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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농민

농촌의 한 회계자살사건의 풍파

by 중은우시 2008. 11. 10.

글: 성학우(盛學友)

 

농촌에서 촌회계(村會計)는 중요한 인물이다. 촌회계를 맡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알고 있는 일도 많아지고, 어깨에 지는 책임도 갈수록 무거워진다.

 

20여년간 산동성 치박시 고신구 남석사구거민위원회("남석촌")의 회계를 맡았던 리공야오(李功躍)는 비극적으로 세상을 마감할 운명을 타고났나보다.

 

자살로 세상을 떠나다

 

2008년 6월 7일, 음력 오월 초나흘

 

아침 6시, 리공야오는 침대에서 일어난 후, 마누라 쑨꾸이롱(孫桂榮)에게 말했다: "촌민의 합작의료는 내가 어제밤에 정리해놨다. 탁자위에 놔뒀으니, 네가 촌에 가져다 주어라, 나는 나가서 돌아보겠다"

 

남편이 잠을 잔 방은 청소하다가, 쑨꾸이롱은 종이 한장을 발견하여 바로 시동생 리공진(李功進)에게 보여주었다. 리공진은 그 종이를 보고는 얼굴색이 변했다: "유서입니다. 빨리 사람을 찾아야 됩니다."

리공진은 형이 부친의 묘소에 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전화를 걸어서 우리에게 사람을 찾으라고 했어요." 리공야오의 사위인 우린(吳林)에 따르면, 묘소에 도착하니, 묘앞에 종이돈을 태우는 벽돌위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묘의 남쪽은 숲인데, 이 숲을 지나면 우물이 하나 있고, 깊이는 수십미터나 된다. 우물곁에 신발 두짝과 과도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우물입구로 가서보니, 우물 속에는 물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너무 늦었다. "사람은 이미 생기가 없었다." 우린은 두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다리를 아래로 하고 뛰어내렸다. 손목은 칼로 4번이나 그었다."

 

남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쑨꾸이롱은 혼절했고, 병원에 실려갔다.

 

"매부네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따스했어요" 리공야오의 처형인 남석촌의 촌민 쑨더이(孫德義)는 리공야오를 얘기하면서 눈물이 비오듯 흘렸다. 손안에 든 매부의 유서까지 젖을 지경이었다. 쑨더이에 따르면, 매부와 여동생은 아주 사이가 좋았고, 가정도 원만했다. "매부는 본분을 지키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금년 59세된 리공야오는 7년간 군에 가 있었고, 마을로 되돌아온 후에 당산대지진때 재난구조하러 간 적도 있었으며, 1975년에는 쑨꾸이롱과 결혼하였고, 결혼후에는 1남1녀를 낳았다.

 

쑨더이의 숙부뻘이 되는 둘째숙부 쑨윈샤오(孫雲孝)는 여러해동안 촌지부서기를 했다. "그가 발탁해서, 리공야오는 70년대부터 소대대에서 회계를 했고, 나중에는 대대에서 회계를 했다"

 

형제간에 분쟁도 리공야오가 아주 잘 처리했다. 그는 아주 공정했으며, 촌민들과도 잘 지냈다: "얼굴을 붉히는 적이 없었다"

 

리공야오의 딸은 2008년 8월 16일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루는 쑨더이부부가 리공야오의 집으로 갔다. 가보니 아직도 나무로 된 옛날 쇼파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새 것으로 바꾸라고 권했다: "딸도 곧 결혼하는데, 체면도 생각해야 할 것아니냐고 하니, 그제서야 새 쇼파로 바꾸었다."

 

5월 24일, 쑨더이의 부친이 생일을 지냈는데, 점심때 모두 함께 술을 마셨다. "우리는 함게 식당으로 갔다." 쑨더이가 보기에 리공야오는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리공야오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딸이 결혼할 때, 고향사람들의 돈을 받지 않겠다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예물을 되갚을 방법이 없을 것같다고 했습니다" 쑨더이의 처인 차오리윈(曹立雲)은 말했다: "그는 성격이 좋고, 아주 잘 웃었어요. 그날은 아주 기뻐했는데, 생각도 못하게 그만..." 차오리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고 곡성을 냈다.

 

5월말의 어느 날, 리공야오는 우린의 집으로 가서 신방을 보았다.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 "6월 5일, 6일, 장인어른은 석교판사처에서 이틀간 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린의 말이다. "장인 장모는 이전에 한방에서 잤는데, 6일저녁에는 그가 장모를 안방으로 가서 자라고 하고, 자신은 밤새 합작의료를 정리했고, 다음 날, 장모가 유서를 발견한 것입니다."

리공야오의 유서는 "치박고신구석교가도판사처"라는 레터헤드에 이렇게 적었다:

 

임무가 너무 중하고, 압력이 너무 커서, 견딜 수가 없다.

잠도 잘 못자고, 먹지도 못한다.

나는 너무 멀리 왔다. 내세에 다시 보자

이씨의 전체 형제자매들은 이해해달라

부인과 아이들은 몸조심하고, 잘 살아가라.

너무나 가난해서, 유산을 남기지도 못했다. 가난하다고 나를 욕하지는 말라.

일생동안 청빈하게 살아서 위로는 당과 인민에 책임졌지만, 아래로 너희들에게는 미안하다.

나는 집체이익을 위하여 일생을 분투했고, 아무런 후회도 없다.

절필. 이. 2008. 6. 6

 

우린은 장인의 죽음이 "촌의 선거 및 토지와 관련이 있고, 그로 하여금 증명서를 쓰게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리공야오가 죽은 후, "마을에서는 말들이 많았는데, 모두 그 이틀간의 회의와 관련있다고 하였다."

 

뇌물선거풍파

 

경제가 정체되고, 촌민의 원망이 커져가던 "비상시국'인 2000년 12월, 1960년생인 왕장화(王江華)가 부임하여, 6년간 남석촌은 여러가지 일을 벌인다, "촌민들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희망을 보았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1965년에 출생한 왕리핑(王立平)이 왕장화에 의하여 유민집단(裕民集團)의 총경리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면직된다. 나중에 도급비문제로 그들은 철저히 원수지간이 된다. 왕리핑은 개인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왕장화와 왕리핑은 사촌형제간이었다. 할머니가 같았다. 옛날에는 좋은 형제간이엇는데, 제9기 촌민위원회 선거때, '너죽고 나살기'식의 적수가 되었다.

 

선거의 경선자는 양대진영으로 나뉘는데, 한쪽은 왕장화의 그룹인데, 리공야오, 왕커청(王克誠)이 있고, 다른 한쪽은 왕리핑의 그룹으로 왕용췐(王永泉), 천타오(陳濤)가 있다.

 

11월 2일, 석교가도판사처의 감독하에, 9명의 촌민이 선거위원회위원에 당선된다. 그리고 촌위원회의 직위는 3자리였다.

 

11월 23일의 예선에서, 왕장화, 리공야오, 왕리핑, 천타오가 후보자가 된다. "누군가가 선거질서를 교란시켜, 많은 표가 무효가 되었지만, 왕장화는 그래도 왕리핑보다 88표나 많이 얻는다"

 

남석촌은 12월 15일을 정식선거일로 결정했다. 선거는 가장 관건적은 때가 도래했다.

 

이번 선거에서 촌민 짱전하이(가명)는 왕리핑을 위하여 선거운동을 했는데, 제1차선거전날밤에, "나는 왕리핑의 회사에서 나에게 주는 2000위안을 받았다"; 제2차선거때, "나는 역시 왕리핑의 선거운동을 책임졌고, 돈을 돌렸다", 선거전날밤에 왕리핑은 회의를 열어서, 짱전하이는 "우리는 그(왕리핑)을 뽑아야 한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새벽 5시반에 2인 1조로 나가서 돈을 뿌려라. 1인당 1천위안, 1천위안에 편지 하나이다. 나는 제1차때 돈을 뿌렸던 몇 집을 책임지겠다"; 제3차선거전날(12월 14일), 짱전하이는 중간파의 일부 촌민을 회사로 집합시켜, 3대의 버스를 타고 주촌의 금도빈관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개략 2백명이었다. 식사를 할 때, 왕용췐은 마지막 선거에서 반드시 왕리핑을 주임으로 뽑아야 한다고 하고, 다음날 아침에 모든 사람들에게 1천위안씩을 돌렸다.

 

북경시 구시공증처는 짱전하이등 9명의 촌민의 증언에 대하여 증거보전을 했고, 공증서를 만들었다.

 

2007년 12월 15일, 왕리핑은 촌위원회 주임에 당선되었다. "왕리핑이 얻은 주임표수는 왕장화보다 16표가 많았다. 다만 총표수로 보면 왕장화보다 24표가 적었다."

 

왕장화 그룹은 이미 연속 2기 당선되었고, 그중 왕장화는 당지부서기, 촌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리공야오는 당지부 부서기, 촌위원회 위원, 회계를 맡았다. 왕커청은 당지부 위원, 촌위원회 위원, 기초건설주관을 했다.

 

"선거과정에서, 리공야오는 입장이 곤란해서 며칠간 숨어있었다" 쑨더이의 말이다. 리공야오와 왕장화는 촌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왕리핑이 주임으로 선임된 후, 리공야오에게 출근하라고 요구했고, 왕장화는 계속 왕리핑에게 그를 달라고 요구했다" 중간에 낀 리공야오는 아주 곤란한 입장이었다.

 

9월 1일, 석교가도판사처의 당정판주임 두전장(杜振江)에 따르면, 왕장화와 왕리핑은 모두 선거에 뇌물문제가 출현해서는 안된다고 약속했다. 선거가 끝난 후, 1장당 천위안씩 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석촌의 선거주민은 2700여명인데, 1장당 1천위안으로 계산하면, 수백만위안이라는 얘끼가 된다" 조사를 해보니, 어느 주민도 자신이 어느 한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한측이 뇌물을 주었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결론이 났지만, 인터넷에서는 소문이 무성했다. 어떤 네티즌은 <<문천지진재해구조, 치박1500만뇌물선거 촌관리당선>>이라는 글을 써붙였다. 두 형제의 싸움으로 남석촌은 혼란에 빠졌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기업이 완전히 무너져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번 자세히 분석해보자. 나쁜 것은 이 두 패가후손이 아니다. 전체 남석촌민이다. 약간의 돈때문에 영혼을 팔아먹은 것이다. 왜 양심에 따라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여 봉사할 좋은 간부를 뽑지 않는가? 만일 남석촌이 정말 그랬다면 모든 남석촌민은 천고의 죄인이 된다. 지금 남석촌민은 적군과 아군의 양파로 나뉘었고, 친척의 정도 금전의 위력앞에는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토지싸움

 

선거과정에서, "왕리핑이 집체토지를 불법점거하고 매각했다"는 고발장이 중앙, 성, 시등 관련부서에 들어갔다.

 

고발장에서는 2000년 9월, 왕시궈(王錫國)이 촌지부서기를 맡은 기간에, 정대부동산회사의 법정대표인 왕리핑은 양우장을 만든다는 구실로, 1무당 2.1만위안의 가격으로 대장북의 134.8무 토지를 매입했다. 다만 계약체결시, 102.9무토지로 바뀐다. 소위 양우장은 전혀 세워지지 않았다. 2001년, 왕리핑은 이 토지를 인근촌의 치박장원집단에 매각하는데 1천여만위안을 받았다. 이들 토지의 양식용도는 바뀌지 않았다. 전촌의 당원들은 자발적으로 당원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회의에 참석한 114명의 당원중에서 110명이 서명했고, 나머지 1799명의 군중은 "강력하게 상급정부에 정의를 세워달라. 법에 따라 집체토지와 재산을 회수하라"고 서명했다.

 

관련부서는 실제측량을 통하여, 이 토지는 134.8무라고 결정하였다. 한 소식통은 적지 않은 촌민도 측량에 참가했다고 한다.

 

국토부서는 정대부동산회사가 징용한 102.9무의 토지중 86.76무의 국유토지는 관련절차를 밟았고, 나머지 16.14무토지는 장원집단이 불법점유하고 있다. 장원집단이 실제 점유하는 총면적은 122.74무이다. 그중 19.84무는 초과점유이다. 그러므로 불법점유토지는 35.98무이다.

 

2008년 1월 24일, 치박시 국토국은 장원집단에 대하여 처벌결정을 내린다: 불법점유경지를 반환하고, 불법점유토지위에 새로 지은 건축물과 기타 시설물을 몰수하며, 벌금 23.987만위안을 납부하라.

 

군중들이 말하는 "왕리핑이 석대로동쪽 4.09무의 주택 35호, 석대로 서쪽 11.58무의 90채등 토지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관련부서는 "3월말까지 구체적인 조사결과를 내놓겠다"고 표시했다. 9월 1일, 일부 촌민은 아직도 조사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고신구 국토국 서천빈 과장은 왕리핑의 다른 토지문제는 모두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다고 말한다.

 

쑨더이에 따르면, 2008년 구정을 전후하여, 그와 처는 리공야오에게 "토지매각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물었다.리공야오는 "절대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소개했다: 2000년 9월의 어느 날, 촌지부서기, 주임인 왕시궈는 부서기인 장광쉰, 회계인 리공야오와 함께 토지를 측량하러 갔다. 3사람은 촌위원회에서 출발하여, 중간쯤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리공야오에게 전화했고, 일이 있어서 그를 만나야 한다고 해서, 리공야오는 중간에 되돌아왔다. 기자가 본 토지징용협의에는 리공야오의 서명이 없었다.

 

토지측량후의 상황에 대하여 리공야오는 뭐라고 말한 바 없다고 말한다. "6월 5일, 6일 판사처 이틀간의 회의를 개최한 후, 6월 7일 새벽에 자살했다"

 

자살이후

 

리공야오가 자살한 후, 남석촌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들 이야기는 절대로 그가 발생할 것을 희망했던 것이 아니다.

 

2008년 1월 31일, 촌민 취슈쩐(崔秀貞)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후, "24시간을 넘기지 않고 석방되었다"; 3월 19일에는 공안기관이 그녀에게 소환장을 보냈도, "다음날 나는 도망쳐서 10여일을 숨어 있었다"; 7월 6일, "갇혔다"

 

취슈쩐의 말에 따르면, 7월 4일 저녁, 관리위원회의 다섯 명이 그녀의 집으로 와서 일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은 왕리핑의 토지문제 처리의견을 가지고 와서, "토지면적을 122무가량으로 축소한 것을 발견했다"는 취슈전은 아주 고민되었다: "2007년 11월말, 12월초 실제측량은 134.8무인데, 어떻게 다시 10여무가 줄어들었는가?"

 

7월 5일, 상부기관을 방문하려는 취슈쩐이 막 촌위원회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다" 이번에 그녀는 15일간 구류되었다.

 

"1월 31일, 9명의 촌민이 붙잡혔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81세이고 24시간이 되기 전에 풀어주었다; 4월 9일, 다시 9명을 붙잡았는데 3명은 행정구류를 받았다. 그중 2명이 부녀이다; 6월에 6명이 체포되었다; 7월, 16명이 체포되었다." 촌민들은 인터뷰때, "백색공포"라는 말로 촌민들이 체포될 때의 정경을 묘사한다. "수십명이 소환되고 붙잡혀온 이십여명중에서 십여명이 체포된다; 왕장화와 처자등 일가 3명, 이윈밍의 부부, 왕커청의 부부, 체포된 후 보석이되거나 구속되었다; 왕리쉐이의 부부는 행정구류를 당했다."

 

6월 10일, 취슈전등은 치박시를 찾아갔다.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도면을 내놓았는데, "보여주는 토지면적은 실제측량한 것보다 아주 적었다" 취슈전은 "위에 리공야오등 3명의 서명을 보았다"고 하였다. 취슈전은 바로 소리쳤다: "이 도면은 우리가 인정할 수 없다. 리공야오는 이미 죽은지 이틀이나 지났다." 석교가도판사처 당정판공실 주임 두쩐장은 기자인터뷰에서 "리공야오는 도면에 서명한 바 있다. 그는 아주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리공야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왕장화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어떻게 자살하느냐고 말했다" 왕장화의 친구에 따르면, "왕장화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바깥에 피해 있었다"고 한다.

 

6월 17일, 왕장화는 북경에서 치박시로 되돌아와서 한 호텔에 머문다. 6월 20일 21시경, 왕장화는 호텔에서 경찰에 붙잡힌다.

 

왕장화의 친척은 나중에야 알았다. 왕장화의 협의는 취중교란사회질서죄, 세금포탈죄, 직무침점죄, 자금횡령죄라는 것을.

 

왕장화의 아들인 왕진타오(王錦濤)에 따르면, "2008년 4월, 개발구 공안분국의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유민내화재료의 20%지분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세금포탈로 구속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하여, 왕장화와 왕리핑은 주식양도계약을 체결한다."계약에서 명확히 왕장화의 개인소득세는 왕리핑이 부담한다고 적었다. 판사처의 한 간부도 중간인으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왕장화는 양도비에서 일부를 가지고 채무를 변제했다. 나머지340만위안을 농촌신용사에 예금했고, 구좌개설때는 처제의 딸인 치박직업학교 학생인 21세된 주청청(朱程程)의 이름을 사용했다.

 

7월 22일, 왕장화의 아들인 왕진타오, 처인 장렌윈(張連雲)은 각각 비호죄, 취중교란사회질서죄로 체포된다. 8월 15일, 8월 18일, 구속할 증거는 부족하다는 이유로 각각 보석으로 풀려난다.

 

왕진타오에 따르면, "경찰은 매일 나의 사촌여동생에게 구좌이체에 서명하라고 요구했고, 나에게는 은행카드를 내놓으라고 했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8월 28일, 주청청의 부친인 주동량(朱東亮)이 직무침점죄로 체포된다. 9월 4일, 구속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보석을 한다. "나의 이모부는 촌에서 일하는 농민이다"

 

8월 29일 오후, 왕진타오는 은행카드를 경찰에 건넨다. "경찰은 바로 나의 사촌여동생을 데리고 신용사로 가서 자금을 이체한다. 금액이 너무 커서 이체에 성공하지 못했다" 8월 30일 오전, "나의 사촌여동생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돈을 전부 고신구 공안분국의 구좌로 송금했다"

 

9월 1일, 왕진타오는 영수증을 받아온다. 일자는 8월 30일로 되어 있고, 금액은 3,391,816.80위안이었다. "왕장화가족이 지급한 배상손실금"이라고 되어 있었다.

 

현지 경찰은 기자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보상협의

 

6월 7일, 리공야오가 자살로 죽었고, 다음 날 오전, 우린과 리공진등은 판사처의 간부를 찾아가서 따졌다. "나의 장인은 촌에서 30여년을 일했는데, 한번도 압력이 크다고 한 적이 없다. 왜 이곳에서 이틀간 회의를 한 후에 임무가 중하고 압력이 크다고 하면서, 바로 자살하느냐?" 우린은 회의기록을 보았다. "우리를 접대한 사람은 회의록을 이미 공안국에 냈다고 한다. 회의내용은 합작의료문제였다"

 

6월 11일, 우린등은 개발구 공안국에 간다. "우리를 접대한 사람은 말했다. 자살한 사정은 많다. 대다수는 원인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우린은 사람이 아무 이유없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공안국이 반드시 이유를 말해주어야 한다"

 

장인이 자살한 후, 우린도 소문을 들었다: 하나의 버전은 바로 왕장화, 왕리핑이 리공야오를 핍박해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공야오가 아는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버전은 리공야오가 부정부패, 뇌물에 관련되어 죄가 크기 때문에 겁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왕장화, 왕리화가 우리 부친을 핍박하여 죽게 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직접 증거가 없다. 우리 아빠가 부패하고 뇌물받았다는 것에 대하여도 우리는 조사하는 게 겁나지 않는다." 우린은 관련부서에서 조사하여 장인의 결백함을 밝혀주기를 원한다.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6월 26일, 왕리핑은 촌위원회(갑방)를 대표하여 우린의 장모인 쑨꾸이롱(을방)과 보상협의서를 체결한다. 협의서의 내용은 갑방이 일시불로 을방의 장례보조금 1.2만위안, 사망보상금 12만위안, 생활곤란보조금 6.8만위안을 지급한다; 2008년 6월부터 갑방은 매월 을방에게 생활곤란보조금 500위안을 을방이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다; 본 협의를 체결한 후 을방은 이틀 내에 화장등 일체의 후사를 처리완료한다.

 

"20만위안은 이미 받았다" 우린이 기자에게 한 말이다. "다만 매월 500위안의 생활비는 아직 지급하지 않고 있다. 몇번 왕리핑을 찾아가고나서야 그가 주겠다고 약속했다."

 

7월 18일, 왕리핑은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전화한 첫번째 기자이다. 당신이 제기한 문제는 정부에서 답변할 것이다. 나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

 

9월 1일 오전, 기자는 남석촌을 취재하러 갔는데, "회의중"이라는 왕리핑은 점심때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점심때 다시 연락했을 때, 그의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자는 왕리핑을 만나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