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농민

농민공 귀향붐에 관한 생각

중은우시 2008. 12. 5. 15:35

글: 송석남(宋石男)

 

광동성 산터우(汕頭)에서 일하던 한 무리의 쓰촨(四川) 농민공들이 경제불황으로 직장을 잃고 나서, 얼마 전에 14대의 3륜오토바이에 천막을 친 차를 끌고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광동성, 광시성, 꾸이저우성, 충칭...의 약 3000킬로미터거리를 달려, 쓰촨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여자와 아이들은 차안에서 자고, 남자들은 길가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잠을 잤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는 수천위안이나 하는 삼륜오토바이가 아까워서이고, 둘째는 임차해서 살던 집안에 사놓았던 누추한 가구등이 아까워서이고, 셋째는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12월초, 이들 중에서 4대의 삼륜오토바이는 이미 충칭에 도착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도로상황, 교통사고등의 이유로 아직도 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삼륜오토바이를 버리고 기차를 타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도 있다. 그중 한 농민공에 따르면, 고향에 돌아온 후에 어떤 사람은 잠시 쉬고나서 바로 청두(成都), 란저우(蘭州)등지로 달려갔다고 한다. 거기에 가면 취업기회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텐트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금년 하반기이래로 전국에서 천만이 넘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농민공들 중에서 창해일속(滄海一粟)이다. 우리의 전문가들이 눈썹을 휘날리면서 '월스트리트에 가서 저가매수해야 한다'고 토론하거나, 다른 나라의 처지를 고소해하면서, '월스트리트의 엘리트들이 실업위기'를 겪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을 때, 경제불황으로 인하여 조성된 중국의 실업인구중에서 처음으로 거기에 휩쓸리는 것이 엘리트가 아니라 농민공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실업 혹은 취업난문제는 최근들어 매체가 보도하는 일이 잦다. 예를 들어, 광저우의 1500명의 석사들이 10개의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직위를 놓고 다투었다든지, 심천의 한 공원에는 매일 양복에 구두를 차려입은 화이트칼라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나는데, 이것은 가족들에게 직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든지, 상해의 여자 화이트칼라들은 서둘러 임신을 하는데,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기 위해서라든지....그러나 농민공이 실업하고 귀향하는 문제는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보다 훨씬 심각한 것일 것이다.

 

2008년, 중국농민공의 수량은 이미 2.1억명이 넘었다. 그들은 농민호구이지만, 토지를 떠나서, 비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조건은 통상적으로 아주 엉망이며, 사회보장도 최저수준이다. 그들은 도시에서 생활하지만, 시종 도시에 편입되지 못한다. 도시발전에 따른 사회복지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한 농민도 아니고, 진정한 노동자도 아니다. 그저 신분이 애매한 주변인일 뿐이다. 경제불황이 닥쳐오자, 이들 주변인들의 신분은 더욱 두드러진다. 심지어 위험해졌다. 도시에 남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농민공들은 일단 실업만 하면, '도시의 신빈민층'이 된다. 고향으로 돌아간 농민공은 농사짓는 것을 원치 않거나 혹은 아예 다시 농사지을 기회를 박탈당했거나하여 다시 '농촌유휴노동력'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도시신빈민층'과 '농촌유휴노동력'중에서도 20여세,30여세된 농민공들이 가장 난감한 처지이다. 그들은 '제2대농민공'으로 불린다. 대다수는 80년대말, 90년대초에 농민공인 부모를 따라 도시로 들어왔다. 그러나 양호한 교육은 거의 받지를 못했다. 90년대중반이후, '아들은 부친의 가업을 이어' 농민공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들의 몸에는 부친대에서는 결핍된 리스크를 감히 안으려는 용기가 있고, 부친대에서는 명확하지 않았던 도시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늘어만가는 농민공귀환열기중에서 그들의 선택은 더욱 어렵다. 전망이 더욱 불투명한 것이다. 잠재적인 비통과 분노는 더욱 큰 것이다.

 

그들이 한무리로 취급받아 억지로 고향에 돌아가게 하면, 아마도 사회불안정요소가 될 것이다. 부친대와는 달리, 그들은 차별대우, 불공정 그리고 생활고에 대하여 더욱 민감하다. 그리고 반항정신이 더욱 강하다. 십수년의 도시생활에서 젊은 그들은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더 넓은 세계를 보았다. 그릭 점차 신분을 의식하게 되었다. 얼마전에 필자는 <<꿈이 있으면 고통이 더욱 크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얘기한 것은 장자를 좋아하는 나련이라는 청년농민공이 하루는 돌연 무리를 떠나서 무하유지향에서 사라진다. 떠나기 전에, 그는 메모를 남긴다: "평생동안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고, 몸이 힘들게 일을 해도 어디로 갈지를 모르겠다. 가난을 면하기 어렵고, 일을 하고자 해도 되지를 않고, 사업을 할 수도 없고, 부모를 모실 수도 없다. 슬프지 아니한가?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하여 무슨 이득이 있을 것인가?"

 

나련이 채택한 반항방식은 소극적인 것이다. 그는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아마도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나머지 청년농민공은 아마도 더욱 격렬한 반항방식을 채택할지도 모른다.

 

구스타프 르봉(Gustave LeBon)은 이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립된 개인은 아주 잘안다. 혼자서 외로울 때, 그는 궁궐을 불태울 수도 없고, 상점을 강탈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쉽게 이런 유혹을 막아낼 수 있다. 다만, 군중의 한 구성원이 되면, 그는 사람수가 그들에게 힘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이는 그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고 강탈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즉시 이런 유혹에 굴복한다. 예상못했던 장애가 나타나면 미친듯이 파괴하게 된다."

 

귀향하는 농민공들이 자신들을 군중의 일원으로 자각하게 되면, 혹은 누군가 지도자가 나타나서 팔을 떨치고 일어나면, 여러 규모의 '농민공집단사건'이 지금의 중국대륙에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하물며 금년이래로 군중사건은 이미 적지 않게 발생했다. 옹안, 길수, 맹련에서 몇몇 도시의 택시파업까지, 사람수가 많은데서나 구성원이 복잡한데서나 모두 전대미문이다. 군중사건은 시범효과 혹은 연쇄반응이 있다. "네가 나에게 해주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해주겠다"는 말이나 사고가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사회의 중저계층에 양자(楊佳, 상해에서 공안에 대한 불만으로 파출소에 들어가서 공안들을 죽이고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가 절대 한 사람만은 아니다.

 

아마도 당국을 난감하게 하는 것은, 여러해동안, 자기정권의 합법성을 유지보호하기 위하여, '농민의거'를 정의로운 것으로 선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의거'를 진압하는 것은 영원한 반동통치계급의 행위라고 선전해왔다. 그렇다면, 귀향한 농민공들이 군중사건을 일으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성격규정하고 대응하여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