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청시기의 개방(丐幇) (I)

중은우시 2008. 11. 17. 17:42

글: 천행운(天行雲)

 

무협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개방"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방(幇)"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강호(江湖)에서 생성된 방파(幇派)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명청시대까지 '개방'이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개방방주(幇幇主)"라는 이름은 무협소설가의 창작이다. 화자(花子, 거지) 사회에서 크고 작은 화자를 통치하는 두목을 "단두(團頭)"라고 통칭한다. 그들은 화자사회에서 지고무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관료, 상인, 문사들이 보기에 "구유십개(九儒十)"라는 위계순서를 보자면, '단두'는 비록 거지들의 두목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구류(下九流)"의 말류에 속하고, 누구도 그를 높이 평가해주지 않는다; 다만, 거지사회에서는 그가 황제이다. 그가 정한 규칙은 바로 금과옥조이고, 그가 분부한 말은 바로 금구옥언이다. 누구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방규가법'에 따라 처리하는데, '국법'보다도 삼푼은 더 혹독하다. 거지들이 일을 범하면, 단두는 관청처럼 사건을 심리하여, 가벼우면 뺨을 때리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무거우면 "삼도육개동(三刀六個洞, 칠촌강도를 하나 주고 자기의 몸안에 아무 곳이나 칼로 세번 찌르게 한다. 다만 모두 구멍을 내서 뚫고 지나가야 한다)", 더욱 무거운 경우에는 할비(割鼻, 코를 자름), 철안(眼), 감수(手), 타각(脚)에서 엄사(淹死, 물에 빠트려 죽임), 조사(弔死, 목을 매어 죽임), 돌을 던져 죽이는 것, 방망이로 때려 죽이는 것까지 한다. 이런 '방규가법'은 각 종족의 '족법'과 마찬가지로 역시 '왕법'의 보호를 받았다. 형을 받은 사람은 아문에 고발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문의 관리는 다시 거지가 '단두'를 고발한다는 말을 들으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가벼우면 혼쭐을 내서 쫓아보내고, 중하면 곤장을 친 다음 칼을 3일간 목에 채운다. 죽임을 당한 거지는 개방에 들어온 때로부터 부역, 납세의무를 완전히 면제받고, 호적조차도 없다. 시골관리들도 이처럼 아무런 생기는 것없는 일에 괜히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명나라의 각부주현의 단두는 주원장이 천하를 얻은 후에 각 부주현의 성황(城隍)과 함께 임명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성황으로 봉해진 것은 모두 이미 죽은 공신들이지만, 단두로 봉해진 것은 전공을 일부 세우기는 했지만, 자잘한 과오를 범한 하급병사들이었다. 주원장은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거지두목'의 세습직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문의 규정을 두었다: 단두의 아들은 글을 읽어서는 안되고, 딸은 전족을 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 남자가 글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딸이 전족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관료나 대갓집에 시집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황은호탕'이면서 또한 '군대와 정부에서 축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히 다시는 관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은혜이기도 하면서 징벌이기도 하다.

 

단두에도 '급별'이 있었다. 가장 늦은 것은 향급(鄕級)이고, 그 위로는 현급(縣級), 부급(府級)이 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층층히 통할한다. 단두는 상급의 관할을 받는 외에, 현지 지방관리 예를 들어, 지부, 지현, 향관의 통제도 받는다. 주원장은 단두를 임명하면서, 아마도 성급까지만 생각한 것같다. 국가급은 임명하지 않았다. 명나라 가정연간에 이르러, 재상 어뭉은 어사 추응룡등으로부터 탄핵을 받는다. 명세종 주후총은 그의 태자태사, 무영전대학사의 작위를 박탈하고, 그의 집안을 몰수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엄세번을 죽인다. 그러나, 그가 20여년간 공로를 세운 점을 감안하여, 그에게 은완(銀碗) 하나, 금젓가락 한 쌍을 내려, 구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를 "천하도단두(天下都團頭)"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전국 각부주현의 크고 작은 단두들을 총괄하게 된다. 다만 백성들은 그를 뼛속까지 미워해서, 그가 어느 집앞에 나타나면, 그에게 먹을 것을 적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북경의 은완후통에서 굶어죽는다.

 

엄숭이 죽은 후, 그는 황제의 임명을 받았던 천하도단두였으므로, 개방에서 그를 받들어, 그를 "조사야(祖師爺)"로 모시고 거지들이 제사를 지내준다. 항일전쟁기간동안, 필자는 절강성 진운현 호진의 '서류소(棲流所)"라는 곳의 대문 안에서 거대한 채색벽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려져 있는 것은 엄숭이 홍포(紅袍)를 입고,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발에는 조화를 신고, 허리에는 옥대를 매고, 왼손으로는 은완을 들고, 오른 손으로는 금젓가락을 쥐고있다. 그러나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늘을 향하여 소리지르는 모습이다. 엄숭의 후손들이 이 "봉호"를 승계했는지 여부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황제로부터 임명받은 크고 작은 단두들은 제왕공후와 같이, 대대로 세습할 수 있었다. 황제가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은 전국옥새라면, 단두가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은 바로 거지사회에서 인정된 하나의 신물(信物)이다. 예를 들어 특수한 타구봉(打狗棒)이라든지, 아니면 오래된 대나무뿌리로 만든 한연관(旱煙管)과 같은 것들이다. 필자는 한 단두의 수중에서 권력을 대표하는 한연관을 본 적이 있다. 오래된 대나무뿌리로 만든 것이었는데, 연관은 붉고 투명했으며, 빛이 났다. 언뜻 보기로도 절대 몇대만을 내려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아마도 명나라초기부터 물려온 것일 것이다. 아마도 엄숭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서류소는 현재의 부자가 혼자 혹은 여러 명이 힘을 합쳐서 만든 곳으로 속칭 "토반옥(討飯屋)"이다. 원래의 뜻은 오고가는 떠돌이들이 잠시 몸을 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본 호진의 서류도의 대문 양쪽에는 돌에 다음과 같은 대련을 새겨 놓았다: "지가로과잠서식; 불가장천작주거(只可路過暫棲息; 不可長川作住居, 잠시 쉬어갈 수는 있어도, 장기거주할 수는 없다)" 이름이 듣기 거북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서류소의 규모는 적지 않다. 최소한 7,8간의 방이 있다. 이처럼 넓다란 집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각지의 서류소는 단두들이 공무를 보는 곳이 되었다. 정방에는 단두와 그의 처자식이 살아갈 뿐아니라, 중간의 한칸에는 단두의 공무를 보는 집무실이 있다. 여기서 사건을 심리하고, 형을 행하고, 엉덩이를 때리는 등이 이 곳에서 집행된다. 크고 작은 거지들이 모두 볼 수 있다. 이외에 각종 잡곡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다.

 

거지들은 남여유별의 원칙에 따라, 각각 양쪽의 상방의 통포(通鋪)에서 산다. 방의 뒤에는 돼지, 양, 닭, 오리등을 기른다. '향급'의 서류소에서 단두가 통할하는 거지는 개략 200여명이다. 그러나, 서류소에 거주하는 것은 겨우 3,40명이다. 그중 일부분은 매일 바깥으로 나가서 구걸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반드시 '분례(例)'를 납부해야 하는데, 3,5문 혹은 몇냥의 쌀이다; 일부분은 '집'에서 닭오리를 기르거나, 양돼지를 기른다. 단수는 매월 분례전(例錢)을 지급하는데, 마치 고용된 일꾼과 비슷하다. 그리고 일부분은 거지왕국에서 '공무'를 맡는다. 거지들이 가규를 어길 때, 처벌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길에 쓰러진 사람이나 얼어죽은 시신이 발견되면 둘러업고 가서 묻어주고나서, 동네유지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도 그들이다. 당연히 단두의 집안에 일이 있어서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도 그들이다. 가족은 있으나 먹을 거리가 없어서 거지로 전락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거주해도 된다. 그러나, 매월 '분례'를 납부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단두의 명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걸을 할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송원(宋元)시대의 단두와 화자는 아마도 지방에서 죽은 자의 염을 처리하였다. 왜냐하면 이런 더러운 직업을 일반인들은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호전에서 무대랑이 반금련에게 독살된 후, 단두인 하구숙(何九叔)이 거지들을 데리고 염을 했다. 수호지에서 쓴 것은 송나라때 일이지만, 작자는 원나라 말기의 사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소한 원나라때까지는 이런 습속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방의 내부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가난해서 할 수 없이 구걸하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이 인류사회의 최저층에도 삼교구류등의 빈천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여전히 존비, 상하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몫이 있고, 자기의 구역이 있다. 절대로 섞여서는 안된다.

 

개략적으로 나누어보면, 거지는 프로 거지와 아마추어 거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처음에 듣기에는 거지에 무슨 아마추어가 있을까 생각될 것이다. 마치 우스개소리같지만, 개방의 내부에서는 이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소위 "아마추어"는 본래는 다른 직업이 있는데, 긴급한 혹은 특수한 사정이나 곤란이 발생하여, 부둑이 임시로 거지생활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래에는 청나라말기의 강남개방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첫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선생(先生)"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들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봉사이다. 어려서부터 스승을 모시고 이야기꾼(說書)이 된다. 강남에서는 이것을 '창고사(唱故事)'라고 한다. <<해공대홍포>>, <<설인귀정동>>, <<대향산>>(관음보살이 세상에 태어나서 득도하기까지의 과정)과 같은 장편소설을 한두달씩 얘기해도 절대 중복되지 않을 정도이다. 다만, 1년 삼백육십오일중 아무도 초빙하지 않는 날이 많다. 배를 곯게 되면, 부득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하게 된다. 매 집안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 좋아하든 말든 고판(鼓板)을 두드리며, 노래를 한바탕 불러제낀다.  주인은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돈이나 약간의 쌀을 내준다. 이들이 바로 "선생"이라고 불리우는 아마추어 거지들이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이들을 "토반부대완(討飯不帶碗, 구걸을 하지만 그릇을 들고 다니지 않음)"이라고 부른다. 남은 밥이나 음식을 내놓을 때는 그릇과 젓가락을 함께 내놓는다. 이것은 아마도 민간예술인에 대한 어느 정도 존경의 표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토청화자(討靑花子)"이다. 청황부접(靑黃不接, 작년에 수확한 곡식은 바닥내고, 햅곡식은 아직 나오지 않음)의 기간동안, 집안에 약간의 옥수수가루와 감자조각이 남게 되면, 농사짓느라고 힘든 남자들을 위하여 남겨두고, 여자들은 손자손녀를 데리고 대갓집이나 여유있는 집을 찾아가서 구걸한다. 남은 탕이나 밥으로 이 시기를 넘기는 것이다.

 

세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간묘회화자(廟會花子)"이다. '묘회'때면 적선하는 사람들은 향을 피우는 외에, 일반적으로 약간의 동전을 거지들에게 뿌린다. 이것을 "적덕적복(積德積福)"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묘회에는 진짜 거지들 외에도, 많은 가짜 거지들이 몰려든다. 대부분은 아마추어이다. 향객의 가련과 동정을 얻어내기 위하여, 그들은 봉사인 척하거나, 절름발이인척 한다. 어떤 사람은 수육을 찧어서 다리에 발라서 발이 썩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묘회기간이 지나면, 봉사든 절름발이든 다리가 썩은 사람이건 모두 멀쩡해진다.

 

네번째 아마추어 거지는 "간신춘화자(新春花子)"이다. 이들은 모두가 가난하여 집안에 솥을 걸 수조차 없는 경우가 아니다. 그저 정월 신춘의 십여일 이십여일의 기간동안 '시간을 내서' 구걸하는 경우이다. 정월에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일을 하지 않으므로, 놀 사람은 노는 것이고, 나가서 구걸이라도 함으로써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그 시간에도 돈을 버는 것이다. 정월 신춘에 나가서 구걸을 하면, 몇 마디 듣기좋은 신년인사를 잘 하면 여유있는 집이라면 집집마다 조금씩 나누어주는 것이다. 쌀 이외에, 떡, 만두, 종자등등을 받아온다. 얼굴을 조금 두껍게 하거나, 조금 먼 동네까지 가서 혼자서 정월에 구걸한 소득이라면, 한 식구가 한달을 먹고살만할 정도이다.

 

이외에, 임시적인 아마추어 거지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을을 돌아다니는 극단이 연일 날씨가 좋지 않으면, 아예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어, 반주가 음식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게된다. 그러면 두 세명씩 짝을 지어 길거리로 나가서 호금, 피리를 분다. 이들도 아마추어 거지에 포함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줄기로 말하자면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이다.

 

각양각색의 '아마추어 거지'에 대하여 단두는 조상때부터 내려온 불문율에 따라, '행업세'를 거둔다. '창고사선생'이나 '간청화자'는 그저 뜻만 전하고 찾아와서 몇 마디 인사를 건네고 하면 단두를 존중하는 예의를 다 한 것이 된다; 그러나, 거의 사기에 가까운 '간묘회화사'나 '간신춘화자'는 반드시 일정한 '공품'을 바치도록 한다. 그래여 그들이 구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단두가 명령만 내리면, 그의 '아이들'은 바로 둘러싸서 가짜 거지의 옷을 찢어발겨 버린고,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게 해버리고, 더이상은 감히 가짜 거지노릇을 못하게 만든다.

 

'아마추어 거지'는 명의상으로는 단두의 단속을 받고, 필요한 때에는 단두의 명령을 듣고, 구걸할 때 개방의 규칙을 준수하면 그만이다. 평소에 그들은 각각의 집에서 각자의 본업에 충실하면 된다. 그저 서류소에 머무는 그 '아이들'이 비로소 거지왕국의 충실한 백성이고, 개방에서 명실상부한 '프로 거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