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화)

정화하서양(鄭和下西洋)이 티무르제국의 동진을 견제하기 위해서인가?

by 중은우시 2012. 1. 31.

작자: 미상

 

 

티무르

 

정화하서양의 목적에 대하여 고찰하는 여러가지 논저중에서, 아주 권위있는 한 가지 견해가 있다. 즉, 정화하서양은 티무르의 동진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이 설은 정화하서양이라는 역사사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억측일 뿐이고, 믿을만하지는 못하다.

 

1336년 4월 8일, 티무르는 완전히 투르크화한 몽골족 부락에서 출생한다. 그의 부친은 추장이었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징기스칸의 종형제의 후손이다. 모친은 징기스칸의 후손이다. 그래서 티무르는 자신을 작은 징기스칸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숙부를 죽게 만들고, 그를 대체하여 부족의 추장이 된다. 부락에 이에 불복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는 아프간으로 도망친다. 그는 영토쟁탈전투에서 티무르는 오른발에 상처를 입어, 장애인이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부른다. 그는 이천의 패잔병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몽기아오공군(蒙幾兒五公軍)을 대파하고, 고향애서 그는 병력을 보충한다. 계속하여 성을 점령하여, 그는 1370년에 중앙아시아의 최고통치자가 된다. 그는 용맹한 철기군과 신축성있는 전술 그리고 완강한 전투정신을 가지고 그의 부대가 가는 곳은 백전백승을 거둔다. 여러해의 전투를 거쳐, 티무르는 방대한 제국을 건립한다. 서로는 지중해에 이르러 에게해에까지 이른다. 동으로는 중국과 인도와 접경을 이루고, 북으로는 카스피해, 아랄해, 흑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아랍해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는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들판에 서서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나는 징기스칸의 후손이다. 나는 황금가족의 일원이다. 나는 몽골대제국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고, 나는 세계를 통치할 것이다.

 

중국을 노리던 티무르는 인도의 절반을 차지한 후, 대명제국에는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사마르칸트와 중국의 사이에 있는 아프간, 파키스탄 및 인도, 네팔등 제국의 지형과 기후가 모두 열악했다. 해발 5천여미터의 파미르고원은 티무르가 넘기 어려운 천연장벽이었다.

 

둘째, 이때 티무르의 뒤에는 소위 "뇌신(雷神)"이 있었다. 그는 호시탐탐 티무르제국을 노렸다. 이 대명이 자자한 '뇌신'은 이름이 바예지드 1세이다. 그는 훈련이 잘 되고, 전투를 잘하며, 매우 용맹한 오십만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투르크를 일으켰을 뿐아니라, 유럽의 16국연합군도 무찔렀다.

 

1402년 7월, 티무르는 '뇌신' 바예지드 1세와 결전을 치른다. 티무르는 강대한 병력과 기민한 기동력으로 3만의 경기병을 이끌고 적군의 중기병 중앙제대 4만명을 저격하고, 십이만명의 절대적 우세병력으로 바예지드 1세의 양익을 공격하여 3만6천명이 손을 들고 투항하게 만든다. 티무르는 오만명의 예비대를 전투에 투입하여 투르크군대의 중앙을 공격한다. 바예지드 1세와 왕자 1명은 생포된다.

 

맞다. 투르크의 '뇌신'을 정복한 후, 등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티무르는 80만대군을 모아서, 1405년 대명제국을 정복하는 길에 오른다.

 

정화하서양이 티무르제국을 견제하려는 것이라는 사람들은 고의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하고 있다:

 

첫째, 육백년전인 1405년에 현대화된 교통도구는 없었다. 티무르의 80만대군은 전부가 경장철기군이 아니었다. 그는 징기스칸의 몽골군과 기본적으로 같았다. 전략행동에서도 가족들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정벌하러 하는데, 도중에 '나라가 백여명에 달하고, 모두 만리나 떨어져 있다. 한해가 지났을 때 비로소 도착한다." 즉, 해발오천미터의 파미르고원은 티무르의 철기군을 막지 못했고, 그의 행군은 최소한 1년여의 시간이 걸린다.

 

둘째, 티무르대군의 대명제국에 대한 이 행동은 선전포고없이 싸우는 것이다.

 

셋째, 대명제국은 스스로 천조상국(天朝上國)으로 자처했지만, 현대화된 통신도구는 없었다. 간첩이 사전에 정보를 얻었더라도, 일시에 그 정보를 영락제에게 전달할 수가 없었다. 영락11년, 진성이 명을 받아 사신으로 서역의 사마르칸트에 간다. 정월 십삼일 숙주위에서 출발하여, 주천, 옥문을 통과하는 고대 비단길을 지나간다. 십개월을 걸어서, 비로소 합열(哈烈)에 도착한다. 육백년전의 합열은 지금의 신강경내이다. 진성의 <서역행정기>가 이를 증명해준다.

 

넷째, 길이 멀다는 것을 제외하고, 역대이래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은 원니라때 쿠빌라이가 건립한 중앙아시아의 참적(站赤, 즉 역참)이다. 원나라후기에 들어, 정치부패로, 역참은 거의 무너져 버린다. 감천역참을 예로 들면, 원래 348명의 참호가 있었는데, 15세기 초엽에는 겨우 176호만 남는다. 영락10년에 서역에 사신으로 떠난 진성의 시도 이를 반증한다.

 

다섯째, 더욱 중요한 점은 정화하서양이 실제로는 1405년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사>와 <명실록>등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1403년 즉 영락원년에 정화는 이미 선단을 이끌고 수마트라등지에서 공무를 수행한다. 당시의 지리개념으로 수마트라는 서양이다. 즉 정화가 하서양을 시작할 때, 티무르대군은 아직 앙카라 성아래에서 투르크의 뇌신 바예지드1세와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섯째, 정화하서양때, 비록 이백여척의 선박을 가지고 있었지만, 2만7,8천명의 장병을 이끌고 갔을 뿐이다. 이정도의 병력은 망망대해에 한줌의 소금을 뿌리는 정도인데, 어찌 티무르의 팔십만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일곱째, 정화하서양의 전기 3차의 목적지는 모두 고리(古里)이다. 그 지리적 위치는 오늘날 인도반도의 서남부인 Kerala국의 Calicut이다. 티무르의 동정노선과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리고 중간에 인도5국과 파키스탄 및 아프간등 몇 개지역의 아주 넓은 국가가 놓여 있다. 만일 정화하서양을 굳이 전략적 행동이라고 한다면, 격화소양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티무르의 80만대군과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