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과 관련된 연대기
- 402년, 사륜(社侖)이 스스로 구두벌(丘豆伐) 칸에 올라, 유연국이 정식으로 건립됨. 동시에 대외전쟁을 일으키며, 국력은 전쟁과정에서 강성해짐.
- 438년, 북위(선비족)의 태무제 탁발도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유연국을 정벌하러 감. 이때부터 유연과 북위간의 장기전이 시작됨.
- 445년, 북위는 제1차 서정(西征)을 개시함. 산산(신강지역의 지명)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유연세력은 산산에서 퇴출됨. 이로써 유연은 대외전쟁에서 쇠퇴하게 됨.
- 448년, 북위는 제2차 서정을 개시함. 유연국은 응전에 국력을 소진함. 계속 패전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북위의 공격을 물리치긴 했고, 일부 실지를 회복했으나, 국력은 많이 쇠퇴하여, 덩구 쇠락함.
- 487년, 원래 유연에 속하던 자륵부복라부 아복지라가 10여만을 이끌고 유연의 통치를 벗어나, 고차국(高車國, 쿠차)을 건립함. 이로써 유연은 서역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됨.
- 6세기초, 유연국의 통치집단의 내분으로 북위에 투항함.
- 522년, 유연의 수령인 아나괴가 북위에 반발하여, 유연이 부흥하게 됨
- 555년, 돌궐이 대거 서부유연으로 진공하여, 유연의 통치자를 죽임으로써, 유연국이 멸망함.
노예가 건립한 왕국
중국서북지역의 대막초원에, 일찌기 휘황한 역사를 남긴 나라, 유연국(柔然國)이 있었다. 유연국은 선비족의 한 갈래로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기까지 몽고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국가가 가장 강성했을 때는 국토가 북으로는 바이칼호수, 남으로는 음산산맥, 동북으로는 대흥안령, 서쪽으로는 준가르분지와 맞닿았고, 타림분지의 광대한 지구까지 진출한 바 있었다.
유연국의 건국시조는 목골려(木骨閭)이다. 그는 어려서 선비족의 척발부에 붙잡혀 노예생활을 한 바 있다. 그는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장하고, 지혜가 충만하며, 큰 포부를 지닌 청년이 되었고, 이로 인해 노예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여 기병으로 승진한다. 나중에 목골려는 잘못을 저질러 참형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게 된다. 그는 도망치는 도중에 명성을 듣고 몰려든 100여명을 거느리고, 음산의 북쪽일대로 가서, 그곳의 소수민족을 다스린다. 그리고 여기서 세력을 점차 확장한다. 후세자손들은 "목골려"의 변성인 "욱구려(郁久閭)"를 성으로 삼는데, 바로 유연국의 왕족성이 된다.
목골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차록회(車鹿會)는 부친보다 훨씬 용감하게 전투를 진행하여, 다른 부락을 겸병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부락을 지배하게 된다. 차록회는 자신의 부락이 어느 정도 강대해졌다고 생각하고, "유연"이라 자칭했고, 북위에 부속(附屬)되었으며, 부락의 수령을 "대인(大人)"이라고 불렀다. "유연"이라는 말은 알타이어에서 온 것으로 총명, 현명, 예의, 법칙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연은 매년 북위에 많은 가축과 진귀한 동물모피를 진상했다. 유연국이 정식으로 건립된 것은 북위천흥5년 즉 402년이었다. 사륜이 구두벌칸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다. 유연은 대막남북을 차지한 강대한 노예제국가였다. 유연국은 19명의 군주, 152년간 지속되었다.
사륜은 유연왕국을 건립한 후, 바로 서역지구로 발전했다. 그들은 대군을 이끌고 원래 흉노족이 개발한 초원의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사륜은 흉노나 돌궐과는 달리 정권의 중심을 막북지역에 두지 아니하고, 수도를 서쪽에 치우친 돈황/장액의 북쪽에 두었다.
유연은 서역지역을 정벌하면서, 대량의 병력, 물자, 재력을 동원했다. 이는 유연부락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연에 정복된 종속부락을 활용했다. 그중 하나가 고차부락이다. 이점은 고차의 발전사에서도 확인된다. 고차족은 막북에 살아왔었는데, 나중에 이중 6개부락은 막북에 남아서, 동부고차라고 부르고, 12개부락은 서역으로 이주하여 서부고차라고 부른다. 서역으로 이주한 12개부락은 바로 유연에서 파견한 부대였다. 이런 부족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정령(丁零)부락, 철륵(鐵勒)부락이 그들이다. 이들 부락은 유연이 영토를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동시에 유연국의 통치에 숨은 골치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유연국이 쇠퇴하게 되자 이들 부락은 바로 유연의 통치에 반항하였고, 이는 유연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구두벌칸이 서역을 정벌하면서 유연은 신속하게 강대해졌다. 그의 후계자인 곡율(斛律)칸은 더욱 맹렬하게 대외확장을 진행하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오손(烏孫)을 점령하고, 소그디니아의 여러 성방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대월지등의 국가도 약탈하였다. 유연은 서역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쪽에 있는 북위와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방어전략을 폈다. 당시 유연의 역량은 아직 중원을 차지한 북위에 대항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곡률칸은 서역정벌의 발걸음을 가속화했다. 곡률칸이 죽은 후에 대단(大檀)이 탁월한 전공으로 다음 칸에 추대되어 모한흘승개(牟汗紇升蓋)칸이 된다.
곡률칸의 가장 큰 업적은 오손을 무너뜨린 것이다. 오손을 무너뜨릴 때 인접국인 열반(悅班)과 연합하였고, 오손을 두 나라가 나누어가졌다. 이리하여 비단길은 잠시나마 다시 열리게 된다. 이후 유연은 열반과도 전쟁을 벌이고, 이전에 복속했던 부족들도 반항을 하게 된다. 대단칸이 들어선 후에는 비단길의 중부지역에 주력을 한다. 그리하여 먼저 후서량(後西凉)을 복속시킨다.
서랑은 원래 세력이 강대하였던 국가이고, 한때는 이오, 고창의 두 나라에까지 이르렀다. 나중에 국세가 쇠퇴한다. 곡률칸이 재위하고 있을 때, 이미 유연은 서량의 북부변경을 침범하게 된다. 서량은 유연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돈황부근에 이미 황폐해진 두 곳의 요새를 재건한다. 나중에 서량은 북량에 의하여 멸망한다. 잔여세력은 후서량국을 다시 건립한다. 대단칸은 후서량의 통치권을 취득한 후 북량, 북위에 대하여 진공을 시작한다. 북위는 유연과의 사이에 장성을 쌓아 유연의 공격을 대비한다. 나중에 대단칸의 부대는 북량의 세자를 죽이고, 북량정권은 위기를 맞이한다. 대단칸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오제(吳提)가 즉위하여 칙련(勅連)칸이 된다. 오제는 비단길에서 세력을 계속 확장하고, 국가는 더욱 강대해진다. 언기, 고묵, 구자등의 소국이 복속하게 된다. 이리하여 새로운 비단길이 연결되게 된다.
유연이 서역을 장악하자, 북위의 통치자들은 위기를 실감한다. 438년,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유연국을 정벌하러 나선다. 막북은 건기였으므로, 군대는 물이 없어 곤경에 빠지고, 대패하고 돌아온다. 탁발도의 동생은 전쟁중에 유연에 생포된다. 오제는 이를 빌미로 삼아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게 이제 북위는 위기일발이니 더 이상 북위에 조공을 바치지 말도록 얘기한다. 그리하여 작은 나라들이 여럿 북위에 항거하여 조공을 바치지않고, 유연국에 복속한다. 유연은 북위와 대치하면서도 서역을 계속 통제했고, 통치기반을 공고히 했다.
445년, 북위는 제1차서정을 개시하여 대거 산산으로 진공하고, 승리를 거둔다. 나중에 북위는 '교지공' 한발을 산산왕에 봉한다. 한발은 산산왕이기는 하지만, 북위가 설치한 관리가 이 지역을 사실상 관할한다. 이후, 유연은 산산지역에서 퇴출된다.
448년, 북위는 제2차서정을 개시한다. 북위와 열반국은 연맹을 맺어, 병사를 나누어 유연을 합공한다. 두 나라의 협공하에, 유연국은 겨우겨우 응전하고 계속 연합군에 패전한다. 그러나, 토하진칸은 비록 양측의 협공을 받아, 산산, 언기를 잃었지만, 결국은 두 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북량정권과 연합하여 북위에 반격을 시도하여, 실지를 약간이나마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후북량정권도 탈취해버린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유연은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후 유연의 칸들은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퇴하면서 국세가 약화된다.
북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유연의 국세는 날로 쇠약해진다. 유연에 정복당했던 부족들도 하나둘 반란을 일으켜 독립한다. 487년, 유연에 속했던 칙륵부복라부의 아복지나가 10여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하여 유연의 통치를 벗어나 고차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된다.
6세기초, 위기에 처한 유연은 다시 통치위기가 다가온다. 통치집단내부의 칸위쟁탈전으로 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520년, 추노칸은 그의 모친과 대신에게 살해당한다. 아나괴가 칸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등극한지 10일만에 다른 왕족에게 쫓겨난다. 그는 북위에 투항하여 낙양에 거주하다. 나중에 아나괴의 종형인 파라문이 수만명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고, 스스로 우가사구칸에 오른다. 나중에 파라문도 10만기병을 이끌고 북위에 투항한다.
북위는 유연을 남겨 주변에 강성해가는 고차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쓴다. 그리고 유연국을 둘로 나눈다. 아나괴는 회삭진북쪽의 토약해천에 안치되고, 파라문은 거연해 부근의 서해군에 안치된다. 522년, 파라문이 북위에 항거하다 북위에 생포되고, 2년후 감옥에서 죽는다. 곧이어 아나괴도 유현, 회황의 2진사이에 30만의 병력을 모으게 된다. 그는 북위의 육진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이용하여 장성이북의 막남지구를 장악하고, 스스로 칙련두병두벌칸이라고 칭한다. 북위의 멸망은 유연이 부활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준다. 다만, 잠시동안의 부흥으로 유연의 운명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유연국은 노예, 노예부락의 반란으로 다시 분열된다. 6세기 중엽, 또 다른 소수민족정권인 돌궐이 강대해지고, 돌궐은 유연에 대하여 전쟁을 개시한다. 아나괴는 전투에 패하여 자살한다. 동부의 잔여세력은 철벌을 칸으로 옹립하고, 서부의 잔여세력은 등숙자를 칸으로 옹립한다. 동부유연은 나중에 돌궐에 격패당하여 기본적으로 와해된다. 555년, 돌궐은 서부유연으로 대거 진공하고, 등숙자는 수천을 이끌고 서위에 투항한다. 서위(西魏)는 돌궐의 위협하에 등숙자와 그의 부하 3000여명을 돌궐에 넘겨준다. 대부분이 피살당하면서, 유연국은 멸망한다. 잔존한 유연의 부족은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다른 민족에 융합되어 역사에서 소실되어 버린다.
전설에 따르면, 유연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여여공주(茹茹公主)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가는 1000여년동안 수수께끼였는데, 1978년 1000여년간 잠들었던 여여공주가 다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그녀와 함께 잃어버린 유연의 일부 역사가 드러나게 된다.
이해 봄, 하북, 자현 대총영촌의 촌민들은 평소처럼 호미를 들고 마을 북쪽의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하던 농민들은 기괴한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한 농민의 호미가 아주 단단한 것에 부닥친듯한 소리가 난 것이다. 그곳을 파자 돌맹이같은 것이 드러났다. 파낼 수록 돌은 커졌고, 점차 원호형의 덮개가 드러난다. 촌민들은 자세히 살펴본 후 이것은 누군가의 묘라고 생각했다. 이 소식은 금방 퍼져나가서 하북성 문물국의 허가를 받아, 고고학자들과 고고발굴팀이 현장으로 파견나왔다. 묘비명에는 명확하게 "위개부의동장광군개국고공처여여공주여씨(魏開府儀同長廣郡開國高公妻茹茹公主閭氏)"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원래 묘에 안장된 것은 전설상의 유연공주 여여공주였던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위개부의동장광군개국고공'은 바로 동위의 승상인 고환(高歡)의 아홉째 아들인 고담(高湛)이다. 묘지명으로 봐서, 고담의 처가 바로 여여공주였던 것이다.
여여공주는 유연국의 수령인 아나양(阿那穰)의 손녀이다. 유연은 동위정권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위정권은 유연을 이용하여 서위정권을 견제하기 위하여 가장 보편적인 화친의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여공주가 동위에 시집올 때는 겨우 5살이었다. 이 천진무사한 소녀의 남편인 고담은 당시 겨우 8살이었다. 이 고담이 바로 나중에 북제의 무성황제가 된다.
여여공주가 시집을 온 후에, 고씨집안의 세력은 급격히 성장한다. 조정의 대신들과 황제들도 모두 고씨집안의 배후에는 유연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여공주는 성장하면서 경국지색의 미모와 뛰어난 학문을 지닌 재녀가 된다. 고담도 풍모가 뛰어난 영준한 소년이 된다. 부부간의 사랑은 아주 깊었다. 그러나, 여여공주의 운명은 불행하였다. 고환과 동위황제가 협의하여 두 사람을 합방시키려고 할 때, 갑작스런 변고로 여여공주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그녀의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여여공주가 죽은 후 동위에서는 그녀를 위하여 아주 융성하게 장례를 치러준다. 유연의 아나양은 손녀를 시집보낼 때, 유연의 강대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혼수품을 장만하면서 당시 무역이 가장 발달했던 비잔틴에 가서 물건을 마련한다. 그 때 비잔틴의 금화를 2개 가져와서 여여공주가 시집갈 때 챙겨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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