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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섭문(葉問, Ip Man): 이소룡, 주성치의 스승

by 중은우시 2009. 1. 12.

 

 

 

글: 협생(俠生)

 

섭문(葉問, Ip Man, 1893-1972)의 본명은 섭계문(葉繼問)이다. 광동 불산의 부잣집 아들이다. 집안에서는 둘째이다. 섭씨는 불산의 복현로 상원(桑園)에 거주했는데, 부지도 넓고, 집이 여러 거리에 걸쳐 있다.

 

불산은 청나라때 영남일대의 무학중심이었고, 홍권(洪拳)의 명인 황비홍(黃飛鴻), 영춘권의 명가 양찬(梁贊), 철혈포두 풍소청(馮小淸)등이 모두 불산출신이다.

 

섭문은 7살때부터 영춘권의 양찬의 제자인 진화순(陳華順)을 스승으로 모시고 영춘권을 배운다. 당시 진화순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이 어린 제자를 아주 아꼈다. 섭문이 13살때, 진화순이 사망한다. 임종전에 큰제자 오중소(吳仲素)에게 섭문을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고, 섭문이 영춘권을 다 익히게 도와주라고 한다. 그리하여, 섭문은 오중소의 권관(拳館)으로 가서 계속 무예를 익힌다. 오중소에게서 3년간 힘들게 수련한다.

 

16세가 되던 해, 섭문은 홍콩으로 공부하러 간다. 당시는 청나라말기여서, 중국인들은 "동아병부(東亞病夫)"라고 불릴 때였다. 학교에서 영국, 미국학생들은 자주 중국학생을 못살게 굴었다. 섭문은 키가 작고(1미터63센티미터), 용모도 준수하여 더더욱 그들이 괴롭히는 대상이 되었다. 누가 알았으랴. 섭문이 화가나서 반격하자, 그 외국학생은 꼬리를 만 새앙쥐꼴이 되고 만다. 나중에 다시 다른 학교에서 권법을 익힌 외국학생이 도전하여 왔지만, 모두 섭문에게 일패도지한다. 점점 섭문의 쿵후는 명성을 얻게 된다.

 

하루는, 한 노인이 섭문을 찾아와서 "강수(講手, 비무)"를 신청한다. 섭문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응해준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온갖 재주를 다 펼쳤지만, 모두 그 노인에 의하여 가볍게 모두 파해되었다. 그리고 섭문은 상대방의 초식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섭문은 기가 죽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때 노인은 입을 열어 물어본다: "네가 진화순의 제자이냐?" 섭문은 깜짝 놀랐다. 노인이 말한다: "내가 양벽이다" 섭문은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것같았다. 그가 바로 영춘권왕 양찬의 아들로서 사람들이 "벽선생(壁先生)"이라고 부르던 양벽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섭문은 홍콩에서 사숙인 양벽을 따라 계속 영춘권을 익힌다.

 

1913년, 20세가 된 섭문은 양벽을 떠나서 불산으로 돌아가 가업을 승계한다. 그는 자주 불산 일대의 무술가들과 교류한다. 영춘권도 점차 화경(化境)에 든다.

 

섭문은 영춘권 쿵후에 깊은 조예가 있는 외에, 계속 현대과학지식을 습득하여 역학원리, 기하각도등으로 권법을 해석했다.

 

항일전쟁기간동안, 전체 불산지역의 공상업은 모두 일본인들이 통제하고 점유한다. 섭가의 생활도 곤란에 빠지고, 자주 세끼를 제대로 잇기도 힘들었다.

 

섭문의 쿵후는 일본헌병에게도 알려진다. 그리하여 그에게 헌병대의 무술교관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섭문은 바로 거절한다. 헌병대는 여러번 고수를 보내어 섭문과 비무한다. 이들 소위 비무는 일본군의 총구앞에서 진행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섭문에게 졌다고 인정하고 말라고 하였지만, 섭문은 생사는 도외시하고, 이들 일본의 고수들을 눌러버렸다. 나중에 일본군이 추가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자, 섭문은 외지로 숨어버렸다. 그는 "한 사람의 민족정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문제는 절대 흐릿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섭문은 다시 고향 불산으로 되돌아온다. 현부의 형사조직에서 일한다. 그는 일찌기 강도를 붙잡기도 했다. 나중에 다시 광주시에서 남구 순라대장의 직도 맡는다.

 

1949년, 섭문은 홍콩으로 건너간다. 호텔공회의 이사장인 양상(梁相)과 알게 된다. 양상은 무술애호가이다. 그는 섭문을 스승으로 모시고, 권법을 익힌다. 그리고 섭문을 구룡의 호텔공회로 모셔서 공개적으로 무술을 전수하게 한다. 배우려는 자들이 많아지자, 섭문은 다시 장소를 바꾸고, 저녁에 시간대를 나누어 여러 무관에서 무술을 가르친다.

 

그의 생명중 마지막 22년동안, 섭문은 홍콩 마카오 대만에 영춘권을 널리 퍼트려, 영춘권의 씨를 세계의 곳곳에 뿌린다. 그가 생전에 배출한 제자는 양상, 이소룡, 황돈량(黃惇梁)등 뛰어난 제자들 외에도, 영화계에 섭문의 문하스타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이소룡 외에도, 왕가위(王家衛), 주성치(周星馳), 양조위(梁朝偉), 적룡(狄龍)등이 모두 섭문의 제자가 된다.

 

섭문의 제자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당연히 중국무술을 세계에 알린 무술영화의 대스타 이소룡일 것이다.

 

1956년 16세의 이소룡이 섭문의 문하에 들어온다. 당시 이소룡은 이미 아주 이름있는 어린 스타였다. 그가 무관에 왔을 때, 모습도 남달랐다: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꼈으며, 머리카락은 번쩍거렸다. 처음에 사형인 황돈량(드라마 <<이소룡전기>>에 나오는 대사형 충량의 원형임, 원래 권격고수엿는데, 섭문을 찾아왔다가 패배한 후에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이 그를 지도했다. 황돈량은 처음에 이소룡을 봤을 때는 오래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과연 1주일이 지난 후, 이소룡은 재미없는 기마자세와 단식수련을 귀찮아하고,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기괴한 것은 반달후에 이소룡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황돈량이 자세히 물어보니, 며칠 전에 그가 바깥에서 다른 사람과 비무를 했는데, 처음에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얻어맞았다고 한다. 급한 마음에 이소룡은 막 배웠던 영춘권의 "일자연황충격"을 생각해냈고, 이것으로 상대방을 이겼다고 한다. 이소룡은 영춘권의 무서운 점을 깨닫고, 이후 전심전력을 다하고, 절대 수련시간을 빼먹지 않았다. 심지어 거의 광적인 수준에 달했다. 길거리를 걸어다닐 때도, 주먹을 휘두르며 걸어서 길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릴 정도였다.

 

이소룡은 미국으로 가서도 계속 쿵후를 연마했다. 의문이 있으면 국제전화를 걸어 섭문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이들 심득을 모두 모아서 나중에 "절권도(截拳道)"를 창립한다. 세상사람은 이소룡의 무술수준에 놀라지만, 거기에는 섭문의 공로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섭문은 평소의 행동거지가 아주 우아하고 시원시원하여 무림고수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 자신도 자신의 말재주가 없음을 인정한다. 만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몇마디 하라고 하면 그는 항상 입이 마르는 것같다고 말한다.

 

무술수련외에 섭문은 제자들과 차루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이외에 우연히 마작을 놀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귀뚜라미싸움을 즐기기도 했다. 광동의 귀뚜라미는 아주 용맹하고 싸움을 잘한다. 두 귀뚜라미는 수십회합을 싸우고, 어떤 귀뚜라미는 다리가 부러져도 여전히 용맹하게 싸운다. 개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그의 취미중 하나였다. 섭문은 개싸움을 볼 때, 많은 경우는 다른 무술고수 한사람과 함께 갔다. 그는 바로 그는 바로 사형조수(蛇形刁手) 양가방(梁家芳)이었다. 그는 섭향과 같은 고향사람으로 친한 친구라 할 수 있다.

 

1972년, 섭문이 죽는다. 영춘문 제자들은 그를 영춘파의 일대종사로 추앙한다.

 

그의 아들 섭준(葉準), 섭정(葉正)은 부업을 계승하여, 해외에 영춘권을 보급하는데 열심이다. 현재 섭준 및 그 제자는 세계 60여개국가에 걸쳐 3000여개의 영춘권회 조직을 이끌고 있다.

 

[영춘권(詠春拳)]

 

영춘권은 소림의 적전무술중 하나이다. 영춘은 창시자인 엄영춘(嚴詠春)의 이름에서 땄다. 엄영춘은 청나라말기의 여인으로 어려서부터 부친 엄이(嚴二)와 광서 대량산의 아래에서 두부장사를 했다. 남소림에서 대량산 백학관에 피신해 있던 오매(五枚)대사로부터 기예를 전수받는다. 그후, 뱀과 학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권술의 도를 깨닫고, 무예를 대성한다. 엄영춘은 오매대사에게 권법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자, 대사는 "너의 이름이 영춘이나 영춘을 이 권법의 이름으로 하면 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춘권'이라는 이름이 정식 탄생한다.

 

엄영춘은 결혼후에 무예를 남편인 양박주(梁博儔)에게 무예를 전한다. 양박주는 다시 조카인 양란계(梁蘭桂)에게 전하고, 양란계는 다시 황화보(黃華寶)와 양이제(梁二娣)에게 전한다. 그후 양이제는 광동 불산의 명의(名醫) 양찬(梁贊)에게 전수한다. 양찬은 아침저녁으로 수련하여, 무예에 맹진한다. 원근의 무림고수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찾아와서 비무를 청하나 모두 그에게 패배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불산찬선생(佛山贊先生)"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남해권왕(南海拳王)"이라는 칭호도 부여했다. 이로써 영춘권은 널리 이름을 날린다.

 

양찬은 무예를 아들인 양벽(梁壁)과 제자인 진화순(陳華順)에게 전수한다. 진씨는 일생동안 제자를 16명 두었는데, 섭문은 그의 마지막 제자였다고 한다. 섭문의 문하에 이소룡이 가장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