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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손상향(孫尙香)의 비참한 운명

by 중은우시 2008. 7. 19.

글: 월초(越楚)

 

<<적벽>>에서 조미(趙薇)가 연기한 손상향(孫尙香)은 민간에서 손상향(孫上香)이라고 쓰기도 한다. 아마도 구두문학이 전해내려오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것이다. 사실, "孫尙香"이든 "孫上香"이든 이것은 희곡이나 문학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고, "부인도 잃고 병사도 잃는" 그 이야기에 나오는 손부인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손부인을 "손상향"으로 불렀을지는 의문이지만, 이 글에서는 그냥 손상향으로 불러주기로 한다. 역사상 진실한 손상향은 정치투쟁의 희생품이고, 그녀의 일생은 비참한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손권이 정치동맹을 위하여 여동생을 유비에게 보내어 부인으로 삼은 것은 적벽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영화 <<적벽>>에서 손상향이 나올 일이 원래 없는 것이다. 적벽대전은 209년 겨울에 일어난다. 유비와 손상향의 결혼은 그 다음해 연말의 일이다. 당시 유비의 감부인이 병사하여, 손권은 정략결혼을 통하여 공동으로 조조에 대항할 것을 계획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정략결혼이 손상향의 일생에 비참한 운명을 드리웠다.

 

손상향이 유비에게 시집갈 때 나이는 겨우 19살의 묘령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이미 반백이 다된 나이였고, 여러번 결혼한 바 있는 중늙은이였다. 손상향은 용모가 단정했을 뿐아니라, 생각이 민첩했으며, 성격은 강인했다. 그녀의 오빠들과 비슷한 풍도였다. 그러므로, 그녀가 유비에게 시집간 것은 그녀가 손해보는 것이었고, 완전히 핍박속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애정이랄 것은 전혀 없는 혼인이었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인은 영웅을 사랑한다'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서에서도 손상향의 방에는 시비 백여명이 칼을 들고 시립해있어, 유비가 들어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간담이 서늘했다고 적고 있다. 평소에 칼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던 손상향은 자기의 방안에도 백여명의 칼을 든 시비를 배치해서, 유비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마음 속으로 두렵게 느끼게 만들었다. 여기에서도 손상향이 이 결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결혼후 부부간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도 짐작해볼 수 있다.

 

손상향과 유비의 사랑이라고는 없는 결혼생활은 겨우 2년간 지속된다. 211년 유비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익주(사천)로 들어간다. 이후 부부는 각자 떨어져서 생활하게 되고,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한다. 손권은 유비가 익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배를 보내어 손부인을 맞이해온다. 그리고 손상향으로 하여금 나이 겨우 4살인 유비의 아들 유선(아두)를 동오로 데려오게 시킨다. 그 목적은 당연히 유비의 유일한 아들을 인질로 잡아서, 동오가 남군의 땅을 되돌려받는데 쓰겠다는 것일 것이다. 나중에 장비, 조운이 병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아서 겨우 유선을 돌려받아온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손상향에게서 강제로 유선을 빼앗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손상향과 유비의 정략결혼은 불행으로 끝장을 맺는다.

 

다시 동오로 돌아온 손상향은 나이 겨우 21살이었다. 정사이든 야사이든 손상향이 재가했는지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한창 나이에 과부가 되어 홀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후의 세월동안 손상향은 한편으로는 적막하고 외로운 과부생활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한 정신적인 압력도 견뎌야 했다. 즉, 동오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시종 적군의 우두머리인 유비의 부인이다. 촉한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동오와 결탁하여 유선을 인질로 삼고자 한 혐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유비는 촉에서 황제에 오른 후에도 그녀에게 어떤 봉호(封號)도 내리지 않는다. 편장군 오의의 여동생을 황후로 삼는다. 유선이 황제위를 승계한 후에도 그녀를 황태후로 추증하지도 않았다. 촉한의 사서에서는 그저 그녀를 "부인"으로 칭할 뿐이고, 그녀를 위해 단독으로 전(傳)을 두지도 않았다.

 

손상향은 파로장군 손견의 딸이면서, 동오의 대제 손권의 누이동생이고, 촉한의 선주 유비의 처로서 아주 고귀하였지만, 그녀의 인생은 아주 처량하게도 정치투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손상향이 언제 우울하게 생을 마쳤는지에 대하여도 역사서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다. 민간에서는 유비가 죽은 후에,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구강, 무호, 남경, 진강등지에는 모두 손부인이 강을 던진 곳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고, 사당도 적지 않게 세워져 있다. 그녀는 효희낭낭(梟姬娘娘)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영택부인(靈澤夫人)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민간백성들이 그녀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