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대만의 명문대학

by 중은우시 2008. 12. 14.

글: 가운봉(賈雲峰)

 

대만당국의 교육주관부서는 "대학랭킹"을 발표한 바 있다.

 

대만대학(臺灣大學)이 1위에, 성공대학(成功大學), 신죽교통대학(新竹交通大學), 청화대학(淸華大學)이 각각 2위부터 4위에 올랐다. 사립 장경대학(長庚大學)은 랭킹5위에 올랐다.

 

대학랭킹은 2002년도 SCI, SSCI, EI 색인인용논문수로 따졌으며, 군대 및 경찰학교를 제외한 154개 공,사립대학을 대상으로 랭킹을 매긴 것이었다. 1,2위를 차리한 대만대학과 성공대학의 발표논문총수는 각각 3544편, 2141편이었다.

 

필자는 다행히 대만의 4곳 명문대학을 가볼 기회가 있었다. 아래에는 그 네 곳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국립대만대학(國立臺灣大學)

개교시기: 1928년

본교주소: 타이페이시 대안구 루스벨트로 4단 1호

세계랭킹: 124위(2008년)

 

1928년, "국립"대만대학이 건립된다. 그 전신은 일제강점시기의 타이페이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이다. 1945년, "국립"대만대학으로 변경되고, 1949년, 대만대학은 대만내에 가장 많은 사회자원을 투입하는 대학이 된다

 

국립대만대학은 많은 학자들이 가고싶어하는 이상적인 장소이다. 대만의 최고학부일 뿐아니라, 대만에서 세워진지 가장 오래되고, 부지면적이 가장 넓은 대형대학이다. 대만대학은 대만전체면적의 근10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대만대학의 인재육성, 학술연구기능을 빼고, 학교면모를 보더라도, 절대로 자연경관과 인문분위기가 상호 섞여있는 생태관광승지이다.

 

넓다란 야림대도(椰林大道), 하나로 하늘을 가리는 야자수는 대만대학의 개방연박(開放淵博)의 기도를 보여주며, 더할 나위없는 영광과 자부심을 드러낸다. 야림대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이나 바다처럼 넓은 포용력과 광대함을 느끼게 한다. 이 야림대도는 바로 대만대학의 상징물이다.

 

대만대학에 들어가면, 발걸음을 이동할 때마다 서로 다른 모습의 독특한 그림이 펼쳐진다. 바로크식의 풍격, 기세가 대단한 도서관; 조용한 시의를 담고 있고, 낭만적인 취월호; 숲그늘이 도로를 감싸고 있고, 청춘이 넘치는 주산로; 열대우림의 분위기가 넘치고 서양식건축물이 숨어있는 부원; 녹음이 우거진...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매번 21번 울리는 부종(傅鐘)이다. 작고 정교한 형제에서 전해져 오는 것은 무형이지만 널리 울리는 이성의 소리이다. 그것은 일대 교육대가 부사년(傅斯年)의 예지와 안목의 학자적 풍모이다.

 

"우리는 매일 3시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대만대학의 무형의 이념과 정신이다. 무수한 학자들이 매일 최소한 3시간인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대만대학의 넓고 두터운 인재교육기능, 농후한 학술분위기를 나타낸다.

 

국립성공대학(國立成功大學)

개교시기: 1931년

본교주소: 타이난시 대학로 1호

세계랭킹: 351위(2008년)

 

오래전부터 "북대대, 남성공(北臺大, 南成功)"이라는 말이 있다. 국립성공대학의 역사는 대만대학의 바로 다음간다.

 

우선 이름부터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데, "국립성공대학"의 이름인 "성공"은 성공대학을 나오게 되면 모두 탁월한 성취를 이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만의 민족영웅 정성공(鄭成功)을 기념하는 것이다. 성공대학은 정성공이 있던 역사명승 적감루(赤嵌樓)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한 영웅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대학이므로, 그 뜻이나 건교이념과 교육정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립성공대학의 붉은 벽돌로 된 빅토리아식 건축은 학교내의 오래된 옛성벽, 조용한 호수위를 가로지른 오래된 다리, 중서합벽으로 전아하면서도 고아한 뜻이 있어, 독특한 풍경을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것은 용원(榕園)과 성공호(成功湖)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근 100년으 역사를 지닌 것이다. 기괴한 커다란 나무줄기, 울울창창하게 퍼진 이파리, 거대한 우산이 녹색의 잔디위에 펼쳐져있는 것과 같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혹은 캠퍼스의 도로양쪽에 서서, 하늘과 해를 가려주고, 그윽한 조용한 길을 만들어낸다.

 

푸른 빛과 물보라가 이는 성공호는 푸른하늘과 하얀구름 그리고 등나무로 된 다리를 비춘다. 쳐다보면 고박한 가운데 담담한 시의가 넘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시원하게 해준다.

 

유람이라고는 하지만, 책을 끼고 호숫가, 용수아래의 그윽한 곳에서 조용히 읊거나, 혹은 두세친구와 함게 무릎을 마주하고 호숫가의 잔디밭에서 얘기하고싶은 충동을 느긴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그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봉황수, 아름답기 그지없는 봉황화가 급히 시선내로 뚫고 들어와서,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공대학은 3개의 캠퍼스로 나뉜다. 각각 신조(新潮)의 자강(自强)캠퍼스, 서양식의 성공캠퍼스, 옛날식의 광복(光復)갬퍼스, 이름만 보더라도 서로 다른 시대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성공캠퍼스는 종루(鐘樓)가 있다. 이는 성공대학 정신의 상징이다. 이후 이 종루는 성공대학의 표지일 뿐아니라, 타이난시의 대표적인 건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종루의 위에는 대만섬내에서 가장 큰 서양식 종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국립교통대학(國立交通大學)

개교시기: 1958년

학교주소: 신죽시 대학로 1001호

세계랭킹: 322위(2008년)

 

대만교통대학의 교사(校史)를 읽어본 사람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만교통대학의 전신은 지금의 상해교통대학이다.

 

1896년, 교통대학은 상해에서 탄생한다. 처음의 이름은 남양공학이었다. 1912년 남양공학은 상해공업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1921년, 중화민국은 3곳의 상해공업전문학교, 당산공업전문학교, 북평철로관리학교, 북평우전학교를 합쳐서 "교통대학"을 만든다.

 

1949년, 중국대륙의 교통대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접수하고, 원래의 국민당정부하의 교통대학의 교무는 중단된다.

 

1958년, 대만국민당정부는 굥립교통대학전자연구소를 건립한다. 1964년에 대학부를 설립하고, 1967년 정식으로 공립교통대학공학원이라고 명명한다. 1979년 7월, 공립교통대학으로 회복된다. 국립교통대학은 현재 3개의 캠퍼스가 있다. 신죽시 대학로 광복캠퍼스는 현재 가장 주요한 캠퍼스이다.

 

역사의 변천이 부여한 침중한 심정을 안고, 광복캠퍼서를 거닐었다. 어느 한 구석을 가더라도, 마치 무언의 호소가 들리는 것같았다. 그리하여 조용한 호수 하나, 푸른 나무 한그루, 가느다란 대나무 한 가지, 머리위를 지나가는 참새 한 마리, 흩날리는 꽃 한 잎도 모두 독측한 경치를 이루고, 눈에 나타나면 바로 마음 속에 저장된다.

 

이것은 또한 자주 가슴이 품게 되는 생각이다. 이런 정서로 인하여, 캠퍼스안에는 침묵과 조용함, 평범하고 특이할 것이 없는 사물이 항상 가볍게 나를 포로로 삼는다. 나무 하나 풀 하나도 그리워지고, 호수 하나 담장 하나의 앞에서도 조용히 평생을 지냈을 그들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하물며 국립교통대학의 광복캠퍼스는 독특한 캠퍼스배치를 지니고 있다. 울창하게 나무를 심어서 서로 비춰주고, 차례로 청포조양(靑朝陽), 풍정구사(風亭九思), 사원춘효(思園春曉), 하당월색(荷塘月色), 곡도협은(曲道夾), 죽원영정(竹園映亭), 죽호신풍(竹湖晨風), 송림입취(松林立翠), 녹엄중루(綠掩重樓), 옥수향영(玉樹向榮)등 16개 풍경이 있다.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의 정교하고 뛰어나며, 의미깊은 조소, 회화, 촬영 및 얻기 힘든 글씨등이 있다.

 

이곳에는 농후한 중화문화분위기가 곳곳에 드러난다. 예를 들어 천천히 흐르는 고쟁의 곡은 가볍고 진실하고 표묘하며, 때때로 격앙된 비애와 우울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반세기간의 풍우창상에도 여전히 동근동원의 중화문명을 보여주고 기르고 있다.

 

교통대학이 전승하는 인문정신과도 같다: 음수사원(飮水思源)

 

국립청화대학(國立淸華大學)

개교시기: 1955년

학교주소: 신죽시 300 광복로 2단 101호

세계랭킹: 309위(2008년)

 

다른 게 아니라, 이 이름만 보더라도,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름이 중복된 것이 아니라, 북경청화대학과 대만의 국립청화대학은 원래 한 학교이다. 단지, 국립청화대학은 많은 대만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초 국민당정부를 따라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하나의 중국에 두개의 청화대학이 생겨나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의 역사적 상처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11년, 국민정부는 미국이 경자배상금을 돌려주는 것을 이용하여, 북경에 청화학당을 만든다.그리고 1928년, 청화대학으로 고친다. 대일항전기간동안, 청화대학은 곤명으로 이주한다. 북경대학, 남개대학과 합병하여 국립서남연합대학이 된다.

 

국공내전후, 청화대학은 둘로 나뉘게 된다. 북경의 청화대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접수한다. 그러나, 실제 경자배상금을 받은 중화민국정부는 1949년이전에 청화대학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매이기(梅貽琦) 교장으로 하여금 일을 처리하게 하여, 1955년 대만의 신죽시에 청화대학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국립청화대학이라고 명명한다.

 

이처럼 골육은 나누었지만, 깊은 정은 가르기 힘든 이유로, 두 청화대학의 교훈은 계속하여 민국3년 양계초가 원청화대학에서 강의할 때 썼던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 지세곤, 군자이후덕재물" 즉,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이다.

 

"서산창창, 동해망망, 아교장엄, 위연중앙"이라는 교가는 역시 두 곳의 청화대학에서 함께 부르고 있다.

 

교내의 외관에 있어서도 닮은 점이 많다. 대만국립청화대학의 교내건축과 배치는 완전히 북경청화대학의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의 행정빌딩앞에, 마찬가지로 북경청화대학과 꼭같은 "청화원(淸華園)"이라는 문루가 서 있다. 다만 대만청화대학이 약간 작을 뿐이다. 청화원내에는 산과 물이 있어, 상사호, 곤명호, 성공호등의 호수 사이로 냇물이 흐른다. 가산, 산길, 석교, 정자가 있고; 수양버들, 연꽃, 용수, 봉황수가 있다. 호숫물이 빛나고 물을 졸졸 흐른다. 버드나무는 하늘거리고, 연꽃은 향을 품어낸다. 그리고 잠자리가 꽃을 찾아 날아오고, 백로가 물고기를 잡는다. 나르는 새는 가볍게 호숫물에 물결을 일으킨다. 달밝은 밤이면, 북경청화대학을 가본 사람이라면, "수목청화"앞의 그 연못을 기억할 것이다. 주자청 선생의 <<하당월색>>이 탄생한 곳 말이다.

 

유일하게 확연히 다른 점이라면, 대만국립청화대학의 건축에는 북경청화대학의 옛날 건축과도 같은 고박창상의 분위기가 없다는 것이다. 반세기와 한세기라는 역사의 무게의 차이이다.

 

모든 이것들이 소리없이 말해주는 것은 같은 뿌리를 지닌 두개의 청화대학의 교육이념과 정신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문화전승과 역사사명을 다 함께 두 어깨에 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만에는 이외에도 괜찮은 대학에 몇 곳이 더 있다. 모두 서로 다른 풍정을 지니고 있고, 모두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만과 중화문명의 전승과 진흥에 탁월한 공헌을 하고, 뛰어난 각종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화역사는 더욱 다채롭고 아름다운 것이다.

 

당시 대만에서 랭킹을 발표할 때 논쟁이 일었다. 가장 큰 촛점은 대만섬내에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정치대학(政治大學)이 랭킹48위에 머물렀다. 정치대학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비교평가는 상학, 정법, 미디어등 인문학과가 뛰어난 정치대학에는 아주 불공평하다. 비교평가시에는 당연히 단과대학별로 비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상학원, 문학원등으로.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의 연구논문은 상당한 부분이 중문으로 쓰여있다. 그리고 이번 비교평가에서 채용한 3개의 데이터베이스는 영문논문집이므로, 전면적으로 한 대학의 학술성과를 나타내는 것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대만의 대학을 한번 돌아보고, 그들의 역사를 생각해보고, 그들이 품고 있는 기질을 느껴보는 것이 이 아름다운 섬을 진정으로 돌아보고 느낀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