"에 걸치고, "몇 달"에 걸쳐 있다. 이것은 음미할 만하다. 여러달동안 여러끼니를 얻어먹었다. 1달에 1번이라고 하더라도, 정장의 마누라로서는 귀찮아할 만하다. 그리하여 그들과 관계를 절연해버리는 것이다. 나중에 한신이 금의환향한 후에, 정장에게 백전(百錢)을 주는 것으로 모욕했다. 그러나, 위 글에서 "몇차례"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한신을 귀찮아했다는데서는 정장의 속좁음을 눈치챌 수 있고, 한신이 "화를 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신의 오골(傲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신처럼 빈곤하면서도 소인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배를 곯을지언정 억지로 얻어낸 밥은 먹지 않았다. 이것이 품행이 엉망인 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서>>는 느낌이 조금 다르게 적었다. <<한서>>에는 "몇번" "몇달", "화를 내며"라는 문구가 빠져있다. 한신이 정장의 집으로 가서 식사한 횟수와 시간를 명확히 적지 않았다. 한신이 자주 갔고, 낯짝이 두꺼워서, 다른 사람이 귀찮아할 만하다고 느끼게 했다. 특히 한신이 떠나간 것은 아무 말도 없이 떠나서, 한신이 부끄럽게 생각하고 더 이상 면목이 없어서 떠난 것이라고 느끼게 한다. 확실히 <<한서>>의 이러한 문구를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품행은 정말 문제가 있다. 최소한 사람의 동정을 받을만하지는 않다.

 

다시 두번째 사건을 보자: 표모반신.

 

<<사기>>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신이 성의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여러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아낙네가 한신이 배고파하는 것을 보고는 한신에게 싸가지고 온 밥을 나눠주었다. 이렇게 수십일간 빨래를 하였다. 한신은 기뻐하며 그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말했다: "내가 후일에 반드시 부인이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겠다." 그러자 그 아낙네가 화를 내며 말했다: "사내 주제에 자기 먹을 것도 해결못하고 있으면서...내가 젊은이가 불쌍해서 먹을 것을 주었을 뿐인게, 무슨 보답을 바라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모두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마천의 붓아래에, 강가의 빨래하는 아낙네는 분명히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을 가련하게 여기고, 한신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이 것이 바로 빨래하는 아낙네의 독특한 점이고 고귀한 점이다. 그런데, <<한서>>는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우선, "빨래하는 아낙이 여럿"이라는 내용이 빠졌다. 이렇게 여럿이 빨래하면서 그중 한 사람이 밥을 건네준 것과 혼자서 빨래하다가 밥을 건네준 것은 차이가 크다.

 

이뿐아니라, "한신이 기뻐하며..(信喜)"라는 내용도 <<한서>>에는 빠져 있다. 필자의 이해로는 이 두 글자는 아주 중요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글자가 아니다. 빨래하는 아낙네는 강가에서 "수십일을 빨래하였는데" 한신은 그녀로부터 수십일간 밥을 공짜로 얻어먹었다. 이것은 정장의 집에서 얻어먹은 수차례보다 훨씬 많다. 다만, 한신의 "기쁨"은 그것때문만은 아니다. 한신의 "기쁨"은 바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보답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답은 단순히 빨래하는 아낙네가 준 밥에 대한 보답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빨래하는 아낙네가 자신이 빈곤하고 성공하지 못하였을때 도와준 마음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한신이 기뻐하며"라는 문구를 빠트린 <<한서>>의 기록은 확실히 조금 이상하다. 한신이 직접 아낙네에게 보은을 하겠다고 말하면 확실히 이상한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몇끼 밥을 얻어먹고는 이처럼 거창하게 보답을 운운하다니, 이는 말이 행동을 앞서며, 자잘한 일을 큰 일로 만들어버리니 한신이 무슨 허풍쟁이인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는가?

 

다시 세번째 사건을 보자. "수욕과하"

 

이 일에 대하여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음에서 살고 있을 때, 청년이 한신을 모욕하여 말했다. "너는 키는 크고 허리에 칼도 차고 다니는데, 사실은 겁장이이다" 여러 사람앞에서 한신을 모욕주며 말했다: "네가 죽음이 겁나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지나가고,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서 지나가라!" 한신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아래로 나와서 바닥에 엎드려 기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비웃으며 그를 겁장이라고 생각했다.

 

<<사기>>의 이 글고 <<한서>>의 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서>>에는 한신이 "부출과하(俯出下)"한 이후에, "바닥을 엎드려 기어갔다(蒲伏)"라는 말이 빠져있다. 그러나, <<사기>>에는 한신이 가랑이사이로 지나간 후, 바닥을 엎드려 기어갔다는 내용을 추가하고 있다. 그런데, <<한서>>는 이를 생략해버렸다. 그렇다면, "포복"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떤 미묘한 차이가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 구분은 바로 "포복"을 함으로써 한신이 은인자중하고 겁쟁이가 아니라는 이미지를 더욱 생동감있고 확실히 전달한다고 본다.

 

말그대로, "포복"은 땅바닥에 엎드려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한신은 이미 악동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땅바닥에 엎드려서 계속 기어간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신이 아주 담담하며, 절대로 그의 위세에 눌려서 가랑이를 단순히 빠져나오려고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는 것을 인생과정에서의 하나의 단련기회,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으며, 이를 가지고 자신의 의지와 성격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나라때의 시인 한옥은 시를 남겨, "잠시 가랑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랴. 스스로 창창한 앞날이 있고, 올곶은 마음이 있음에야."라고 하였는데, 아주 적절한 말이다.

 

다시 네번째 사건을 보자: "택지장모"

 

이 일에 대하여 <<사기>>에서는 정문에 쓰지 않고,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평론부분에 써 두었다.

 

그 모친이 죽음에 가난하여 묻을 곳이 없었다. 그래도 높고 탁트인 땅을 골라서 묻었고, 곁에 만채의 집을 지을만한 널찍한 장소였다.

 

가난한 청년이 모친을 장사지낼 돈조차 없으면서도 높으면서도 넓다란 묘지를 고르고, 묘지의 주위는 집 만채를 지을 정도로 컸다면, 한신의 야망이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확실히 "무행"이다. 경제상의 난장이이면서 정신상의 거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기>>와 <<한서>>의 기록내용은 일치한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사마천은 이 내용을 <<한서>>처럼 정문(正文)에 써넣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마천이 완곡하고 깊이있게 이런 의미를 전달하려 한 것이 아닐까: "사람이라면, 뜻은 높고 멀리 가져야 한다. 다만 현실의 땅바닥을 딛고 서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 한걸음 한걸음씩 이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신처럼 아무 것도 없으면서 허황된 꿈을 꾼다면, 천고에 한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한서>>와 같이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기술로는 나타낼 방법이 없다. 확실히 한신에 대하여 사마천은 아쉬워하면서도 비판적이다. 그가 아쉬워한 것은 한신의 "무행"이고, 그가 비판한 것도 한신의 "무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