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동청(海東靑)
2002년, 영국 해군장교 개빈 맨시스가 쓴 책 한 권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동시에 중국내에도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이름은 <1421년,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다>이다. 이 책은 처음으로 정화의 선단이 지구일주항해를 실현했고, 서방의 대항해시대보다 빨리 아메리카대륙과 대양주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맨시스는 14년에 걸친 연구를 통하여, 정화가 1421년의 장거리항해시 선단이 말라카에 도착한 후, 함대를 넷으로 나눈다. 각 소선단은 화포를 장착한 군대였고, 그중의 세개의 소선단은 태감 홍보(洪保), 주만(周滿), 주문(周聞)이 통솔하였고, 네번째 소선단은 규모가 가장 적었는데, 정화가 직접 지휘했다. 정화는 명을 받아 아시아, 아프리카의 16개국가의 사신을 귀국시킨 후, 혼자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른 소선단은 계속 항해를 하였고, 인류역사상 진정한 발견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전통적인 중국사에서 묘사한 것처럼, 선단이 아프리카의 동해안에 도착한 후 모두 돌아온 것이 아니다. 일부분 선단은 계속하여 전진했고, 광활한 미지의 땅을 탐색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서해안에 도착했으며,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서, 대서양에 있는 Cape Verde군도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들은 거대한 폭풍을 만나서 희망봉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단을 나누어 계속 서진하기로 결정한다. 대서양을 건너서, 각자 귀국하는 길을 찾아나섰다.
주문의 선단은 독자적으로 서북쪽으로 항해한다. 대서양을 건너 중앙아메리카로 가고,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북미 동북부의 그린란드에 도착한다. 그후 그린란드를 돌아, 북대서양, 북빙양을 지나 동쪽으로 항해한다. 계속하여 서부시베리아의 동북부에 있는 추크치해에 도착한다. 거기서 베링해협을 지나, 동해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다.
홍보와 주만의 선단은 Cape Verde군도에서 서남으로 항해한다. 대서양을 지나 남아메리카의 북부에 도착한다.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남미대륙 최남단의 마젤란해협을 지난다. 이때 아주 악독한 날씨를 만나, 살길을 찾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나뉘어진다. 홍보는 계속 남으로 항해하여, 남극대륙부근에 도착한다. 남극대륙을 돌아, 대서양을 지나 사우스서덜랜드섬에 도착한다. 그후에 방향을 꺽어 북상하여, 남인도양을 동진하고, 호주 서남쪽에 도착한 후 계속하여 서북으로 항해한다. 남지나해에 들어와서 그들은 자신들이 다시 말라카로 돌아온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여기서 보급품을 제공받아 중국으로 돌아간다.
가장 신기한 것은 주만이 이끄는 선단이었다. 그들은 극단적인 대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마젤란해협을 통과한 후, 남미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서, 에콰도르에 도착한 후,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어 태평양을 횡단하여,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동해안에 도착한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한바퀴 돈 후에,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필리핀군도로 북상한다. 길을 잃어서, 이때 천신만고를 겪은 주만의 선단은 여기서 귀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리하여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다시 망망대해의 태평양을 항해한다. 그들은 두번째로 태평양을 횡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카나다의 서해안에 도착하고,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의 서해안에 도착한다. 그리고 거기에 일부 사람을 남긴다. 더 이상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세번째로 태평양을 횡단한다. 필리핀을 향해서 배를 몬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지나해를 통과하여 귀국한다. 이번 항해는 개략 3만킬로미터로, 2년반의 시간이 걸려 남경에 돌아온다. 이때 선단은 거의 다 잃었고, 겨우 몇 개만 남는다.
1423년 10월 8일(영락 이십년 구월 초나흘)에 남경항 부근의 해면에 돌연 몇 척의 기괴한 해선이 나타난다. 배의 몸체는 이미 망가져서 볼 품이 없었고, 배에 탄 사람들의 의복도 남루했다. 피골이 상접하여,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들어봐도 너무나 기이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었다. 극소수 나이가 든 사람들만이 비로소 그들이 아마도 주만이 이끌었던 그 정화의 선단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개빈 맨시스의 책에서 대량의 증거를 제시하여, 그의 견해를 증명하려 했다. 문헌의 기록도 있고, 고고학적 연구성과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곳에서 분명한 잘못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정화의 마지막 항해는 1430년이었지, 1421년이 아니었다. 그는 모두 7번 항해를 떠났고, 6번이 아니다.
개빈 맨시스의 견해는 전체 서방의 현대항해사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리고 내용중에는 엄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그리하여, 서방매체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책에서 열거한 몇가지 견해와 논거는 검토해볼만한 것들이고, 연구가 필요하다. 손쉽게 모조리 부정해버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남지역에서 홍목으로 된 침몰선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홍목조각을 발굴해냈는데, 이들 홍목조각이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생장한 목재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아닌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만든 독목주(獨木舟)인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홍목조각을 중국의 기관에 보내어 방사성탄소분석을 하고 있다. 이는 맨시스의 책에서 중국인이 가장 먼저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였다는 주장에 부합한다.
아이슬랜드의 고대문헌중에, 중국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1448년, 교황 니콜라스가 아이슬란드의 Skalhol와 Holar주교에게 보낸 서신은 아주 기이하다, 서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약30년전, 부근 해안에 이교도중에서 온 야만인이 있다. 포악무도하게 불과 검을 써서 잔혹하게 그린란드 원주민을 습격했고, 그들의 국가와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했으며, 겨우 9개 교구의 성당만이 남게 되었다. 가련한 원주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들이 끌고갔다…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곤경을 벗어나서 그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1448년에서 30년을 빼면 바로 정화가 제6차 하서양을 한 시기이다. 교황이 말한 야만인은 북유럽 노르만인과 같은 기독교도가 아닐 것이고, 이교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당시 동방에서 유럽으로 침입한 사람들을 비로소 야만인으로 칭했다. 이렇게 추단하면, 교황이 가리키는 것은 몽골인으로 보인다. 북미 인디안은 몽골족이다 그러나 그들은 검과 불을 사용하여 전쟁하지 않는다. 대포를 장착한 중국전함만이 ‘야만인’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민간에는 아주 오래 전에 중국인이 왔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시간적으로 정화의 항해시기와 일치한다.
여러가지 현상들을 보면, 정화의 선단은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먼 곳까지 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관례에 따르면, 정화는 도착하는 곳마다, 상세한 항해일지를 적었다. 그런데 왜 중국의 역사에는 이를 반영하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수역주자록>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하서양의 자료인 <정화출사수정>은 원래 병부에 보관되어 있었다. 명헌종 성화연간에 황상이 조서를 내려 병부에서 삼보의 구자료를 조사하도록 시킨다. 병부상서 항충은 관리를 보내어 3일간 자료를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 책은 이미 거가랑중 유대하가 먼저 숨겨버렸다. 항충이 관리들을 추궁했다. 창고의 자료가 어떻게 사라졌단 말인가?
당시 현장에 있던 유대하가 말한다: “삼보가 항해를 하면서 돈을 수십만을 썼다. 군인과 백성중 죽은 자가 만이 넘는다.” 선단이 가져온 물건인 “장, 공죽, 포도, 석류, 큰새알”등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항해기록은 모조리 괴이하여 잃어버리지 않았고, 즉시 불태워버린다고 하더라도 추궁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중국과학원 해양연구소의 연구원인 정일균은 이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다. 그는 유대하가 겨우 병부의 일개 낭중에 불과하므로, 절대로 이렇게 담이 크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일을 벌일 뿐아니라 상사에게 대들기까지 하였다. 정화의 항해자료는 사실 잃어버리지 않았다. “적어도 만력말기까지 병부에 여전히 정화하서양의 자료가 남아 있었다.” 그는 정화자료는 아마도 명말청초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할 때, 혹은 청나라병사가 북경을 점령할 때 전화중에 잃은 것일 것으로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화의 항해기록은 사실 청나라통치자들이 고심끝에 없애버린 것이라고 본다. 주요한 원인은 서방화기의 전파를 겁냈고, 그들의 쇄국정책을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자옥을 대거 일으키면서, 일부 사서를 임의로 고쳤는데, 화를 유대하에게 전가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화출사수정>은 많은 원시자료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칙서, 정화선단의 편제, 명단, 항해일지, 장부등등. 정화자료중 대부분이 유대하에 의하여 파기되었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이들 진귀한 자료가 실종된 것은 정화연구에 많은 곤란과 한계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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