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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해방전의 북경5대대학

by 중은우시 2007. 12. 26.

글: 노북경문화원

 

일찌기 이런 노래가 있었다.

 

북대로(北大老)

사대궁(師大窮)

연경청화호통융(燕京淸華好通融)

보인시좌화상묘(輔仁是座和尙廟)

육근불정막보명(六根不淨莫報名)

 

북경대학은 늙었고,

사범대학은 가난하고

연경, 청화는 잘 통한다.

보인대학은 절간이니

육근이 청정하지 않으면 원서를 내지 말라.

 

이 말은 해방전에 북경의 대학에 대하여 자주 들을 수 있던 노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노래는 당시 여학생들이 결혼상대방을 구하는 기준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북경대학생들은 나이가 많고, 사범대학생들은 가난하고, 보인대학은 절간의 중같아서 상대로 적합하지 않고, 그저 연경대학과 청화대학생들이 통할만하다는 것이었다. 보기에,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러한 기준에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듯하다. 사실 이 노래가 단순히 결혼상대방을 선택하는 기준이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유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짧은 몇 개의 구절 속에 오개 대학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북대로"를 얘기해보면, 북경대학은 확실히 늙었다. 북경대학의 역사는 청나라의 역학관(譯學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전국대학중에서 가장 오래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북경대학에 가보면, 나이가 다른 대학교 학생들보다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북경대학이 엄격한 출석체크를 하지 아니함에 따라, 누구든지 가서 청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강생들은 이미 사회에 나간지 여러해가 된 경우가 많았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서 정식학생과 청강생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신이 <<망각을 위한 기념>>이라는 글에서 언급한 유석(柔石)이나 나중에 <<세계일보>>를 창간하여 유명한 성사아(成舍我)나 모두 이러한 청강생출신이다.

 

"사대궁"을 얘기해보면, 사범대학생들은 확실히 가난했다. 집에 먹을 거리가 조금만 있으면 서당훈장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교사라는 직은 가난이라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모양이다. 예로부터 교사를 하면서 부자인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사범대학은 바로 이런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다. 가난한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거기에 사범대학은 학생들로부터 돈을 전혀 받지 않아서, 가난한 학생들이 입학해서 다닐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그 당시 북경사범대학의 학생들 중에는 사립중학에서 시간제로 가르치면서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생은 많고 중학은 적다보니 중학에서는 가격을 아주 낮게 후려쳤다. 1시간을 가르키면 2마오가량을 주었다. 일부 사범대학생들은 겨우 2마오를 위하여 중학에서 시간제로 가르치곤 하였으니, 사범대학이 가난하다는 인상은 더욱 깊어졌다.

 

"보인은 절간같다"는 점을 얘기해보자. 보인대학은 원래 천주교에서 세웠다. 그리고 남여구분이 있어, 남학생만 받아들이고, 여학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77사변이후에 비로소 학교밖에 별도의 여학생부를 만들기는 했다). 학교에 여학생이 없을 뿐아니라, 교직원에도 여자는 없었다. 정말 눈돌릴 곳도 없고, 수양을 하기 딱 좋은 곳이다. 그래서 "육근이 청정하지 않으면 원서를 내지 말라"는 말이 나왔다.

 

연경대학과 청화대학은 하나는 미국교회에서 돈을 내서 만든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되돌려준 경자배상금으로 만든 학교이다. 청화의 캠퍼스는 아름다울 뿐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모던한 수영장까지 있었다. 연경대학에는 아름다운 미명호가 있고, 호숫가에는 "정인로(情人路)"가 있다. 멀리 내다본다면 청화대학출신은 나중에 태평양을 넘어가서 해외유학할 희망이 있고, 연경대학도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협력관계였으므로, 직접 하버드로 건너갈 수 있어, 사람들마다 부러워하는 학교였다. 여학생들이 결혼대상자로 연경, 청화의 학생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