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상해도대(上海道臺): 상해조계의 중국관원

중은우시 2008. 9. 26. 16:30

글: 진단연(陳丹燕)

 

1. 양쪽에 낀 상해도대

 

그는 청나라의 4품관이다. 관복은 가슴앞에 운안(雲雁)을 수놓았고, 외포에 수놓은 것은 사조육망(四爪六)이었고, 머리에 쓴 모자에 다는 구슬은 청금석으로 만들었다; 신분등급사회에서 사람들이 이런 모습만 보아도 그의 신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어깨는 관복으로 일그러져 있고, 뒷등도 부풀어 있으며, 사지는 넓다란 소매과 바지속에서 제대로 서 있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의복의 제약을 받을 수 �에 없어, 허수아비가 손과 발을 놀리고 있는 모습과 같았다. 그는 이렇게 취약하고, 딱딱하고, 고루했다. 그가 바로 '상해도대'이다.

 

상해가 조약상 개방항구가 된 이후, 하늘색 관복을 입은 그에게서 권위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는 외국의 강자들과 교섭하는 것을 배워야 했고, 조약제도하에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통상이후, 도대는 반드시 자기 스스로 어떻게 외국인들을 대하여야 할 지, 어떻게 자신의 인민을 보호할지, 자기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지를 모두 결정해야만 했다. 여기에 조정은 감정기복이 무상하여, 이 개방항구에서의 도대는 정말 하기 힘든 관직이었다.

 

1862년, 영국영사관의 건너편에 있는 강에 탄지(灘地, 강가에 모래나 진흙이 쌓여서 형성된 땅)가 나타났다. 공부국의 외국동사들은 이때가 되어서야 <<토지장정>>에 따르면 와이탄의 토지는 조계이지만, 강둑 바깥에 있는 탄지는 여전히 중국영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땅이 중국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 영국상인이 말한 것처럼, "영국조계의 와이탄은 상해의 눈이자 심장이다....중국정부가 이 탄지를 장악한다면, 사람들이 역겨워할 일들이 뭐든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외국인사회의 양심만이 이를 구원할 수 있다"

 

상해도대는 영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역겨운 소인배였다. 그는 중국인들의 교활함, 더러움을 대표하고 좋은 뜻을 품지 않은 자이고, 또한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수수방관은 하지 않으려는 중국정부를 대표하는 자였다. 영국인들은 그를 쓰레기처럼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러웠다. 상해에서 생활하는 100년간 그들은 계속하여 도대라는 이런 소인배가 자기들과 권리다툼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 처해 있지만, 중국인들이 그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소도회의 반란때 서양인들을 죽였을 뿐아니라, 도대도 죽이려 했다. 상해에 무슨 일만 터지면, 거국적으로 분노했고, 도대는 조정의 속죄양이 되거나 화풀이대상이 되었다. 상해도대는 전체 중국인들이 보기에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구관(狗官, 개같은 관리)'였다. 그리하여 20년동안 17명이나 바뀌고, 한 사람도 오래 버티질 못했다.

 

2. 외국인들의 공원에 중국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다.

 

1865년, 외국인들은 이 탄지를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공원을 조성하고자 한다. 상해도대는 이에 대하여 영국영사에게 서신을 보내고, 상해의 토지를 지키려고 한다: "이 땅은 비록 공부국이 메웠지만, 여전히 중국의 정부가 소유하고 있다...그러므로, 서양상인들은 임대하거나 빌려줄 수 없다. 집을 지어 이익을 얻는 조건으로, 전량을 면제해준다. 만일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땅은 공용으로 수용하겠다" 이 서신은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어버린데 대한 어쩔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 한편으로는 정신을 차리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지한 것이고, 한 편으로는 아무리 회피하려고 해도 스스로의 모습이 형편없어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인의 마음 속에서 상해도대가 아무리 이치를 따지더라도, 그 땅은 원래 조계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30무(1무는 200평)의 토지에 작은 공원을 짓고 관리위원회를 두었다. 영국에서 경험있는 조경사를 불러왔고, 런던에서 만든 철난간을 구매했을 뿐아니라, 나무도 모두 영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동사들은 자주 돈문제로 다투었다. 그러나 공원을 위하여 쓰는 돈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상해에 영국식생활을 재건하자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공원이 개방된 처음 몇년간, 중국인들은 공원의 규정에 대하여 아무런 이견도 내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몰랐다. 공원의 '공(公)'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원래 중국에서 부자의 화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외국인이 지은 공원에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상해도대는 확실히 알았다. 중국은 실질적으로 이 토지에 대한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그 기간동안, 그는 계속 이에 대하여 침묵을 지켰다. 다만, 거기에는 부끄러움과 이를 감추려는 생각이 있었다. 마치 집안의 귀중한 화병을 깨트린 아이의 심리상태와도 같은 것이다.

 

나중에 중국인과 외국인이 모두 공원규정에 반대하고 나섰다. 상해도대도 중국인의 입장에서 영국인들에게 금지를 풀어달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렇게 권하는 것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매번 깨끗하게 거절해버렸다. 마치 그가 권하는 말을 한 손으로 집어서 다시 면전에 집어던져버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상해도대는 여전히 참았고, 다음 번에도 항상 있는 일처럼 권하고 거절당하고를 반복했다.

 

3. 중국관원이 더이상 물러서지 않다

 

1884년, 상황이 달라졌다. 이 해에, 공원의 강쪽의 둑에 다시 탄지가 나타난 것이다. 1무(200평)가량 되는 땅이었다. 공부국은 상해도대에게 탄지를 메우겠다고 신청하고, 공원면적을 확장하겠다고 하였다. 공부국은 이 신청은 예전처럼 그저 형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관청에서 사람을 보내어 공원을 조사할 때, 공부국이 이미 제방에 말뚝까지 박아놓은 것을 발견했다. 상해도대는 바로 공부국에 조회를 보냈다. 공부국의 행위는 공원을 건립할 때의 최초약정에 어긋나고, 상해 <<토지장정>>의 조항에 어긋나므로, 공사를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소우렴(邵友廉)이라는 이 상해도대는 거인(擧人, 과거의 성급 합격자)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처해있던 시대는 이미 '이홍장'의 자강운동이 떠들썩하게 벌어진지 몇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홍장을 여러해동안 따른 도대들은 마음 속으로 광복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해에 영어학교도 열고, 번역관도 개설하며, 공장도 만들고, 관상이 결합한 윤선회사도 만들었으며, 영국국적의 중국해관세무사와도 교섭했다. 그러면서 제국의 땅바닥에 떨어진 체면을 다시 주워올리려고 하였다.

 

1무에 지나지 않는 아무 것도 아닌 탄지를 가지고 마침내 소우렴은 이치를 따질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대치하는 중에, 쌍방은 상해영사단에 고소했다. 영사단이 나서서 조정을 했는데, 공부국이 탄지를 메우기 전에 반드시 상해도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기 개시된 공사는 상해도대의 허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임의로 공사를 시작했다. 이어서 둑을 쌓았다. 그들이 보기에, 전체 중국은 모두 열강에 의하여 잠식되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그저 눈뜨고도 못본척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이에 익숙해져 있었다. 전체 중국이 모두 낙화유수인데, 누가 나서서 이 강바닥에서 솟아오른 조그마한 땅을 가지고 따질 것인가? 그리하여, 그들은 상해도대의 행위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그가 형식적으로 떠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번에 상황은 전과 전혀 달랐다. 소우렴은 바로 영국영사관과 상해영사단에 조회를 보낸다. 그리고 와이탄공원의 약정을 집행해달라고 요구한다. 공부국은 패소하고, 와이탄공원의 확장은 다시 중단된다. 이미 박아놓은 말뚝마저도 즉시 다시 뽑아내도록 한다. 중국측이 공부국에 파견한 대표는 태도가 강경해졌다. 그들은 지도를 가지고, 1인치 1인치 공원의 경계선을 측정했다. 공부국이 부득이 자신들은 공원을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구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만족했다. 그러나, 중국측은 여전히 공원확장에는 동의해주지 않았고, 공부국이 지도에 공원의 제방을 바깥쪽으로 둥글게 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반드시 직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해도대는 상해항구개방이후, 계속 양측에 끼어서 살았다. 경극에서 반파소화렴과 같다. 코의 양쪽에 하얀 색을 그리고 있는...이번에 그는 마침내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잠시 자신의 그 하얀 코를 씻어낸 것이다. 영국영사관은 부득이 자주 나서서 공부국과 상해도대간의 갈등을 봉합시켰다. 공부국에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이번 1무의 탄지싸움은 3명의 도대와 3기의 공부국동사회의 임기동안 계속되었다. 상해도대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공부국은 더 이상은 임의로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4. 중국인도 자신의 공원을 가지다

 

1890년, 섭집(緝)이 부임한다. 그는 역대 상해도대중에서 가장 나이젊은 사람이다. 35세에 부임했다. 그는 더 이상 소극적으로 거절하지 않고, 명확히 제기했다: "공원은 상해도대의 허가하에 그 탄지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조건은 반드시 중국인도 이익을 향유해야 한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외국인들에게 주권귀속을 승인하도록 압박했다. 오랜시간의 토론을 거쳐, 영국인들은 마침내 알았다. 그들은 탄지의 권익에 있어서 전심전력을 다하는 중국관원을 만난 것이다.

 

마침내 공부국은 하나의 타협방안을 내놓는다. 영국측이 돈을 내어 소주하가의 또 다른 탄지를 메꾼다. 와이탄공원을 확장완공하는 동시에, 그것에 중국인을 위한 전용공원을 세운다. 이 조건을 받아들여, 상해도대는 마침내 소주하를 준설한 흙으로 탄지를 메우도록 허가했다.

 

옛 자료에 있는 공원을 둘러싼 끊임없는 쟁탈전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었다. 무대에서는 깃발과 주인공의 옷자락이 점점 사라지지만, 북과 징소리는 계속 끊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과 같았다. 이는 언젠가 외국인들과 대등하게 자리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상해도대를 고무시켰다. 사실상 섭집은 양무운동에서 가장 뛰어난 상해의 청나라관리였다. 그는 강남제조국을 주재하고, 대량의 서양과학기술서적을 번역했다. 서방의 대포와 군함을 만들고, 이리하여 중국이 중불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전도사들이 신식학교를 개설하도록 장려하고, 중서여학교를 설럽할 때, 그곳에서 테이프커팅을 하기도 했고, 자기의 딸을 그 곳에 보내어 공부시켰다.

 

중국인공원이 개장될 때, 섭집은 기쁜 마음으로 개장의식을 주재했다. 이는 와이탄공원보다는 아주 좁은 서양식공원이었다. 강가에 백여미터 길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서양식의 나무 벤치가 있었고, 공원의 가운데에는 하얀색의 큰새 석조가 있었다. 이 상해도대는 친히 "환해연환(海聯歡)"이라고 쓴 나무편액을 주어 공원정문에 걸어두었다. 이 자그마한 중국인공원의 규정에는 외국인공원과 마찬가지로, 의관이 부정한 자는 출입할 수 없다. 술에 취한 자는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서양인은 출입할 수 없다는 규정은 두지 않았다.

 

그와 중국인과 공부국의 서양인은 함께 공원을 거닐었다. 영국에서 온 사람들이 '환해연환'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공원정문을 걸어들어갈 때 상해도대가 그 뜻을 설명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이 강경한 상해도대는 중국인을 입장시키지 않은 공원규정에 한을 품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이상은 세계대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은 공원의 규정에 조계공원의 규정을 본뜨면서도 외국인이 와서 즐기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