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국가역사 잡지
1890년, 일본은 상해에 간첩훈련기구인 일청무역연구소(日淸貿易硏究所)를 설립했다. 경비위기가 발생하고, 과목설치에 불만이 생겨, 일부 학생은 자신이 속아서 상해로 왔다고 생각했고, 충돌은 급속히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세계첩보역사상 드물게 보는 간첩학생운동이었다.
여러측의 노력을 거쳐 학생운동이 평정된 후, 학교측은 간첩기능외에 학생의 '사상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중시하게 된다. 이 학교의 '흥아(興亞)'사상을 담은 교가는 이렇게 하여 탄생한다:
일본소년이 중국으로 멀리 항해하여
일백오십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공부한다
만일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동아시아 만리에 구릅이 없고 하늘땅이 밝아지는 것을 보라...
이 노래를 소리높여 부르던 '일본소년' 간첩들은 이후에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그들의 이상에 따라 생사문턱을 넘나들었다. 중국에 붙잡힌 많은 간첩중에는 보타산에서 중으로 변장한 고견무부(高見武夫)가 46세의 고령인 것을 제외하면 처결된 간첩들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등기수(藤崎秀), 22세; 종기삼랑(鍾崎三郞), 25세; 등도무언(藤島武彦), 25세; 복원림평(北原林平), 26세; 석천오일(石川伍一), 28세; 남내유차랑(楠內有次郞), 29세; 산기고삼랑(山崎羔三郞), 30세....
상해간첩게이트사건에서, 중국정부는 미국영사관으로부터 인도받은 남내유차랑과 복원림평을 처결하여, 중국-미국간의 외교풍파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하마터면 미국국회가 중국에 유약한 대통령을 탄핵할 뻔하였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일본 간첩은 나이가 어려, 미국여론이 중국의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공격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다. 미국의 신문에서 두 사람을 언급할 때, 거의 "간첩"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일본청년" 혹은 "일본학생"으로 불렀다.
이 젊은 간첩집단은 일본군대에 중요한 첩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중국 및 세계에 향하여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의 굴기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들 청년간첩들이 중국에서 보여준 견인, 완강, 충정 내지 죽음도 불사하는 정신은 비록 그들이 우리의 불공대천의 원수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숙연하게 하고 자성하게 한다. 등도무언이 중국관방문건에서의 결론처럼: "내가 간첩이라고 하지만, 적국에서는 충신이다. 그게 뭐 어떤까?"
기이한 것은 이들 일본의 중국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한 청년들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흥아주의자"라는 점이다. 그들은 중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의 행위를 아시아를 진흥시키고 중국을 해방시키는 숭고한 사업이라고 믿었다. 바로 종방소태랑(宗方小太郞)이 결론내린 것처럼 황색인종이 백색인종의 압제를 벗어나려면 오로지 개혁하고 자강하는 수 밖에 없다. 그 전제는 반드시 중국의 폐정을 제거하고, 먼저 중국을 정복하여 일본이 중국과 단결하고 영도하여 함께 굴기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리하여, 요행히 전쟁시기에 청나라조정의 체포를 벗어난 일본간첩은 나중에 대대적으로 중일우호를 고취시키고, 중국에 상당히 광범위한 인맥을 쌓는다. 심지어 중국의 혁명가들은 이들을 '구추달로, 회복중화'의 동지 겸 형제로 생각하기도 했다.
종방소태랑은 일찌기 일본군대에 보고서를 내서, 도덕적우월감으로 한족들에게 만주족의 이족통치를 전복하도록 호소하였다. 향야견일(向野堅一)은 '보은'을 위하여 중국의 한 농가를 평생 돌보아 주었다; 등도무언은 약관의 나이로 세치 혀를 놀려 강도를 설득하기도 했다; '삼기'는 임종전에 동방을 향하여 형을 받기를 요구했고, 망나리를 화나게 해서 얼굴에 도흔을 남기기도 했다....이런 고풍의 이야기들은 백년동안 일본을 싫어하는 정서를 지닌 중국인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사실, 청일전쟁중의 일본간첩은 이 국가의 청춘역량을 대표한다. 상당히 농후한 이상주의색채를 띄고 있었다. 양계초는 그가 쓴 <<소년중국설>>에서, 격정적인 어조로, "붉은 해가 처음 떠오를 때 그 빛이 밝다; 강물이 처음 흐러지만, 한번 흘러가면 바다가 된다; 잠룡은 못에 숨어 있지만, 비늘과 손톱이 날카롭고; 어린 호랑이가 골짜기에서 소리쳐도, 백수가 놀란다..." 이는 그의 마음 속에 소년중국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당시 일본청년에 대한 흠모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청년기운으로 일본은 청일전쟁후에 중국이 배우려는 주요대상이 된다. 대강남북에 가득찬 것은 친일정서이지 구일정서(仇日情緖)는 아니었다.
청일전쟁시기의 간첩은 일본에서 숭고한 명망을 누린다. "인인지사(仁人志士)"로 취급된다. 이에 대하여 서양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국첩보사 전문가인 Donald McCormick은 Richard Deacon이라는 필명으로 쓴 <<일본간첩비사>>(영문원명은 Kempai Tai: A History of the Japanese Secret Service)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 간첩활동을 일종의 광명정대하고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일본의 많은 참고서에는 그들의 많은 대인물이 간첩활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이는 서방국가가 보편적으로 자신의 간첩활동을 숨기고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국의 전 동경주재무관인 말콤 케네디 대위는 일본첩보업무는 주로 <<손자병법>>등 중국고대병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손자병법. 용간편>>에 따르면, 간첩을 사용하는 것을 고도의 전략적인 위치로 끌어올려놓았다.
일본간첩을 보면, 청일전쟁때 일본의 각종문서에서 일본은 자기의 행위를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서양국가의 사관도 청일전쟁을 문명일본이 야만중국과 싸운 것으로 본다. 일본에 대하여 이해하고 찬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정의"라는 두 글자는 많은 경우에 모호하고 확정이 힘들다. 반대로 사람들은 쉽게 이에 빠져든다. "정의"는 심리상처를 치료하는 마취제이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기술측면에서의 낙후, 우둔과 나태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정의"를 손에 쥔 중국은 등세창(鄧世昌)을 제외하고, 백년이래로 청일전쟁에서 죽은 열사를 기념하지 않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정의"의 역량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정의"인 일본은 백여년이래로 나라를 위하여 희생당한 사람들을 모조리 제사지내고 있다. 봄가을에 거르지 않고 있다. 비록 이웃나라의 분노를 사더라도.
"정의"의 청나라중국은 자기의 간첩을 배양한 적이 없다. 심지어 전쟁전에 일본의 간첩에 대하여 유효한 방어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종방소태랑은 바로 총리아문에서 발급한 통행증을 가지고 당당하게 군사요지를 공개적으로 정탐했다. 전쟁전에 일부 일본간첩은 체포된 후, 모두 중국지방정부가 신속히 풀어주었다. 심지어 예의를 갖추어 출국시켰다. 전쟁후에 아직 처결되지 않은 일본간첩과 매국노들도 모두 무죄석방해주었다.
청일전쟁기간의 일본첩보업무는 다단계적이고 입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관방과 민간이 아주 잘 결합되었다. 일본은 중일협상의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외교기밀전보패스워드를 깨었다. 이를 보면, 군부와 외교부가 잘 협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대중국첩부업무는 국가전체적인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장기간 중국연구자들이 방치한 사실은 나중에 외무성 정부국장이 된 중전경의(中田敬義)가 1938년에 공개한 것이다. 1886년, 북양해군이 나카사키를 방문하고 현지일본경찰과 유혈충돌이 있었는데, 중국의 비밀전보 패스워드가 오대오랑(吳大五郞)이라는 일본인에 절취당한다. 1894년 개전전에, 일본 외교대신 육오종광(陸奧宗光)은 중국주일공사 왕봉조(汪鳳藻)에게 '제1차절교서'를 전달한다. 이것은 장문의 서신이다. 일본인은 고의로 이 내용을 중문으로 번역해서 주었다. 번역자는 바로 중전경의였다. 다음 날, 왕봉조는 국내에 장문의 전문을 보낸다. 일본은 이미 비밀전보를 중간에 획득하여, 원문과 대조하여 중국의 패스워드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전체 청일전쟁 기간동안, 일본은 중국의 비밀통신에 대하여, 최소한 외교계통의 비밀통신에 대하여는 모조리 볼 수 있었따. 전체 전쟁기간 및 시모노세키 조약협상기간동안, 중국에 아주 불리한 영향을 끼치지만, 중국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비밀번호를 해독하는것을 주재한 사람은 전신과장 사토(佐藤)이었다. 그도 일본외교사상의 풍운아이다. 나중에 일본의 전권대표로 1907년 6월 제2차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다. 이후에 주미대사를 맡는다. 이는 일본간첩이 중용된 또 하나의 사례이다. 그의 아들인 사토 나오타케(佐藤尙武)는 일본외무대신과 2차대전말기 주소대사를 역임한다. 소련군이 중국동북으로 밀고 들어갈 때, 그는 이를 가장 빨리 알게 된 일본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당시 그의 심정은 오장육부가 다 불에 타는 것같았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청일전쟁기간의 간첩들에 관한 많은 유물을 수장하고, 후세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일찌기 그중 일부 서예작품을 감상한 적이 있다. 그 안에는 당시가 한 폭 쓰여져 있었는데, 중국첩보망의 주요 창시자중 하나인 안전음향(岸田吟香)이 갑오는 늦가을에 쓴 것이다. 그 글씨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웅일거호화진(英雄一去豪華盡)
서권장류천지간(書券長留天地間)
항상 생각해본다. 우리의 영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책(서권)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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