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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충칭(重慶)의 택시파업 그 후...

by 중은우시 2008. 12. 28.

글: 주원정(周遠征)

 

며칠만 지나면, 충칭의 가장 유명한 택시기사 양효명(楊孝明)이 실업한지 2주년이 된다. "한 택시기사인 친구가 나에게 말해다. 어떤 택시회사도 너를 채용하지 않을 것이다. 네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라고. 45세된 양효명은 보기에 그의 실제연령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래도 택시를 몰고 싶다. 다만, 현재 나는 여동생에게 의지하여 먹고 산다. 다만 내가 살아있기만 하면, 인민택시회사의 성립을 쟁취하겠다."

 

11월 3일, 충칭에서는 대규모의 택시파업사건이 벌어졌다. 8000여대의 택시가 운행을 멍추었다. 전세계 매체는 충칭을 주목했다. 충칭에서 가장 유명한 택시기사로 이름난 양효명의 블로그는 아주 시끄러웠다.

 

파업소식은 사실 사전에 이 '외인'인 옛 택시기사의 귀에도 들어왔다. 여러해동안 택시를 몰았으므로 소식은 아주 빨랐다. 그러나, 처음에 양효명은 택시파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회의적이었다. 10월 28일, 한 택시기사가 전화로 다른 기사들이 "휴식"할 거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아마 이번도 또 한번의 실패한 파업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나는 당시에 이번에도 이전에 여러번 그러했던 것처럼 성공적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의 사태발전은 양효명의 상상을 초월했다. 11월 3일, 그저 극소수의 택시기사들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길거리에서 손님을 태웠다. 아침, 신화사 충칭분사는 금방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날 오전, 양효명은 신속히 그가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블로그에 여러 편의 신화사 뉴스원고를 실었다. 그리고 그가 인터넷에 빠져 있을 때, 일부 극소수 길거리에서 손님을 태우던 택시기사들은 극도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충칭 택시총공사의 진선생은 바로 이렇게 공격받는 불행을 당했다. 11월 3일 정오 12년간 택시를 몰아온 경험을 지닌 노련한 택시기사는 요행심리를 안고 손님을 한 명 태우고 사평패(沙坪)로 갔다. 차를 사평패 양공교(楊公橋) 부근까지 몰아갔을 때, 돌맹이 하나가 그의 차유리로 날아들어왔다. 잠정적인 통계에 따르면, 충칭시에서 11월 3일과 11월 4일 일정한 택시가 서로 정도는 다르지만 파손되었다고 한다.

 

택시를 몰고 나가면 파손될 리스크가 있으니, 정부의 명령도 효력을 잃었다. 택시업계를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이번은 첫단계에 충칭시 관련부서의 협조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거대한 사건에 대한 응급수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태는 시간을 오래 끌게 되었다. 당연히, 충칭시의 관련부서는 관련 간부들의 직접지휘하에, 마침내 효과를 보게 된다. 각 국유택시회사는 각종 수단으로 택시에 통보하여 하루빨리 정상운영을 회복하도록 통지했다. 그러나, 이들 국유택시회사의 기사들은 차를 몰고 나간 후에 감히 주요도로이외의 곳은 갈 생각을 못했다. 11월 4일 오후 2시, 충칭의 해방비(解放碑)에서 서명을 하기 위해 도착한 진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몇몇 국유택시회사에서 강제로 소속 택시기사들이 해방비로 와서 서명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택시는 몇 대도 감히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11월 4일) 내 친구의 택시는 북환에서 다시 날아온 돌맹이에 파손당했다. 하마터면 교통사고가 날 뻔했다."

 

충칭시정부의 11월 15일 통보에 따르면, 11월 4일저녁에야 충칭 택시는 전면운영을 시작한다. 한때 곤경에 빠졌단 이 직할시의 동맥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충칭관리들까지도 이번 사건이 우발적 사건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양효명은 망이(網易)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당연히 업계내부이익분배모순이 격화되어 일어난 것이다. 특히 회사는 유교위[2003]401호 문건을 마음대로 바꾸어 착취제도를 설계했다. 이를 통하여 수억위안의 폭리를 가져가고 약탈한 것이다. 그리고 위법하게 비용을 전가하여, 운영수익을 받아간 후, 돌려주지 않거나 공제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6억위안의 택시기사의 재산을 빼앗아갔다." 이 분석은 망이 블로그에서 첫페이지에 올려 놓았고, 수만명이 클릭했다.

 

정부의 공개투명조치에 대하여는 꼬투리잡기를 좋아하는 이 전직택시기사도 잘한 조치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약간 유감으로 느낀다. 택시업계의 이익요구는 상응한 대화채널을 통해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고 본다: "택시기사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파업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이다. 실패는 가능한 의사소통채널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후대화, 협상에서 실질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여긴에는 택시기사들의 사회보험의 시작시기문제, '판판전(板板錢, 사납금)'의 통일과 감소등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택시기사와 정부가 대화를 할 때, 파업에 참가한 바 없는 "실업"택시기사인 그는 더욱 큰 압력에 시달렸다. 그는 회고한다. 11월 4일, 5일, 6일의 한밤중과 대낮에 모두 택시판공실에서는 그를 불러 인정하게 하거나 단서를 제공해달라고 요구받았다. 그리고 진술조서(11월 6일 한밤중에서 7일 새벽 5시까지)를 썼다. 3일간 중간에 쉬는 동안에는 국내매체기자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11월 5일 오후, 정부가 기자회견을 개최할 때 나는 택시판공실에 있었다. 한 처장이 나와 얘기하고 있었다. 나보고 파업을 조직, 참여, 선동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단서를 제공해주면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추문을 만들겠다거나 택시운전자격을 취소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일들은 그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11월 6일 오전, 양효명은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충칭시위서기 보시라이(薄熙來)가 택시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밝히는 것을 보았다.

 

"정부로 말하자면 먼저 우리의 업무를 검토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되돌아봐서 스스로에게 묻겠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를 잘못했는지, 혹은 관료주의행위가 발생한 것을 적시에 처리하지 못했다든지." 11월 6일, 보실이는 택시기사대표와의 좌담회에서 거침이 없었다. 그는 "교통위원회 주임 정순동지가 나에게 보고서를 냈다. 시위원회에 처벌을 요청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실제로 이번 사건이 발생한 후, 왕홍거(王鴻擧) 시장은 국외에서 경제무역활동에 참가하고 있어서, 보시라이 서기가 13일 오전 관련부서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처리의 기본원칙과 구체적인 처리의견을 내놓는다. 이리하여 기본적으로 충칭은 공개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택시기사파업사건을 처리하기로 한다.

 

충칭 현지의 TV방송국, 라디오방송국, 웹사이트는 모두 좌담회에서 라이브로 생방송을 했다. 부시장, 주임, 국장등 정부관리는 직급을 무시하고 택시기사대표들의 중간중간에 섞여 앉았다. 보시라이가 회의장에 들어온 후에 이번 좌담회의 진행자를 맡았다. 16일의 좌담회에서 보시라이는 아주 성의를 가지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먼저 우리의 택시업계군중에 관련된다. 이것은 큰 취업군중이다. 시위원회 시정부는 이럴 큰 군중의 생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우리는 이번 좌담회를 통하여, 우리 양측이 모두 힘을 써서, 시위원회 시정부는 업무를 개선하고, 우리 택시기사들도 계속하여 업무를 개선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후 외지인들이 충칭으로 왔을 때, 우리의 택시를 타면 새로은 느낌을 갖도록 하자."

 

충칭 사회과학원 구역연구소 소장인 이용은 "보시라이 서기는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아주 신속하게 해냈다. 동시에 아주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해냈다. 그가 충칭에 온 후, 민생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현재 택시기사와의 진심어린 교류로 택시기사들의 마음이 풀어져서 안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된다."

 

당연히 좌담회후, 충칭 택시의 판판전(사납금)을 낮추는데는 약간의 곡절을 겪었고, 일부 택시회사는 처음에는 낮춰주려고 하지 않았다. 양효명은 말한다: "택시사건이 상대적으로 가라앉은 후,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사납금 낮춘 것이 보조금으로 변형되었다. 택시기사들이 법률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 사회보험금 60위안도 변형적으로 낮추어진 110위안의 '판판전'에 들어갔다. 보조금지급은 각양각색인데, 일부는 매월 그저 1000위안, 900위안, 700위안만 보조금으로 낸다. 일부는 택시기사들이 스스로 주머니에서 부담하도록 한다."

 

당연히, 택시기사가 충칭택시업계의 개혁을 심화시키고, 더욱 좋은 보장을 받을지는 여전히 각측 이익집단간의 힘겨루기가 필요하다. 현재상황으로 보면, 택시기사는 상대적으로 일부 혜택을 받았다. 여기에는 대학생중에서 택시기사를 초빙하는 것도 추진중이다. 충칭의 택시업계는 점차 변화하고 있다.

 

충칭택시사건이 안정된 후, 한 마음씨좋은 택시차주가 양효명을 찾아왔다. 실업해서 집에서 쉬고 있는 양효명에게 그의 택시를 운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집센 양효명은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중경인민택시주식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2001년에 나는 이 문제를 생각해봤다. 당시의 택시회사는 정부의 경영행정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 허가만 취득하면, 백만, 천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후, 나는 나의 건의서를 시정부와 매체에 보냈다."

 

이 진실되고, 충칭인의 강인함을 가진 택시기사는 이 길에 이렇게 난관이 많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심지어 일자리도 잃는 댓가를 치러야 할 줄은. 2005년 12월, 양효명은 충칭시 공상행정관리국에서 명칭허가통지서를 받는다. 비준받은 명칭은 중경인민택시주식회사"였다. 이 비준통지서를 근거로, 양효명은 공개적으로 자금모집활동을 벌였다. 양효명등의 설계에 따르면, 중경인민택시주식회사는 등록자본금 5000만위안, 자본금총액 8528만위안으로 하여 우선주와 보통주를 두고, 발기인을 199명까지(우선주 보유)로 한다. 발기인은 1인당 주식 10만 - 15만위안을 인수한다. 모집주주는 2000명으로 하며, 택시 2199대의 규모, 택시기사 6600명의 규모로 한다. 2006년 3월, 그는 충칭시 도로운수관리국에 허가증신청을 제출한다. 2199대의 차량을 운영할 경영증 및 개업허가증을 신청한 것이다. 시도로운수관리국은 3월 15일의 답변을 통하여, 그들에게 "택시지표증명", 경영권증명을 내라고 했다. 그러나, 택시 1대에 수십만위안의 지표비가 필요한데, 이렇게 해서는 현행체제하에서는 양효명등이 인민택시회사를 만든다는 꿈은 실현될 수가 없다. 양효명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고, 행정소송을 통하여, 블로그를 통하여, 아직도 고집스럽게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