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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화)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by 중은우시 2009. 1. 10.

 

 

 

글: 왕약곡(王若谷)

 

"정화하서양"에 대하여 두 가지 완전히 다른 평가가 있고,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화하서양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긍정하는 것이든, 아니면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이든 둘 다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너무 편면적이고 급진적이다. 우리는 오늘날 정화하서양을 기념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왜 "학자들은 뜨겁고, 정부도 뜨거운데, 백성들은 차가운가"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백성들은 왜 정화의 장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실제로, 오늘날의 사람들 뿐아니라, 우리의 조상들도 정화에 대하여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정화에 대한 냉담함과 오늘날 사람들의 정화에 대한 냉담함은 성질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다. 옛 사람들은 비록 많은 조공국을 두는 것은 좋아했지만, '사해'에 속하는 머나먼 조공국에 대하여는 그다지 실질적인 흥미를 못느꼈다. 서방인들처럼 정복, 점령, 식민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고, 그저 그들이 조공을 바치러 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며, 조공을 바치러 오지 않아도 별 관계는 없었다. 그러므로, 정화의 성취는 특별히 중시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정화에 냉담한 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태도로 보인다: 한가지는 고대중국의 그 '천조상국'의 '선화(宣化)'태도에 대한 반감이다; 다른 한가지는 화려하기만 하고 실질은 없는 여행방식의 방문에 별로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왕왕 중국이 서방국가처럼 정복하고 식민지를 개척하지 않은 것이 우매한 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태도는 비록 완전히 상반되지만 모두 부분적으로 현대적인 사고의 표현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은 정화의 실제성취와 효능은 세계나 중국에 모두 별로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결국 정화하서양의 최종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정화하서양은 600년전에 발생했고, 규모는 사상유례없이 컸다. 왜 갔는가?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나, <<명사. 정화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조(영락제)는 혜제(건문제 주윤문)가 해외로 도망한 것으로 의심하여, 그의 종적을 찾으려 했다(成祖疑惠帝亡海外, 欲踪迹之)".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가 죽어라 바다로까지 눈길을 돌린 것일까?

 

깊이를 알수없는 바다는 도대체 어떤 매력을 품고 있을까? 영락제는 분명히 영명한 황제였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비싼 투자를 한데에는 도대체 어떤 댓가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매번 조금씩 더 멀리 갔던 선단은 도대체 어떤 소식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을까?

 

어떤 사람은 시선을 한 신비인물이 사라진 점에 집중한다. 이 방대한 선단은 바로 이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 가치가 원양선단을 초과하는 중요한 인물은 다름아닌 바로 영락제가 4년의 전쟁을 통하여 전복시킨 그 황제 즉, 건문제 주윤문이다. <<명사.공민제본기>>에 따르면,영락제가 남경 금천문으로 진입하던 그날, "궁중에는 불길이 솟았고, (건문)제는 행방불명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정화하서양은 영락제가 정화를 해외로 보내어 건문제의 행방을 찾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부득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큰 화재로 건문제의 생사거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불속에 타죽었는지, 아니면 난리통에 도망을 쳤는지? 이 의문은 계속 영락제를 바늘방석에 앉아있게 만들었다. <<명실록>>은 역대학자가 주의하지 않았던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영락제는 "6월에 황제위를 찬탈"했다. 남경 자금성에 들어간 후, 옥새(玉璽)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 "수명어천(受命於天, 하늘로부터 명을 받다)"이라고 새겨진 옥새가 사라짐에 따라 영락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옥새가 주원장이 건문제 주윤문을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한 물적 증거였기 때문이다. 주윤문은 언제든지 그 옥새를 가지고 천하에 명을 내릴 수가 있다. 그 옥새 자체가 '정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만개의 목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사료에서 단서를 찾아보자면, 하나의 지도가 주의를 끈다.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도성인 남경으로 들이닥친 그날, 막다른 길에 몰린 건문제 주윤문은 궁전을 불태우라고 명령한다. 동시에 급한 와중에 주원장에 생전에 그에게 남겨준 쇠상자를 생각해서 두껑을 연다. 제일 위에는 양피지가 있었고, 양피지에는 먹으로 그린 지도가 들어있었다. 지도에는 건궁곁의 옛우물에 지하통로가 있어 장강부근의 공묘(孔廟)까지 연결된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도는 공묘를 기점으로 하여, 무창으로 가는 도로가 그려져 있었다. 확실히 이는 심계가 깊고 노련한 주원장이 손자가 숙부들의 도전을 견디어내지 못할지로 모른다고 우려하여 그를 위하여 마련해둔 마지막 도망의 길이었다. 이것은 실측지도가 아니라 그냥 한폭의 약도였다. 천군만마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던 주원장은 반쯤은 지리학자이기도 했다. 강남의 지형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일고 있었다. 그는 그의 손자를 위하여 가장 빠른 도망길을 마련해둔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윤문은 이 지도를 읽은 후, 아무런 망설임없이, 쇠상자 속에 사전에 준비해둔 가사, 짚신, 승려모자, 도첩(度牒), 체도(剃刀), 은전등의 물건을 챙겨, 삭발하여 스님으로 변장한 후, 공묘를 거쳐 경성을 도망쳐나간다.

 

이 지도는 일부 역사비록에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주윤문 본인을 빼고는 아무도 그 진면목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존재했던가? 이 간단한 약도가 위난에 빠진 황제의 생명을 구해주었던가?

 

정화의 고향에 있는 비석인 <<정화환향소묘기>>에 따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마씨 둘째아들 태감 정화는 명을 받아 영락9년 십일월 이십이일, 조상묘를 성묘하고...십이월 길일 돌아갔다."

 

황제의 명을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성묘는 아마도 핑계일 것이다. 아마도, 이번 귀향에서 그는 정화하서양처럼 무슨 비밀명령을 받고 온 것은 아닐까? 황제 한 사람이 도망침으로 인하여, 자기의 대부분의 생명을 도로와 지도에 맡겼던 사람이 또 얼마나 더 있었을까?

 

영락2년, 1404년 정월말, 정화의 친구인 태감 이정(李挺)은 영락제의 며을 받아, 주윤문의 종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무창의 나한사(羅漢寺)에서 두 신비한 승려의 단서를 찾아낸다. 그리고 심양에서 이들 승려들이 배를 타고 파양호에서 남하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신강(信江)에서는 일찌기 소금을 파는 상인이 두 사람과 함께 응담(鷹潭)에서 남쪽으로 출발했는데, 아마도 복건(福建) 방향으로 향한 것같다는 말을 듣는다.

 

이정은 금방 복건의 천주(泉州)까지 추적해간다. 최소한 8세기이전에, 천주는 이미 동서양항해선상의 주요한 항구였다. 중국이 남아시아, 서아시아, 동아프리카로 항해하는 기점이었다. 여기서, 각종 피부색의 상인을 만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자신의 언어로 자신들의 해상항해경력을 말했다. 천주 개원사(開元寺)의 주지인 염해(念海)화상은 이정에게 말해준다. 작년말, 두 명의 내지에서 온 승려가 아랍의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이정은 건문제가 국내에서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자, 이미 해외로 도망쳐서 살아남으려 했다고 믿었다. 바다는 망망한데, 그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망간 주윤문, 그리고 아마도 존재할 그 아랍상선...영락제의 시선은 먼 곳으로 향했다.

 

정화하서양의 동기에 관하여, 지금까지도 학자들은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엄청난 돈을 들인 이 선단이 설마 그저 호화스러운 수색대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미 황제위에서 쫓겨난 황제가 정말 세계역사에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였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는 답변이라면, 정화하서양의 최종목적은 정말 보잘 것 없을 뿐아니라 사소한 것이었다. 그저 황제위를 빼앗은 다음에 풀을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일뿐이었다. 만일 '아니다'라는 답변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방대한 선단을 이끌고 가게 만들었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이 선단이 엄청난 추진력으로 아프리카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가? 고기원(顧起元)이 1628년에 편찬한 <<객좌췌어>>에서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1465년-1487년 사이에, 조정은 국가자료관에서 정화하서양에 관련된 모든 문헌을 찾아내어, 병부시랑 유대하(劉大夏)가 이를 책임지고 불살랐다고 한다. 그때부터, 정화는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된다. 왜 자료를 불태웠을까? 혹시 거기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되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명사.정화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차욕요병이역, 시중국부강(且欲耀兵異域, 示中國富强)

그리고, 이역에 군사력을 자랑하고, 중국의 부강함을 보이고자 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차(且, 그리고)"이다. 이것은 결국 "욕요병이역, 시중국부강"이 사실은 부수적인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락제의 첫째목적이자 최종목적은 여전히 건문제를 찾아서 죽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만일, 정화하서양의 한 목적이 바로 건문제를 찾는 것이라면, 최소한 7번이나 갈 필요는 없었다. 영락3년부터 영락제가 재위하는 동안 계속 되었는데, 건문제를 찾기 위함이라면 그렇게 여러해동안 찾을 필요는 없었다. 영락제의 정권은 이미 안정되었고, 그는 웅재대략이 군주이다. 그 소황제는 이미 패배했고, 건문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현정권에 위험할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정화를 이렇게 큰 규모로 파견하고, 이렇게 장기간 파견한 것을 건문제를 찾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주장은 필자의 생각으로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라는 것일 뿐이다. 아무런 근거나 가치가 없다. 실제로, 역사상 영락제와 같은 자들은 자기의 황제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는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았고,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이 측면에서는 인력, 물자, 재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그 황제위가 바로 남에게 빼앗아 온 것이 아닌가? 명분도 없고 정의롭지도 못한 방법으로...

 

목적이 사소했으므로, 성과도 사소했다; 목적이 형편없었으므로 결과도 형편없었다.

 

이것이 결론이다. 설마 그렇지 않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