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노정교(瀘定橋): 300년간 무너지지 않은 다리

중은우시 2008. 12. 9. 23:49

 

 

 

글: 도구(刀口)

 

길을 떠났다. 이번에 목표는 노정교(瀘定橋)이다.

 

나는 석면(石棉)에서 노정으로 향했다. 도중에 100여킬로미터는 거의 절벽을 타고 갔다. 나는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도로를 따라 구비구비 북으로 갔다. 강의 서안은 대설산이 햇볕 속에서 산세는 변화했고, 운무의 사이로 설봉이 순간순간 나타났다. 발아래는 미친듯이 흐르는 대도하(大度河)가 푸른 돌맹이들에 부딛치고 있었으며, 강물소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햇살은 머리위로 쏟아져, 눈앞에서 마치 주렴과도 같았다. 사람은 마치 길다란 고산을 그린 화랑 속에 들어있는 것같다: 산봉우리, 강물, 전원, 푸른나무, 민가. 천백년이 지났지만, 암석을 깍아만든 구절양장의 좁은 길은 여전히 일년내내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주요한 통로였다. 비효통(費孝通) 선생은 일찌기 이 곳을 "장이대주랑(藏彛大走廊)"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것은 사천서부의 중요한 지리분계선이다: 대도하의 서쪽은 장이유목지역이고, 동쪽은 한족농경지역이다. 노정교는 바로 수백킬로미터의 산골에서 동서를 잇는 요충지이다.

 

노정교의 차가운 쇠줄을 손으로 만져보내, 가슴이 뛴다. 강희44년(1705년)에 착공하여 완공한 이래로, 이 철교는 이미 삼백여년의 풍우성상을 견뎌냈다. 삼백여년동안, 세계의 저명한 다리들, 공업혁명이래로 건조된 대철교와 강철콘크리트대교도 대부분 사라졌는데, 이 손으로 만든 철교는 여전히 대도하의 위에 튼튼하게 걸려 있다. 70여년전에, 중앙홍군의 "비탈노정교(飛奪瀘定橋)"의 장거는 국내외에 아주 유명하다.

 

설마, 이 다리는 백성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신이 보호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노정교가 쓰러지지 않은 비밀에 대하여 노정현에 50년간 거주한 "노지변(老支邊)"이 일찌기 깊이있게 조사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과학적이고 역사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이름은 왕영모(王永模)이다. 나이는 근 칠순이 되었고, 고원의 햇빛에 새카맣게 그을린 노인이다. 지금도 여전히 철교위를 튼튼한 다리로 날듯이 다닌다. "나는 1958년에 중경파현2중을 졸업했다. 그때 서장에 들어가자는 구호가 있었는데, 당시 노정은 천강변지(川康邊地)에 속했다. 나와 같은 지변(支邊)청년들중 노정에 온 사람이 40여면이다. 현재는 겨우 5명이 남았다." 1966년, 왕영모는 노정교와 직접 만난다. 지금까지 40년이 넘었다. 여러해동안, 그의 직위는 여러번 변동이 있었지만, 시종 다리를 떠나지 않았다. 노정교의 매번 크고 작은 유지보수가 있을 때마다 자금, 강재를 구하고 사람을 모아서 다리를 수선했다. 그리고 다리관리업무를 맡았다. 그는 항상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다리에 대하여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모든 데이타는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노정교가 삼백년간 무너지지 않은 비밀은 교신(橋身), 교대(橋臺), 교정(橋亭)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교신은 13줄의 철삭으로 구성되었고, 하나의 길이는 101.67미터이고, 무게는 약 1.5톤이다; 13줄의 철삭은 모두 12,164개의 구환(扣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중량은 21톤이다. 여기에 교대의 지룡장, 와룡장은 쇠로 만들었는데, 총중량이 40톤이다. 명실상부한 철교라고 할 수 있다."

 

300여년전에, 강희제는 왜 이 다리를 만들라고 어명을 내렸을까? 왕영모에 따르면 주요한 원인은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강희35년(1696년)부터, 청나라조정은 '타전로(打箭爐)에 시장을 열도록 허락하고, 변방인들이 시장에 와서 차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이후, 원래 황량했던 타전로(지금의 康定)은 점차 사천-서장의 변방무역중심도시로 성장한다. 사천,운남지역의 기름, 소금, 차, 쌀, 포목등이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 타전로까지 운송되고, 다시 티벳, 네팔 혹은 인도까지 운송되었다. 타전로로 가려면, 대도하가 천험의 장애였다. 이전에 상품들은 그저 등나무줄기를 꼬아만든 삭을 통해서 강을 건너 운송할 수밖에 없었다. 강희39년(1700년), 타전로를 수비하던 청나라장군 창측집열이 반란을 일으키고, 청나라조정은 병사를 보내어 진압한다. 여러날동안 혈전을 벌여서 반란군 5천을 죽여버리고, 창측집렬등 반란군의 장수의 머리를 벤다. 그리고 타전로에 병사를 주둔시킨다. 주둔군은 3천이었는데, 군량미의 운송이 큰 문제였다. 당시 사천순무는 상소를 올려, "노하의 삼도구는 높은 절벽이 마주하고 있어, 삭도를 만들어서 건너고 있는데, 아주 위험하다. 화림영에서 80리거리에 산지가 편평하여, 철삭교의 방식으로 다리를 만들면 오가는데 편리할 것이다"라고 한다. 강희제는 바로 승인한다: "짐은 그 뜻을 높이 산다. 요청한대로 하라." 강희44년(1705년)초, 철삭교의 건설을 착공하고, 다름해 4월초에 완공한다. 다리를 만들고 나자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대도하는 자고로 말수(沫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천서부의 민중은 제갈량을 존경하여, 계속하여 이 강을 제갈량이 남정할 때 건넌 노수(瀘水)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실 진정한 노수는 금사강 하류에 있는데, 일반백성들은 죽어라고 노수라고 우겼다. 그리하여 대도하의 속칭이 노하가 되었다. 강희제는 "노수"와 "평정"의 의미를 담아서, 친히 "노정교"라는 글을 써서 다리이름으로 삼게 한다. 그리고 편액에 '일통산하(一統山河)'라는 글을 써준다. 1913년에는 현의 이름을 다리이름을 따서 노정현으로 짓는다.

 

노정은 심산협곡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 지방에 철이 나지 않는데, 300여년전에 다리를 만들때 어떻게 1년이라는 기간안에 이렇게 큰 다리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나는 먼저 미국작가 솔즈베리의 잘못 하나를 지적하고 싶다." 왕영모의 말이다. "솔즈베리는 그의 <<장정 -- 사상유례없는 이야기>>에서 노정교는 노씨성의 엔지니어가 만든 것이라고 했고, 많은 곳에서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틀렸다. 나는 대량의 사료를 조사해보았고, 백명이상의 옛날 철공을 만나보았는데,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다리는 노동인민의 피와 땀의 결정이다. 대교에 사용된 철은 영경현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그곳의 탄화로 단조하여 형태를 만들었다; 다리를 만드는 민공은 노정 현지에서 뽑았다. 그중에는 냉적, 심촌의 두 토사(土司)가 가장 많이 힘을 보탰다. 철공의 기술자는 섬서 한중부의 금화장인인 마지상이다. 공사감독은 청나라군대의 화림영의 참장 두여곤과 수비 양군강이었다. 당시 공사감독은 아주 엄해서, 매 철환에는 반드시 기호를 남기게 하였다. 만일 잘못하면 가벼울 때 곤장 100대, 무거우면 목숨을 거뒀다."

 

이것이 바로 노정교가 300년간 무너지지 않은 비밀인가?

 

어쨌든, 현재 많은 강철콘크리트다리라고 하더라도 300년은 고사하고, 30년도 버티지 못한다. 예를 들어 기강채홍교는 만든지 3년만에 무너졌다. 이로 인하여, 무경과 백성 40여명이 사망하여 전국을 놀라게 했다. "삼백년전의 공사감독은 과연 현재의 교량감리보다 훨씬 잘했을까?"라고 내가 물어보았다. 왕영모는 크게 웃었다. 그는 단순히 공사감독에만 의지했다면, "10개의 노정교라도 다 무너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생철을 단조해서 만든 철환은 쉽게 녹이 슨다. 철환 하나가 갈라지면 전체 다리가 문제된다. 그리하여, 노정교의 유지보수는 삼백년동안 모두 옛날에 시킨 대로 진행했다, 3년에 한번씩 작은 유지보수(교판과 바닥을 철거교환)를 하고, 5년에 한번씩 큰 유지보수(철삭을 모두 걷어서 하나하나 조사하는 것)를 한다. "내가 노정에 온지 여러해동안 무수하게 크고 작은 유지보수를 했다. 13줄의 철삭을 강가에 풀어놓고 가장 경험있는 철공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쇠망치로 두드려보게 한다.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되면, 새 것으로 바꿔끼운다. 그리하여 최초의 철환은 기본적으로 모두 바꾸어 졌다. 현재 다리 서쪽에 아직 몇 개가 남아 있다. 그가 안내해서 다리 서쪽에 가보니 과연 몇 개의 인기(印記)가 있는 철환이 남아 있었다. 왕영모는 요현화라는 나이든 철공을 알고 있는데, 그의 집안은 청나라때부터 계속 철교를 유지보수해왔다고 한다. 요현화는 홍군의 비탈노정교도 보았다. 80여세로 사망한 후, 다리서쪽의 관제묘 아래에 묻혔다. 그는 평생 노정교가 평안한지를 보아왔고, 그의 아들 요선귀도 철공이 되었다. 이처럼 대대로 이어져 오는 철공들의 세심한 유지보수가 없었으면 이 다리는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비록 그렇게 했지만, 다리에는 계속 사건들이 일어났다. 왕영모는 아주 자세하게 조사했다: 청나라 건륭6년 4월(1741년 5월), 교삭이 대풍에 4줄이나 끊기게 된다. 나중에 관청에서 760냥의 은자를 내서 수리했다; 건륭51년 오월 초엿새(1786년 6월 1일)에 공알산 아래의 모서에서 진도 7.5의 지진이 발생한다. 마강령이 붕괴되고, 대도하는 구일밤낮 막혀버린다. 강물이 불어나서, 사람이 다리 위에서 발을 씻을 수 있었다. 10일후 막힌 곳이 터지면서 큰 물이 일어나 높이가 수십장까지 솟았다. 그리하여 양안에서 물구경하던 백여명의 민중을 덥쳐서 물에 휩쓸려 갔다; 1919년 6월, 다리가 강풍으로, 3줄이 끊어져서 강 속으로 떨어진다; 1935년 6월 6일, 홍9군단 공병연대에서 적군의 추격을 막기 위하여, 정치위원 하장공의 지휘하에 4줄의 바닥줄을 끊어버린다. 나중에 주은래로부터 상을 받는다, 다음해 5월에야 유문휘가 3만위안을 내서 수리한다; 1970년 6월 2일, 해방군 7848부대가 노정교를 참관하는데, 발걸음이 일치하여 공명현상을 일으켜, 7줄의 바닥줄이 끊겨버린다; 1975년 4월 6일, 주티벳부대의 퇴역병 80명이 노정교를 참관하는데, 바닥의 줄 3개가 끊긴다. "다행히 그 병사들의 손발이 민첩하여 끊긴 줄을 붙잡는 바람에 다리가 물에 휩쓸려 가지 않았다."

 

"구체적인 부분들은 아주 재미있다" 왕영모의 말이다. "당시 홍군 비탈노정교때, 다리는 막 큰 유지보수를 마친 때여서, 아주 튼튼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 다리 위로 공화국의 제1대 지도자, 인민군의 7명의 원수, 수십명의 대장, 상장과 기타 수백명의 장군이 지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노정교는 홍군의 운명을 구원해주었다." 왕영모는 일찌기 1980년대에 북경으로 가서 당시 다리쟁탈전을 지휘했던 양성무 장군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장군과 손을 꼭 잡은 후, 그에게 물었다. 만일 당시 홍군이 다리를 건너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겟는지. 장군은 큰 손을 흔들면서,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반드시 건너야 된다고 말했다. 다시 물었다. 만일 다리가 무너졌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떠했겠는지? 장군은 전혀 감추는 것이 없이 말했다. 그러면 장개석이 하라는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홍군은 신이 도왔다고 한다. 나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본다." 당시 비탈노정교의 22명의 용사는 대부분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현재 알고 있는 사람은 요대주, 왕해운, 유금산, 유재화와 이우림이다. "유재화는 해방후 천징경비구 부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사진은 내가 천진에서 찾아왔다" 왕영모는 1987년을 아직도 기억한다. 미국국가안전사무고문인 브레진스키가 노정교를 시찰한 후에 이렇게 한마디 했다: "중국은 용감하게 천개의 산 만개의 강을 넘은 사람들의 희생정신과 용기로 통일한 것이다"

 

"지금 노정교의 바닥에 깐 줄은 중경에서 단조한 것이다" 1975년, 국가문물국은 10만위안을 내서 노정교에 대하여 유지보수를 진행했다. 왕영모는 철환의 바닥이 쉽게 부러지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경의 공장으로 가서 가공을 부탁했다: 나는 선박공장과 철강공장을 갔는데, 모두 해결하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중경 대평의 길거리에 있는 철공소에 가서야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 쓴 것은 철합금의 신재료였다. 철환을 중경대학에 보내어 시험했는데, 매1환의 인장강도가 2,30톤에 달했다. 나는 중경에서 모두 6줄의 철삭을 가공했고, 모두 바닥에 깔았다. 이미 30여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튼튼하다. 정말 중경의 철공기술자들에게 감사한다."

 

그의 위탁을 받아 나는 중경으로 돌아온 후 대평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철공소는 이미 문을 닫았다. 공장의 부지에는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전화로 그 얘기를 해주자 저편에서 왕영모는 길게 탄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