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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조주교(趙州橋)의 건설자금은 누가 마련했는가?

by 중은우시 2008. 2. 28.

 

 

글: 장계합(張繼合)

 

"천하제일교(天下第一橋)"로 불리우는 국보급 건축물인 조주교(趙州橋)는 수나라 대업연간(大業, 605-618)에 건설되었으며, 유명한 기술자인 이춘(李春)의 걸작이다. 지금까지 천여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조주교는 10차례의 수재, 8차례의 전란, 여러차례의 지진을 견뎠다. 그중 1966년의 형태대지진(진도7)때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조주에서도 진도4이상의 영향이 있었지만, 이 오래된 조주교는 끄덕없었다. 유명한 교량전문가인 모이승(茅以升)은 "다리의 내부구조는 따질 것도 없다. 천년이상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 오래된 다리는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조주교의 건설자금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적다. 마치, 이렇게 거대한 공사라면 당연히 조정에서 돈을 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주는 진나라이전에는 나라(國)였고, 양한(서한,동한)시대에는 군(郡)이었다. 역사적으로 "병가필쟁, 상고운집(兵家必爭, 商賈雲集, 군대가 반드시 차지하려고 싸우고, 상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곳)"의 장소였다. 조주의 이러한 풍성함은 그저 운에 따른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이 고진(古鎭)의 영광은 현지인들이 동전 하나, 하나를 출연하여 이룬 것이다. 현지인들이 주머니를 과감히 열어서 돈을 내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장교와파(長橋臥波), 동사범음(東寺梵音)의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릴레이처럼 지어진 거대한 규모의 전석(塼石) 건축군은 그 어느 조정에서도 돈을 부담하지 않았고, 군자의 풍모를 지닌 조주의 사람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만든 것이다.

 

이 마을에는 이런 우스개가 전해진다. 조주사람들은 아주 집을 그리워하는데, 예를 들어 군에 징집되었을 때, 후투어허(마을의 큰 강)를 벗어나기만 하면 탈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여서도 아니고, 처자식이 있는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조주는 비옥한 토지이다. 젓가락만 꽂아도 벼가 열린다는 곳이다. 일반 백성들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주 풍족하게 살 수 있는데, 어찌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가고싶어 하겠는가.

 

조주 사람들은 즐길줄도 안다. 그리고 전혀 인색하지도 않다. 도시의 남쪽 5리에 있는 안제교(安濟橋), 도시의 동쪽에 있는 백림사(柏林寺)에 놓여 있는 다듬은 벽돌 하나, 조각된 난간하나는 모두 조주에 살던 사람들의 넉넉한 개성을 보여준다. 이들 중에는 부유한 상인도 없었고, 고관대작도 없었다. 비록 평극이씨(平棘李氏)는 당나라때 13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역사상 이름있는 인물이나 명사들도 적지 않지만, 누가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자선사업을 하고자 하겠는가? 조주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자기의 허리띠를 풀어서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했다. 조주사람들은 글을 숭상했고, 돈후한 촌민들과 수박한 시정민심은 이렇게 넉넉한 인심이 있는 곳이었다. 국보급의 조주교를 짓는데 드는 모든 돈은 현지인들이 한푼 두푼 모아서 조달했다. 조정과 관청은 전혀 돈을 내지 않았다. 이처럼 거대한 공사를 한다면, 현대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현지에서 돈을 조달한다는 것은 너무나 쉽지 않은 일이고, 보기 드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33년, 건축학자인 양사성이 조주교를 조사하기 위하여 왔다. 그의 탐측기록은 복잡하고 방대한 전문적인 데이타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다리 아래를 도도히 흐르는 넓은 강, 돛을 높이 단 나뭇배도 빠트리지 않았다. 교하에서 서쪽으로 가면 태행산이고 동쪽으로 가면 부양이다. 일찌기 이춘이 안제교를 만들기 전에, 조운(漕運)은 일찌기 조주의 서남쪽을 지나갔다. 나뭇배에는 바다소금과 내륙의 산에서 나는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위문제는 꿀처럼 달고, 마름처럼 바삭바삭한 설화리(雪花梨)를 한번 보고는 바로 깨물어 먹었다. 그 이후 설화리는 천년간 조정에 올리는 진상품이 되었다. 교하의 수맥을 따라 진상품인 과일을 배에 실었다. 수나라 개황에서 대업연간에 규모가 방대한 조주교가 완공되었고, 이에 비로소 수륙인터체인지가 마련된 것이다. 당송부터 명청까지, 황제도 이 길을 가보고 싶어했다. "안제"라는 이 이름은 송철종의 북순때 친히 내린 이름이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조주교를 만든 건축장인 이춘의 신세내력이다. <<전당문(全唐文)>>에는 <<석교명서(石橋銘序)>>라는 글을 수록하고 있는데, 작자는 당나라때의 중서령 장가정(張嘉貞)이다. 명문에 따르면, "조군이 교하에 돌다리가 있는데, 수나라 장인 이춘의 것이다. 기이하게 만들어서 어떻게 만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외에는 수사, 신당서, 구당서, 문인필기를 불문하고 이춘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생각해보라. 다리를 만든 장인이 천추만대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고, 큰 공덕을 쌓더라도,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짧은 글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조주교의 건축가라는 칭호는 누구에게 부여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