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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사건에 연루된 개국장군들

by 중은우시 2007. 1. 15.

출처: 철혈군사(鐵血軍事)

 

1971년 9월 13일 "9.13사건"이 발생한다. 같은 해 9월 18일, 중공중앙은 중발[1971]57호문건 <<임표의 국가를 반란하고 도망친 사건에 관한 통지>>를 내리면서, 동시에 일부 임표의 일파로 분류되는 인원을 체포하였다. 국면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후에, 중공중앙은 각대군구(各大軍區), 각성시(各省市), 각군병종(各軍兵種)에서 임표의 세력을 청소하는 정리정돈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개국장군들이 연루되어 비판받고, 격리조사받았다. 일부 조치는 적절하였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확대화의 잘못을 범하여, 잘못 처벌한 경우도 있었다. 전쟁시대에 전장을 누비던 장군들이 이 시기에 많이 희생당했다.

 

"임표사건"에서 가장 먼저 체포된 개국장군은 남경군구 공군 전 정위(政委) 강등교(江騰蛟)였다. 그러나 직위가 가장 높고, 가장 깊이 말려든 것은 황영승(黃永勝), 오법헌(吳法憲), 이작붕(李作鵬), 구회작(邱會作)이었다. 이들은 전 제4야전군의 간부출신들이다.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임부통수(副統帥)를 가까이 따랐던 사람들이다. 9월 24일, 네 사람은 모두 '정직반성'처분을 받고, 북경위수구 순의현의 부대에 감금된다. 9월 25일, '삼국사방회의'에 참석했던 남경군구 공군부사령관 주건평(周建平)도 격리조사받는다. 9월 29일 중공중앙은 '통지'를 내려, 황, 오, 이, 구의 처리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1971년 12월 21일, 중공중앙은 중발[1971]77호문건에서 "진백달(陳伯達)은 임표의 지지하에, 화북각지를 돌아다리면서 이설봉(李雪峰), 정유산(鄭維山)등을 끌어들이고 연락했으며 미친 듯이 반혁명유세를 하였으며, 임표와 진백달의 반당집단은 제9기 2중전회에서 당권을 탈취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고 하였다. 1971년 1월 24일에 이미 북경군구 사령관의 직위에서 철직된 정유산은 진백달의 집단으로 하여 임표집단내에 끌어들여진 것이다. 이 문건중에서는 또한 "오법헌은 왕병장(王秉璋), 왕유국(王維國), 진려운(陳勵雲)등과 한담을 하면서 중앙의 일부 간부를 직접 이름을 거론하면서 악독하게 공격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소조회의에서 당을 향하여 진공하도록 격려했다"고 하였다. 또한 중앙문건은 국방과학위원회 제1부주임인 왕병장이 "당을 향하여 공격했다"고 적었으니, 왕의 몰락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면, 왕병장은 잘못은 있었지만, 그가 당을 공격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성도군구(成都軍區)는 연루된 사람이 비교적 많았다. 1972년 3월 23일, 중앙은 중발[1972]14호문건을 내려보내었는데, 이름이 거명된 장군이 모두 6명이었다. 바로 성도군구사령관 양흥초(梁興初), 제2정위(第二政委) 진인기(陳仁麒), 제3정위 사가상(謝家祥), 제1부사령관 온옥성(溫玉成), 성도군구 공군정위 정조(鄭조), 민항총국정위 유금평(劉錦平)이 그들이다. 문건에서는 유금평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는 사천에 와서 여러 사람과 밀모하였다고 되어 있다. 다른 다섯 명은 정도가 약간씩 다르다. 문건에서는 "양흥초, 진인기, 사가상의 세 동지는 적선을 탔고, 엄중한 방향노선의 잘못과 종파주의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세 사람은 여전히 '동지'로 불리고 있다. 잘못한 내용도 비교적 추상적이고, 그들은 반성후에 양흥초는 태원화공창, 인인기는 난주연유창으로 보내여저 노동을 하였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문제가 심각했다. 문건에서 "임표일당은 온옥성을 성도군구에 파견하였고, 다시 일당 유패풍(劉沛豊)을 신야전사령부에 파견하였다. 유금평, 왕비, 노민은 사천에 온 후에 반혁명음모를 꾀하였다. 정조와 함께 반혁명정변의 음모활동을 꾀하였다" 이것은 잘못정도가 아니다. 반혁명음모는 범죄이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온옥성은 이미 1971년 9월 16일에 체포되었다고 하며, 왕유국, 진려운보다 더 빠르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1972년 4월 25일, 중공중앙은 절강성에 관한 중발[1972]16호문건을 내려보냈다. 문건에서는 "남평(南萍), 웅응당(熊應堂)의 두 동지는 임표 및 그 일당인 황영승, 오법헌, 진려운, 왕유국, 강등교등의 사람들의 말을 따라서, 서로 뜻이 잘 맞았다" 절강성의 혁명위원회 주임이고 성군구의 정위인 남평과 제20군 군사령관 겸 성군구사령관인 웅응당은 여전히 '동지'로 호칭되었다. 이 문건에서는 '임표의 일당인 섭군....주건평, 주적평등은 절강으로 와서 밀모하였고, 진려운등과 비밀리에 음모를 꾀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반혁명음모활동을 벌였다"  중공중앙에서 복주군구와 복건성에 대하여는 아무런 문건을 내려보내지 않았는데, 이 절강성에 내려보낸 문건에서 중앙은 복주군구 정위이자 복건성 제2서기인 주적평(周赤萍)을 임표일당으로 분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4월 27일, 중발[1972]17호문건에서는 "정세청(程世淸) 동지는 적선을 탔고, 당의 역사를 고쳐 썼으며, 임표를 받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강서성 혁명위원회 주임이자 제26군 정위인 정세청의 문제는 남평등보다 컸다.

 

1972년 7월 16일, 중발[1972]26호문건에서는 "용서금(龍書金) 동지는 임표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산계급사령부의 편에 섰고, 적선을 탔으며, 매우 깊이 빠져들었으며 자산계급의 입장을 견지했고, 모주석의 형명노선에 대항하고, 투쟁의 재방향을 돌려버렸다" 신강군구사령관이자, 신강혁명위원회주임인 용서금의 문제도 상당히 컸다. 공군은 임표사건으로 망한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문건에서는 특히 신강주둔 공군9군군사령관 '이만춘(李萬春)동지는 적선을 탔고, 깊이 빠져들었다"고 했다. 이만춘은 개국장군은 아니지만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1972년 11월 4일, 중발[1972]42호문건이 내려왔다. 무한군구 부정위 겸 하남성군구 제2정위이자, 하남성위 서기인 왕신(王新)이 임표의 일당으로 되었다.

 

1973년 1월 7일, 중앙은 제남군구와 산동성에 관한 중발[1973]4호문건을 내려보냈다. "임표의 일당인 오법선, 이작붕, 강등교, 왕비, 정홍진(程洪珍) 및 임표가 조종하는 반혁명별동대 '소연합함대'의 다른 일부 핵심분자는 산동성으로 와서 이요채(易耀彩), 신국치(辛國治), 오종선(吳宗先), 포옥청(包玉靑)등과 비밀리에 결탁하고, 서로 밀모하여, 반혁명음모활동을 크게 벌였다" 북해함대의 정위 이요채, 함대부정위 신국치, 제남군구공군사령원 오종선의 3 사람에게는 '동지'라는 말이 붙지 않았다. 문건은 중점적으로 "성위, 제남군구당위의 주요책임자동지들은 제10차노선투쟁에서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였아.여기서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거론하는 것은 제남군구사령관, 성위제1서기, 혁명위원회주임인 양득지(楊得志)와 군구제2정위 원승평(袁昇平)이었다. 양은 여러차례의 감사를 통과했지만, 원은 통과하지 못했다.

 

"9.13사건"에서 적지 않은 장군들이 타도되고 비판받았었다. 총정치부 부주임 황지용(黃志勇), 총후근부 부부장 왕희극(王希克), 이문(伊文), 군정대학 정위 장수천(張秀川). 무한군구 정위 유풍(劉豊), 공군부사령관 증국화(曾國華), 난주군구 공군부정위 왕소연(王紹淵), 광주군구 정위 겸 광서군구 제2정위 위조진(韋祖珍), 공군 부참모장 백운(白雲), 하진아(何振亞), 군정대학 부교장 이병령(李丙令), 해군 항공병 부참모장 기정사(紀亭사) 등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