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란성덕(納蘭性德, 1655-1685). 만주족, 정황기. 자(字)는 용약(容若)이어서, 납란용약이라고도 부른다. 호는 능가산인(楞伽山人)이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성덕(成德)이었었는데, 당시 황태자인 윤잉(胤礽)의 아명인 보성(保成)의 이름글자를 피휘하여 성덕(性德)으로 바꾸었다.
그의 부친은 명주(明珠)로 무영전대학사를 지낸 강희제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중 하나였다. 납란성덕은 17세때 태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는데, 국자감제주였던 서문원이 그의 재주를 아꼈고, 자신의 형이자 내각학사, 예부시랑인 서건학(徐乾學)에게 소개한다. 그는 18세때 순천부향시에 참가하여 합격하고, 19세에 회시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병이 들어 최종시험인 전시에는 참가하지 못한다. 그후 그는 서건학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1676년(강희15년)에 22세의 나이로 과거의 최종시험인 전시에 2갑7등으로 합격하였으니, 진사출신이다. 삼등시위를 받았다가 1등시위까지 승진하니, 무관으로 정삼품에 이르렀다.
그는 청나라제일의 사인(詞人)으로 일컬어지며, 평생 한족문인들과 교유가 깊었다. 예를 들면, 주이존, 진유송, 고정관, 강신영, 엄승손등이 그들이다. 그는 여러 저작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성취도가 높은 것은 사(詞)이다. 현재 349수가 남아 있다. 왕국유의 평에 의하면, "북송이후 오직 그 한 사람 뿐이다"
납란성덕이 17세가 되던 해에, 양광총독(兩廣總督)인 노흥조(盧興祖)의 딸을 처로 맞이한다. 이때 노씨는 18살이었다. 그녀는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고, 성격이 온화하여, 결혼후 두 사람의 애정은 아주 깊었다. 납란성덕이 18세때 쓴 사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취화작예농빙현(吹花嚼蘂弄氷弦)". 여기서 "취화"는 말 그대로 하면 꽃을 분다는 뜻인데, 버드나무잎같은 잎을 불어서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작예"는 꽃술을 씹는다는 말인데, 향내나는 꽃술을 씹어 잎에서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빙현"은 빙잠사(氷蠶絲)로 만든 거문고의 줄을 가리킨다. 즉,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을 그대로 형용한 것이다. 노씨는 아주 재주가 뛰어난 여인이었으나, 하늘이 그녀의 뛰어남을 시기하였는지, 결혼후 3년후에 출산후의 조리를 잘못하여 죽고 만다.
오래지 않아, 납란성덕은 후처인 관씨(官氏)를 맞이한다. 이 여인은 첫째부인인 노씨보다 훨씬 집안이 쟁쟁했다. 그녀는 일등공(一等公)의 딸이었고, 용모도 아주 뛰어났다. 다만, 재주의 면에 있어서는 노씨에 미치지 못했다. 관씨는 납란성덕에게 시집온 이후에 자식을 낳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근거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납란성덕이 지은 사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있다고도 한다. 그것은 바로 "일종아미, 하현불사초현호(一種蛾眉, 下弦不似初弦好, 같은 눈썹인데, 아랫쪽 줄이 첫 줄보다 좋지 못하다)"는 구절이다. 아마도 납란성덕이 관씨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것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첩을 둘 씩이나 더 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족의 혼인제도에 따르면, "일부일처일첩"이었다.
납란성덕은 관씨를 맞이한 후에 다시 미모가 뛰어난 안씨(顔氏)를 첩으로 들인다. 그러나, 관씨와 안씨는 모두 감정교류의 측면에서 노씨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납란성덕이 30세가 되던 해에, 친구인 고정관(顧貞觀)의 소개로 강남의 미녀작가를 첩으로 들인다. 이로써 마음이 서로 통하는 여인을 취하겠다는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게 된다. 이 미녀작가는 심완(沈宛)이라고 하는 여인인데, <<선몽사(選夢詞)>>라는 작품집이 있다. 아쉽게도 당시 납란성덕은 황제의 시위를 맡고 있었고, 업무가 특수하여, 한족여인과는 결혼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심완은 납란성덕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 납란성덕이 죽고, 심완은 유복자를 낳는다. 이 유복자는 납란씨집안에 거두어지고, 심완은 강남으로 되돌아간다. "부삼(富森)"이라고 부르는 이 유복자는 납란씨의 족보에 올라가고, 그가 70세 되었을 때, 건륭제가 베푼 "천수연(千叟宴)"에도 참석한다
납란성덕이 31세가 되던해의 5월 어느 날, 친구들과 만난 후에 옛병이 도져서, 7일간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납란성덕과 심완간의 애정은 몇달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세속의 각도로 보거나, 남성의 각도에서 보면, 납란성덕의 일생은 참으로 완벽했다. 부친은 재상으로 고관대작이어서 집안배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금숫가락을 물고나온 행운아인 것이다. 거기에 부인들은 하나같이 꽃같은 미녀들이었으니, 염복도 있었다. 또한, 그 자신에게 뛰어난 재능도 부여받았다.
그의 단명을 "미녀와 결혼하면 요절한다"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미녀와 결혼한 남자는 보통여자와 결혼한 남자보다 평균수명이 12년은 짧다고 한다. 그러나, 납란성덕이 여색에 탐닉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일, "사랑이 깊으면 오래살지 못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이치에 맞다고 보면, 납란성덕은 노씨에 대한 애정이 가장 깊었다. 한번은 그가 소복을 입은 노씨를 꿈에서 만나게 되는데, 노씨는 그의 손을 붙잡고 여러가지 말들을 속삭였다. 떠날 때 이런 싯구를 남긴다: "함한원위천상월, 년년유득향랑원(銜恨願爲天上月, 年年猶得向郞圓)". 납란성덕은 잠에서 깬 후에 슬픔에 빠진다. 납란성덕의 현존하는 300여수의 사중에서 애정에 관한 것이 100여수이다. 그리고, 그중 50여수가 죽은 처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애정에 관한 사에서도, "수(愁)", "루(淚)", "한(恨)", "단장(斷腸)", "상심(傷心)", "추창(惆悵)", "초췌(憔悴)", "처량(悽凉)"등의 글자가 많이 나온다.
사랑이 깊으면 몸이 상하는 법이다. 감정을 발설할 수 있다면, 몸에도 좋을 것이다. 만일 사를 짓는 것이 이러한 감정을 배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아마도 그의 우울한 감정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런 사를 짓는 것도 정신건강활동에 유익할 것이므로, 반드시 단명의 요소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납란성석은 22세에 진사가 되어, 황제의 3등시위가 되었다. 그리고 3등시위에서 1등시위까지 승진하는데 9년이 걸렸다. 단조롭고 구속된 시위로서의 생활은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강희황제는 속이 깊어 속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그런 강희제를 모시고, 잡다한 일들을 하는 자신의 생활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조정의 내부투쟁에 부친인 명주가 깊이 연루되어 있으므로, 마음이 편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납란성덕은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아주 냉정한 평가를 내려 놓고 있었다: "실의매다여의소, 종고기인칭굴, 수지도, 복인재절(失意每多如意少, 終古幾人稱屈, 須知道, 福因才折)"라는 구절이 있는데, "실의매다여의소"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항상 많고 마음대로 되는 일이 적다'는 말이고, "복인재절"은 '복을 타고났지만 재주가 있으므로 인하여 오히려 꺽이게 된다'는 말인데...이것은 납란성덕의 일생을 잘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와 같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살았다면 당연히 행복했어야 할 것인데,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이고, 이것은 집안에서 그에게 기대하는 것과 달랐다.
키케로가 얘기한 것처럼, "모든 천재는 우울하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중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양갸초(倉央嘉措): 시인이었던 달라이 라마 (0) | 2009.08.17 |
---|---|
홍임휘(洪任輝)사건: 청나라 80년 쇄국정책의 도화선 (0) | 2009.01.20 |
도광제(道光帝) : 중국역사상 가장 검소했던 황제 (0) | 2006.12.29 |
왕총아(王聰兒) : 백련교의 난을 이끈 여두목 (0) | 2006.10.21 |
도광제의 딸들 (0) | 2006.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