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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거란족은 왜 사라졌을까?

by 중은우시 2008. 6. 5.

 

 

발췌: 역사밀마(歷史密碼) II

 

중국민족은 중국대륙에서 여러 민족이 수천년간 융합하여 형성되었다. 이 수천년의 파란만장한 역사중에서 일찌기 한 민족이 흥기하였다가 신비하게 사라졌다. 바로 거란족(契丹族)이다. 거란의 원래 뜻은 "빈철(?鐵)" 즉, 견고하다는 의미이다. 이들 용감하고 호전적인 민족은 200여년동안 장성내외를 넘나들며 황하의 물로 말을 먹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처럼 일세를 풍미했던 민족이 명나라이후 집단적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1922년, 벨기에의 한 전도사가 중국 내몽고에서 도굴로 텅 빈 900여년전의 거란고묘에서 아주 기괴한 석비를 발견하는데, 문자부호와 비슷한 괴상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에 이들 문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문자가 공개된 후 일시간에 여러가지 설이 난무했고, 각자의 의견이 달랐다. 이들 부호가 거란문자일까?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인들은 요(遼)를 건립한 후 확실히 거란문자를 창제했다. 그러나, 거란문자는 일찌기 700년전에 실전되어, 후세인들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고고학자와 고문자학자는 고증을 거쳐, 이 비문이 바로 일찌기 사라진 거란문자라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결론이 나오자, 사라진 민족인 거란민족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거란의 기원에 대하여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진다: 한 남자가 백마(白馬, 백마는 흰말)를 타고 황하(湟河, 지금의 시라무룬강)를 건너왔고, 한 여자가 청우(靑牛, 청우는 검은 소)를 타고 상하(上河, 지금의 라오하강)를 건너왔다. 두 사람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여덟명의 아들을 낳는다. 나중에 그들의 여덟아들은 각각 번성하여 여덟 부락이 되고, 점차 발전하여 거란이 된다. 이것은 신화전설이다. 그러나, <<위서>>의 기록에 의하면 1400여년전에 거란은 중국북방에 이미 출현한다. 그들은 전투력이 강하고 용감했다. 부락수령인 야율아보기가 거란 각부를 통일하고, 916년에 거란국을 세운다. 947년에는 요로 국호를 바꾼다. 요나라는 가장 강성했을 때는 중국북부를 모두 장악했다. 강역은 북으로 외흥안령, 바이칼호까지, 동으로는 사할린섬까지, 서로는 알타이산까지, 남으로는 하북과 산서북부까지 미쳤다. 거란왕조는 중국에서 200여년간 존속하였으며, 송나라와 남북대치의 국면을 형성했다. 거의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할 뻔했다. 중국에서 유명한 <<양가장>>은 바로 1000여년전에 송나라군대가 양가장의 통솔하에 거란군대와 격전을 벌인 이야기이다. 이 기간동안 중원지구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비단길을 막혀 있었고, 많은 서방국가들은 전체 중국이 거란의 통치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거란은 전중국을 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서방에 동방을 소개할 때, 중국을 거란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도 슬라브어국가에서는 여전히 중국을 거란이라 칭한다.

 

거란민족은 강대한 군사대국을 만들었을 뿐아니라, 찬란한 문화도 창조했다. 지금까지 황하이북에서 보존된 절과 탑은 웅장하고, 천년의 비바람에도 끄덕없이 견디고 있다. 특히 산서성 응현의 석가탑은 현재 전세계에서 보존된 가장 오래된 목조구조의 탑건물이다. 여러차례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처럼 훌륭한 문화를 창조한 민족이라면 분명히 상당한 경제적인 기반과 괜찮은 공사기술역량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거란왕조가 여러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족인재를 많이 흡수한 것 이외에 송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선진적인 생산기술도 취득했다. 거란민족은 확실히 중국북방에서 번화한 한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처럼 강대한 민족이 왜 그렇게 빨리 사라지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거란민족의 쇠망은 거란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시작한다. 거란왕조의 멸망은 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요나라와 북송이 160여년간 대치하는데, 최종적으로 요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일찌기 거란에 복속했던 여진인들이었다. 완안 아구타가 이끄는 여진부락은 요나라의 강역내에서 성과 땅을 빼앗았다. 그리고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한때를 풍미했던 거란왕조를 대체한다. 망국의 일부 거란인들은 황족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중국신강과 중앙아시아에 서요(西遼, "카라 키타이")를 세운다. 이 제국도 한 때 흥성했지만, 결국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에 멸망당한다. 거란의 잔여세력은 다시 서쪽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이란나무에 키르만왕조를 세운다. 그러나, 이미 이슬람화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거란은 민족으로서 왜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거란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실종된 민족을 찾는 것은 역사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요사>>의 기록에 따르면,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최소한 2계통의 거란인들은 중국에 남았다. 일부분은 거란의 마지막 황제를 따르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일부분은 요나라의 남부에 거주하던 거란인들이다.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 살던 거란족들도 있다. 황하유역에서 계속 출토되는 문물을 보면 거란인들은 여진인들에게 항복을 하고, 일부는 원래 거란의 발상지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북방의 다른 민족과 섞여버렸다. 사실상, 금나라통치기간동안 거란인들은 계속 반란을 일으킨다. 몽골족이 흥기하자, 거란인들은 속속 몽골에 귀의하여, 징기스칸의 힘을 빌어 거란민족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원나라초기까지는 거란인들의 세력이 여전히 강성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수백만 거란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사학계에서는 대체로 3가지로 추정한다. 첫째 가능성은 거란의 발원지에 거주하던 거란인들이 점차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잃고, 다른 민족에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가능성은 대부분의 막북 거란인들이 서쪽의 이른 키르만지역으로 가서 완전히 이슬람화되어, 다른 민족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가능성은 금나라와 몽골의 전쟁이 일어나자, 일부 거란인들은 몽골에 귀부하여 몽골군대를 따라 정복전쟁에 참가해서 전국각지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몇 가지 가능성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거란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이미 다른 민족에 융합되었고,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당연히 몇 가지 버전은 거란민족이 아직 다른 민족에 융합되지 않고, 여진히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대흥안령, 넌강과 후룬베이얼초원이 만나는 곳에 살고 있는 다오르족이 바로 거란족의 후예라는 설이다. 다오르의 뜻은 '원래의 지방'이라는 것인데, 바로 고향이라는 뜻이다. 수백년동안 다오르인들은 이 곳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고향이라고 부르는가. 다오르인들은 자기들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 문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말로 전해지는 역사밖에는 없고, 청나라이전의 일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다. 학자들은 거란족과 다오르족간에 생산, 생활, 습속, 종교, 언어, 역사등의 측면에서 비교연구를 하여, 다오르는 거란의 전통을 가장 많이 승계한 민족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간접적인 증거이다. 정설이 되려면 아직도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또 하나는 거란부락은 마지막으로 운남지역에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운남성 시전현에는 여전히 자기 조상의 묘에 거란문자를 사용하는 특수한 종족이 있다는 것인데, 이들은 스스로를 "본인(本人)"이라고 한다. 시전현 유왕향의 한 사당에는 위에 "야율(耶律)"이라는 글이 새겨진 편액이 있다. "본인"들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의 선조 아소루(阿蘇魯)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거란의 후예라는 신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역사상으로 확실히 기록이 있다. 아소루는 몽골에 의탁한 거란의 후예이다. 그의 선조는 일찌기 서남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들 "본인"이 아소루의 후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어쨌든 막북과 운남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학술계에서도 이들을 거란의 후예라고 단정짓지 못하고 있다.

 

최근들어 사회과학원의 유봉저(劉鳳?) 교수는 DNA기술을 이용하여 이 천고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가 이끄는 전문가들은 먼저 사천 낙산에서 거란여자시신의 손목뼈를 얻고, 내몽고자치주 적봉에서 묘지로 증명된 거란인의 이빨, 두개골을 취하고; 운남보산, 시전 등지에서 "본인"의 혈액을 채취하고, 내몽고자치주 모리다와기와 기타 몇개 기에 있는 '다오르' '어온커' '몽골', '한족'등의 혈액샘플도 채취했다. 추출된 DNA와 비교해보니, 다오르족이 거란과 가장 가까운 유전관계에 있어, 거란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남의 '본인'은 다오르와 유사한 부계기원을 지니고 있어서 몽골군대내의 거란관병의 후예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이들 검사의 최대난점은 실험에서 얻고 분석한 고대 거란의 DNA가 확실히 고DNA이며, 오염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생물유전에서의 유기물은 장기간 분해되면서 거의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실험은 유한한 DNA에서 복제증식을 거쳐 오염을 제거한다. 비록 이번 분자고고의 실험은 음양성대비에 따라 진행하였지만, 그래도 엄격하게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네안데르탈인 분자고고법으로 실험을 진행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검사는 아직 더 검증이 필요하다. 사실 이번 검사결과가 정확하다고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간단하게 민족의 원류문제를 얘기할 수 없다. 거란족은 1천년동안 족외혼을 해왔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거란인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