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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도광제(道光帝) : 중국역사상 가장 검소했던 황제

by 중은우시 2006. 12. 29.

역람전현국여가(歷覽前賢國與家)

성유근검패유사(成由勤儉敗由奢)

 

이전의 나라와 집안을 살펴보니,

성공은 근검에서 나왔고, 실패는 사치에서 나왔다

 

이 말에 의하면, 제왕이 근검절약하면 국가는 융성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검절약을 숭상했던 청나라 말기의 도광제는 그의 대청황조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쇠퇴하게 만들었다.

 

도광제가 젊었을 때, 비록 성격이 호방하고, 거동이 멋있었나, 돈에 대하여는 매우 따졌다. 그는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종일 궁안에서 비빈들과 장작, 쌀, 기름, 소금과 같은 사소한 일들을 얘기하기를 즐겼다. 그는 궁중의 비용을 상세하게 계산한 후에 성지를 내렸는데, 궁내에서 쓰는 비용은 이후 매년 20만은자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후궁들은 일년내내 새 옷을 만들 수가 없었고, 모두 낡은 옷을 걸쳤다. 황후의 궁안에 놓은 의자방석도 낡은 것이었다.

 

도광제는 항상 사람은 반드시 근검절약해야 한다고 하였고, 대신들을 만나도, 근검절약에 대하여 한마디씩 하곤 했다.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더 심하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대신들도 황제를 본받았다. 모두 낡은 관복을 입고 조정에 나왔다. 대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양쪽에 거지들이 줄 서 있는 것같았고, 황제는 거지두목같았다. 관리들은 감히 새 옷을 입을 수 없었고, 그래서 북경성내의 낡은 옷을 파는 가게의 낡은 옷은 모두 동이나버렷다. 그리고 낡은 옷이 더 비싼 가격에 팔렸다. 처음에는 낡은 옷과 새 옷의 가격이 같아서, 많은 관리들은 새 옷을 가져다주고 낡은 옷으로 바꿔갔었다. 그러나 갈수록 낡은 옷이 모자라게 되자, 가격이 올라가서 낡은 옷 1개가 새 옷 2벌보다 비싸게 되었다. 몇몇 관리들은 바꿀 수가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새 옷에 구멍을 내서 기웠고, 소매에는 일부러 기름이나 진흙을 묻혔다. 그래야 황제가 기뻐했으니까.

 

도광제는 근검을 스스로 실천할 뿐아니라, 신하들에게도 요구했다. 바로 공신들에게 식사를 내릴 때에도 그는 아주 근검하게 하였다. 대학사 장령(長齡)이 신강지역을 평정하고 역적의 괴수 장격이람(張格爾欖)을 붙잡아 북경으로 압송했다. 도광제는 친히 오문에서 포로를 받은 후에 연회를 열었다. 그는 내선방에서 비용을 너무 많이 쓸까 걱정되어, 명을 내려 아주 검소하게 준비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초청한 손님은 장령 이외에 15명의 노신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두 개의 탁자에 앉았는데, 식탁위에는 몇개의 음식만 보였다. 대신들은 감히 수저를 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번 먹게 되면 식탁위에 음식이 남지 않아서, 그다지 좋지 않은 광경이 될 수 있을 것같아서였다. 도광제는 위에 앉았는데, 역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그저 대신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중에는 시를 논했다. 그 후 연석으로 시를 직시 시작하여 80구의 칠언고시를 지었고, 당시의 군신간에 즐기는 것을 화가를 시켜 군신동락의 그림 한 폭으로 남겼다. 거의 2개시진(4시간)을 이렇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놀다가 흩어졌다.

 

도광제의 근검절약에 옆에서 거든 것은 무영전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었다. 조진용은 평소에 한푼을 쓰더라고 꼭 계산을 했다. 그의 집에는 낡은 노새가 끄는 가마가 있었다. 집안의 주방장은 가마를 끄는 잡역부의 역할도 겸하게 했다. 조대학사는 매일 차를 타고, 아침 일찍 나와서, 채소시장에 가면 옷을 벗고 찻속에서 채소바구니와 저울을 꺼내서 들고는 친히 채소를 사러 간다. 그래고 채소장사와 가격가지고 싸우다가 자주 약간의 돈때문에 서로 욕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때 조진용은 대학사라는 신분을 드러내고 채소장사를 아문으로 끌고가겠다고 위협한다. 채소장사는 대학사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땅바닥에 박으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조 대학사는 한푼의 이익을 보고는 득의만면하여 돌아왔다. 이런 천성은 도광제와 멋진 짝을 이루었고, 황제는 당연히 그와 얘기하면 마음이 잘 맞았다. 매일 조대학사를 궁중으로 불러 이런 저런 얘기를 길게 나누곤 하였다. 환관들은 조대학사가 황제와 무슨 국가대사를 논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나누는 얘기는 전부 집안의 소소한 일들이었다. 하루는 조 대학사가 낡은 바지를 입고 입궁했는데, 양무릎에 손바닥같은 모양으로 새로 기웠다. 황제는 이를 보고서 얼마 들었는지 물어봤다. 조진용은 3전 은자가 들었다고 아뢰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짐도 마찬가지로 두 군데를 기웠는데, 어째서 내무부는 5전 은자를 받아갔지라고 얘기하면서 조진용에게 기운 곳을 보여주었다. 조진용은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급히 황상께서 기운 것은 훨씬 정성들여서 했으므로 가격이 비쌀 것이라고 말했다. 도광제는 한숨을 쉬고는 이후 궁안의 황후와 후궁들을 족쳐서 바느질을 배우도록 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황제의 옷에 구멍이 나면 후궁들에게 주어서 기우도록 하면, 내무부에서 한푼도 이익을 보지 못할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조 대학사는 평상시에는 자주 전문밖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각지의 술집, 음식점에서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자기가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싼 음식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선방에 분부하여 만들도록 시켰다. 도광제는 궁중에서 만드는 음식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여 가능한 한 아끼려고 한 것이다. 매번 어선을 먹을 때마다 관례에 따르면 800냥은자를 썼다. 그러나, 나중에는 야채만 먹고 고기를 먹지 않아서 60-70냥의 은자를 썼다. 계란 하나를 더 먹으면 5냥은자를 썼다. 하루는 황제가 조진용과 계란먹는 것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었는데, 조대학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4개의 계란을 먹는다고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다. "계란 하나가 5냥은자인데, 너는 매일 4개씩 먹으면 매일 20냥을 쓰는 것이 아니냐" 조 대학사는 급히 아뢰었다. "신이 먹는 계란은 모두 신의 집에서 기르는 암탉이 낳은 것입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는 웃었다. "그런 좋은 일이 있었구나, 몇 마리의 암탉을 기르면, 돈을 쓰지 않고도 달걀을 먹을 수 있군" 그리고는 내무부에 명을 내려 암탉을 사오게 하고 궁중에서 닭을 길렀다. 그러나, 내무부는 사오는 닭 1마리도 24냥의 은자로 계산했다.

 

도광제의 근검절약은 많은 대신들이 따라했다. 목창아(穆彰阿)는 매번 입궁할 때마다, 낡은 관복을 입었는데, 황제는 그것을 보고 그가 대신의 풍모를 지녔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바깥에서는 뇌물을 받고 아주 사치하게 살았다. 특히 도광제의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돈을 많이 챙겼다. 황태후의 생일이 있던 날 도광제는 돈을 많이 쓸까 걱정되어 명을 내려서 사치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성지가 내려오자 대신들은 황제가 돈을 아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창아가 앞장서서 황상에게 황상이 내무부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아도 되며, 황태후 생신의 모든 비용은 신하들이 부담하겠다고 말한다. 황제는 자연히 기뻐했다. 그리하여 황태후만주대전의 준비처에 목창아를 처장으로 임명해주었다. 목창아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각 지방과 부서에서 돈을 받아냈다. 목창아는 이 만수대전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이득을 보았다.

 

채동번은 도광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헛되이 그 말(末)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그 본(本)을 다스리지 못했다. 의복을 아끼고 음식을 줄이는 행위는 집안을 다스리기에는 충분하나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는 부족하다" 과연 일국의 황제로서의 도광제의 근검절약에 대한 여러가지 행위는 가소로운 점이 있다. 이는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안이 아닐 뿐아니라 허위적이고 아부하는 신하들만 만들어냈으며, 외국열강이 중국의 대문을 강제로 열고자 할 때, 도광제의 근검절약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