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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는 왜 "정조증명서"를 제출했는가?

by 중은우시 2008. 2. 12.

작자: 미상

 

임표의 부인인 섭군(葉群)의 인사자료에는 남편인 임표가 당조직에 제출한 "정조증명서(貞操證明書)"가 하나 들어 있는데 그 주요한 내용은 "섭군 동지가 나와 결혼할 때 여전히 처녀였음을 정중하게 성명한다"는 것이다. 이 증명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전형적인 반면교재로 활용되었고, 임표의 심리세계가 왜곡되고, 음험하다고 비판하며, 그가 국가를 배반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여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조증명서"를 제출한 것은 당시의 특수한 역사배경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국내정세는 한 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정치적인 방향도 오리무중이었다. 임표는 아직 '후계자'로 확정되지 않았다. 각 지도자급 인물들은 후계자로 올라갈 수도 있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중요한 시기에 이해관계가 있는 한 인물이 섭군의 과거문제를 익명서신의 형태로 폭로했다. 주로 섭군이 연안으로 가기 전에 아나운서로 생활하면서 풍기가 문란했고, 국민당의 여러 요인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등등의 내용이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살던 사람들에게 풍기문제는 큰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실을 줄 뿐아니라,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이를 돌파구로 하여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까지 판단했고, 타도대상인지 여부까지 판단했었다. 만일 부부의 어느 한 측에 문제가 터지면, 배우자는 물론 가정까지도 온전하게 보전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조증명서"가 나온 것이다.

 

임표와 같은 지도자급인물이 "정조증명서"를 제출한 것은 주로 아래의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였다. 당은 모친이고 당원은 자녀이지만, 전쟁연대에 많은 혁명부부는 조직의 소개로 가정을 이루었으며, 그후 여러해동안 조직에서 공개적으로 조직구성원의 사생활문제를 토론한 것도 드물지 않게 보는 일이었다. 모친인 당이 확인하고 싶어한다면, 자녀로서는 프라이버시를 따지지 않고 조금도 감추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뿐아니라 생명마저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입당선서때 당원은 오른손을 들어, 언제든지 당과 인민을 위하여 일체를 희생할 것이며, 영원히 당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다.

 

둘째, 역공을 통하여 정치적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다. 핵심적인 시기에 치명적인 폭로가 이루어졌으니, 상대방은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고자 하는 것이다. 임표부부는 익명서신을 보낸 사람에 대하여 이를 갈 정도로 한을 품었다. 임표는 공개적으로 그들을 "조사해내서 총살을 10번은 시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상대방을 격패시키기 위해서는 파부침주(破釜沈舟)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임표 부주석은 "정조증명서"를 과감하게 당조직에 제출한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는 자기보호이다. 문혁때는 모든 사람이 위기상황이었다. 위로는 국가주석에서부터 아래로는 무명소졸에 이르기까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타도될 운명을 피하려면, 프라이버시니 뭐니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임표가 "정조증명서"를 제출한 것은 특수한 배경하에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괴이한 "자료문서"는 중국현대역사와 문혁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