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원전 650년, 그리스인은 도시국가를 건설한다. 도시국가의 지도자는 인민이 직접 뽑았다. 민주의 씨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맹아를 보였다. 이후 서양역사상 140여년간 지속된 참주정시대를 맞이한다. 그런데, 중국은 이때 다원적인 패주를 가진 전국시대로 진입한다. 역사는 항상 승자를 위하여 존재했다.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정치공리색채를 지니고, 전국시대의 각 제후국가의 출현을 모두 '중국'경내의 정통으로 하였다. 육반산 아래의 의거왕조는 비록 당시 여하한 제후국과도 맞설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중국'의 범위내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통제후국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정통왕조의 문신무장들이 황하유역 심지어 장강유역에서 정벌과 살육에 도취되어 있을 때, 강대한 그림자가 서북의 황토고원에서 일어섰다. 의거국왕은 주위의 소부락, 방국을 통일한 후, 확장의 칼끝을 이미 여러 제후국들 중에서 충분한 실력을 가진 진(秦)나라를 겨눈다. 쌍방의 시험적인 군사마찰이 220여년간 이어진다. 각자 이런 군사마찰과정에서 힘을 기른다. 이 220여년은 일대 또 일대의 의거국왕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배양하게 하는 기간이었다. 이런 자신감은 자신의 힘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을 유지하는 것은 나중에 북방의 각 소수민족들이 확장하는데 하나의 모범을 수립했다.
기원전627년, 진나라는 동으로 확장하려는 욕망이 진(晋)나라에 의하여 철저하게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방향을 서쪽으로 되돌린다. 마침 이때의 서융은 유여(由余)라는 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런데, 진나라는 그를 매수하여 서융의 지형과 군사실력을 파악한다. 게다가 진목공은 서융에 대하여 미인계를 쓴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기원전623년 병력을 일으켜, 천리의 땅을 늘이고, 서융을 쫓아낸다. 이것이 진나라의 그리고 전국시대 제후중의 첫번째 융의 땅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이었다.
기원전430년, 인류역사상 두 차례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1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끝나고 220년에 걸친 의거국과 진나라의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다. 서방역사에서는 펠로폰네소스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 중국의 사료에서는 그저, "의거국이 진나라를 공격했고, 군대가 위수에 이르렀다"는 정도의 몇 글자만 남겼다.
이 전투이후, 전국시대의 군웅으로 농업과 목축이 발달한 지역에 자리한 진나라는 할 수 없이 위하하류지역으로 이동한다. 다만, 이 전쟁은 시간도 오래 끌고, 규모도 컸고, 사상자도 많았다. 역사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전쟁은 그저 2400여년전의 꿈과도 같다. 의거국은 이때부터 88년간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진나라와 군사적인 대치를 이룬다. 이 시기에 진나라는 의거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기원전352년, 중국대지에는 여전히 전쟁이 빈발했다. 진나라는 위(魏)나라에 승리한 후, 의거국의 내부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기화로 의거국을 공격한다. 하, 상, 주, 춘추, 전국에 걸쳐 2000여년간 지속되었던 의거국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왕국의 휘황은 진나라군대의 치명적인 일격으로 빛을 잃는다.
6.
상앙변법을 통하여, 진나라는 국력을 끌어올리고 공고히 했다. 그리하여 서쪽으로 확장할 힘을 갖게 된다. 기원전331년, 의거국에는 다시 내란이 일어난다. 진나라가 병사를 의거국의 중심지역까지 치고 들어간다. 오씨융국(烏氏戎國, 지금의 감숙성 평량과 영하성 고원남부일대)은 진나라군대에 멸망당한다. 의거국의 중요성곽인 욱지(지금의 감숙성 경양일대)도 진나라군대에 점령당한다. 진나라군은 점령한 두 곳에 대하여 상앙이 진나라경내의 현, 향, 리의 행정제도를 실시한다. 각각 오씨현과 의거현을 둔다. 오씨현과 의거현의 출현은 진나라의 행정력이 영하성 경내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거융국은 비록 진나라에 신하를 칭했지만, 나라를 되세우겠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희망은 릴레이처럼 젊은 의거융왕에게 전해졌다. 기원전318년, 위, 조, 초, 연, 한의 5개국이 연맹을 결성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 진왕은 동쪽의 연합군과 싸우는데 전력을 다하기 위하여, 의거국에 대하여는 다독거리는 정책을 쓴다. 젊은 의거국왕에게 "비단 천필과 여자 백명"을 내린다. 단 의거국왕은 이 기회를 틈타 진나라를 공격한다. 진나라는 패배한다. 진나라가 오국연합군을 격퇴한 후, 즉시 기원전 314년 의거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의거국의 25개 성 전부를 점령한다. 이때부터 의거국을 회복시키겠다는 꿈은 철저히 사라진다.
기원전306년, 초, 제, 한의 삼국이 군사연맹을 맺어 공동으로 강대한 진나라에 대항하고자 한다. 진나라는 군사동맹의 드러난 역량과 의거국의 숨은 역량에 양쪽의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나라에게는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이때 진소양왕의 모친인 선태후는 중국역사상 보기 드문 베드신연기를 펼친다.
한창 나이의 선태후는 진왕에게 젊은 의거국왕을 인질로 함양성에 연금하게 하고, 그녀는 자신의 성숙한 미모를 가지고 젊은 의거국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태후와 매일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의거국왕의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을 버리게 하려 한다. 젊고 용감한 의거국왕도 이 젊은 선태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하여 선태후와 의거국왕의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은 각자의 국가이익앞에서는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기원전272년, 젊은 의거국왕은 오랫동안 칩거한 후 주도면밀한 복국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이것이 선태후에게 발각된다. 국가이익앞에서 선태후는 사랑을 버리고, 의거왕을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죽여버린다. 사랑하는 남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선태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도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에서 나오는 노랫가사가 가장 좋은 해석이 아닐까?: "활활 타는 불덩이는 나를 가두었다. 용암은 나의 혈맥속을 흐른다. 미약은 너를 노예로 만들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왕후?"
선태후는 이후 의거국에 병사를 보내어 철저히 궤멸시킨다. 감천궁의 화원은 금방 역사에 의하여 깨끗이 버려진다. 왕년의 번화를 잃었을 뿐아니라, 의거융족의 민족이 입은 상처의 기억도 흐려져갔다. 역사는 불에 탄 후의 재에서 나는 연기처럼 가볍고, 또한 돌맹이처럼 무겁다.
7.
2000년간 존속했던 서융은 세력이 가장 컸을 때 일찌기 연(燕)나라의 강역까지 침범했었다. 그들의 강토는 당시 여하한 제후국보다도 넓었다. 다만 당시의 '중국'의 시야내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후세의 사가들은 이들을 오랑캐땅의 작은 변방국가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정사에서 그들은 마땅이 얻어야할 자리를 얻지 못했다. 결국 의거국이 멸망하면서 그들은 역사의 커튼을 내렸다.
사실, 전체 춘추전국시대에 기원전722년부터 기원전637년까지의 88년동안, 융은 두 번에나 주나라를 토벌했고, 정(鄭), 초(楚), 제(齊)를 각각 한번씩 토벌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융을 세번이나 토벌했고, 노나라도 융을 한번 토벌했다. 이를 보면, 융은 전체 춘추전국시대에 활약이 대단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융의 활동범위는 북으로는 산서서북지역에서 남으로는 경수 위수까지 이르고 서로는 농서, 동으로는 하북, 산동서부지역에 이르렀다. 전체 강역은 북중국의 대부분의 지역을 커버한다. 당시 강역이 가장 넓고 세력이 가장 컸던 국가인 것이다.
서융에 대한 토벌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말살하게 된 것은 진나라가 전국통일의 패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진나라에게는 서북 최대의 군사적인 교란을 없앴고, 서쪽으로 발전할 여지를 얻게 된다. 이는 진나라가 동쪽으로 확장하는데 인력과 물자의 새로운 조달기지가 생긴 것이다. 점차 전쟁과정에서 성숙하게 된 진소양왕은 승리의 웃음과 북방민족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의거국의 영토로 들어섰다.
영하남부의 육반산 아래에 영하북부소수민족의 낯선 철기를 보고, 이 젊은 제왕은 놀랄만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장성을 쌓는 것이다. 나중에 이 위대한 사업은 그의 증손자인 진시황에 의하여 극치에 이른다.
지금 육반산의 북록을 꼬불꼬불하게 이은 그 진나라장성은 2000여년의 풍상을 거쳐 이미 형태가 모호해졌지만, 이런 모호함은 마치 <<사기. 흉노열전>>에 기록된 글과 같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에 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았다" 이 문자는 명확하게 우리에게 진나라가 장성을 쌓은 배경과 시간을 말해준다. 더더구나 이 황토를 쌓기 시작하면서 점차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은 의거국만이 아니라, 중국의 반신사와 신사를 거쳐 이천년간 종횡하던 서융이었다.
이후, 영하북부 혹은 더욱 넓은 대초원의 소수민족은 이후에 건립된 진, 한에 의하여 "호(胡)"라고 불리게 된다.
'중국과 사회 > 중국의 민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비족(鮮卑族):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0) | 2009.07.22 |
---|---|
강족(羌族): 유일하게 소멸되지 않은 고대소수민족 (0) | 2009.07.20 |
융(戎): 잊혀진 부족의 2천년 역사 (I) (0) | 2008.11.27 |
거란족은 왜 사라졌을까? (0) | 2008.06.05 |
유연(柔然) : 신비하게 사라진 북방왕국 (0) | 2008.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