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말의 입헌군주제 시도는 왜 실패했는가?

중은우시 2008. 9. 20. 01:34

글: 시초(翅楚)

 

1901년부터 10년간에 걸친 청나라말기의 신정(新政)은 미치는 분야가 광범위했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교륙 및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고, 나아가 체제내 변혁을 정치체제 자체의 변혁으로까지 상승시켰다. 그 너비와 깊이는 사상유례없는 것이었다. 이번 개혁은 청나라조정 최고의사결정권층 내부에 저지세력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공공연히 신정에 반대하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 모든 것은 혁명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였다. 청나라말기의 10년 신정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청나라말기의 십년신정은 대체로 1905년을 경계선으로 하여 전후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에는, 주로 각종 체제내개혁이 차례로 전개되었다. 1905년 청나라조정의 "예비입헌(預備立憲)"은 청나라말기 신정개혁이 이미 제2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체제 자체의 개혁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1단계의 개혁에서 청나라조정은 과감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제2단계 개혁에서 청나라조정은 연이어 실수를 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시기를 장악하지 못했다.

 

의회를 열고, 헌법을 만드는 것은 원래 유신파 인사들의 기본적인 주장이었다. 1898년의 '백일유신'이 피바람을 뿌리며 진압된 후, 전국의 조야와 상하에서는 모두 서태후의 뜻을 받들어 서정서학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입헌도 자연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1901년 청나라정부의 완고파들이 제국주의열강에 의하여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후에 할 수 없이 "신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개혁하게 되면서, "입헌"문제는 다시 핫이슈로 떠오른다.

 

1904-1905년사이의 러일전쟁의 발발 및 일본의 승리는 입헌활동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중대한 전기가 된다. 당시 중국 조야의 많은 인사들은 일본이 전승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입헌군주제를 시행했고, 러시아는 전제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았다. 군주전제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이 바로 그 분명한 예이다. 중국은 세계의 숲에 자리잡고 서려고 한다면, 반드시 입헌군주제를 하루빨리 시행해야 했다. 일시에 위로는 훈척대신부터 아래로는 포의서생까지, '입헌'이라는 두 글자는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유행어가 되었다.

 

1905년 7월, 직예총독 원세개와 양강총독 주복, 호광총독 장지동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12년후에 헌정을 시행하자고 주청한다. 또한 귀족대신을 각국에 파견보내어 정치를 시찰하도록 주청한다. 청나라조정은 유지를 내려 이를 받아들인다. 1906년 여름, 서양으로 정치를 시찰하러 떠났던 대신들이 차례로 귀국하여 복명한다. 진국공 재택은 그가 올린 밀지에서 입헌에는 세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밝혔다: 첫째는 '황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입헌국가에서 군주는 신성불가침이나 구체적인 행정에 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재상의 자리는 아침저녁으로 바뀌지만, 군주의 자리는 만년불변이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외환을 점진적으로 감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헌정을 시행하면, 먼저, 중국을 멸시하고 모욕하던 외국이 중국을 존중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침략정책을 평화적인 외교정책으로 변경할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는 "내란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혁명당의 사람들이 감히 변란을 꾀하고, 따르는 자가 많은 것은 그들이 '군주독재정치로는 관료는 모두 도둑이고, 백성은 어육이어서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헌정으로 고치게 되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며 변란을 꾀하더라도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와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은 '입헌을 모방하여 시행하기로" 선포한다. 다만, 입헌에는 예비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현재는 아직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고, 백성들이 미개하므로 반드시 각종 개혁조치를 차례로 실행한 후에 백성들이 국정을 명확히 알게 하여, 입헌의 기초를 예비한다고 하였다.

 

입헌을 지지하는 사람들, 즉 입헌파는 이런 부도수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국적인 청원운동을 벌여, 하루빨리 국회를 개회하고, 즉시 입헌을 실시하도록 요구한다. 청원운동은 18개성에 번지고, 심지어 해외화교와 유학생까지 가담한다. 전국에서 서명한 사람의 수가 확인되는 사람만 15만명에 달하였다.

 

각지의 입헌청원운동이라는 강력한 여론압력하에, 청나라조정은 1908년 8월 <<흠정헌법대강>>을 반포하고, 헌정편차관이 초안한 9년을 기한으로 하여 차례로 헌정을 준비하고, 기한이 되면 국회를 개최하는 안을 비준한다. 청나라조정이 9년의 기간을 두고 더 이상 양보하지 않은 것은 계속되는 청원활동이 국내의 정치안정을 해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11월, 광서제와 서태후는 하루도 사이를 두지 않고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만3살이 채 되지 않은 부의(선통제)가 황위를 승계하고, 그의 부친 재풍이 감국으로 섭정한다. 청나라조정은 9년의 예비입헌이라는 기존결정을 준수하겠다고 선포한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차례로 사망한 후, 어린 황제 부의는 그저 권력의 상징일 뿐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원세개는 만주귀족과 황족의 견제를 받았다. 1909년초, 청나라조정은 원세개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요양한다고 발표한다. 섭정왕 재풍은 어린 황제 부의를 대신하여 전국육해군 원수를 맡고, 동생 재순은 해군대신을 맡는다. 또 다른 동생인 재도 및 종실인 패륵 육랑은 관리군자처사무대신이 된다.

 

입헌파는 청나라조정권력이 이렇게 고도로 집중되는 추세에 반대했다. 이전에 이미 설립된 각 성의 자의국은 1909년 11월에 자기의 대표를 북경으로 파견하여, 국회조직청원활동을 기획한다. 다음해 1월, "청원국회대표단"은 도찰원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청나라조정에 '1년기간내에' '하루빨리 국회를 개회하도록' 요구한다. 청나라조정은 청원대표의 요구를 단연코 거절한다.

 

입헌파는 즉시 제2차청원활동을 조직한다. 그리고 "청원즉개국회동지회"를 성립시킨다. 북경에 본부를 두고, 각성에 분회를 둔다. 그리고 신문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1910년 6월, 10여개의 정치단체가 도찰원에 제2차 국회개회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여전히 청나라조정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다. 입헌파는 대거 실망한다. 그들이 청나라조정에서 마음이 떠나는 현상이 점차 가중된다.

 

이해 10월, 입헌파는 다시 청원한다. 청나라조정의 어용 자정원도 청나라조정의 최고층에 이들 '민의대표'의 건의를 수용하여 속히 국회를 개회할 것을 건의한다. 17개성의 총독,순무,장군도 연명으로 조정에 민의를 충분히 고려하여 입헌기한을 단축하여, 즉시 내각을 설립하고 내년에 국회를 개회하도록 건의헌다.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11월에 조서를 내려, 원래 9년으로 정했던 예비입헌기간을 5년으로 단축한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선통5년에 의회를 개설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한번 이것은 "늦추자고 해도 늦출 수 없고, 당기려고 해도 더 이상 당길 수는 없는" 확정기한임을 분명히 했다. '한번 선포했으니 다시는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개월후에 동삼성대표가 다시한번 북경으로 와서 청원서를 제출하고 내년에 국회를 개최하자고 하였을 때, 청나라조정은 군경에 명하여 동북청원대표를 체포하여 되돌려 보냈다. 동시에 관련 총독,순무에게 학생들이 시위하는 것에 대하여 탄압하도록 명령한다.

 

1911년 5월, 청나라조정은 혁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책임내각을 임명한다. 13명의 국무대신중 만주족이 9명(그중 황족이 7명)이고, 한족은 겨우 4명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황족내각"이라고 불렀다. 황족내각의 명단이 선포되자 전국을 들썩였다.

 

이해 10월 10일, 무창의거가 폭발한다. 여전히 "예비입헌"의 청나라조정은 결국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다.

 

청나라왕조의 말기 10년 신정가운데 개혁의 추진자에서 나중에 역행을 하게 된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청왕조의 개혁은 중화민족 전민족의 이익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산과 현재의 통치를 극력 보호하고 지키려는데서 출발했다. 1901년 서태후가 변법의 결심을 굳힌 것은 주로 청왕조의 내부 완고수구세력이 팔국연합군의 공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화의 재물로 다른 나라의 환심을 사기로' 한다. 국가의 근본이익을 팔아먹으면서까지 외국침략자들에게 그들의 통치에 대한 지지를 얻어낸다. 이것이 청나라말기 신정의 가장 적합한 해석이다. 1905년에 '입헌'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갈 때, 서태후가 귀족대신을 서양에 보내어 정치시찰하도록 허용하고 헌정을 준비하도록 한 것은 첫번째 목적이 여전히 황위의 '영원한 유지'였다. 그녀의 후계자들은 황족과 만주귀족의 사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국가의 기관을 다른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섭정왕 재풍을 우두머리로 하는 소수 귀족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청왕조의 생사존망이 걸린 긴요한 순간에까지 '황족내각'이라는 추악한 일면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둘째, 청나라조정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시기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1908년 11월, 광서제와 청나라의 실질권력을 근 반세기동안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가 차례로 죽었다. 이는 원래 중국정치변혁의 호기였다. 그러나 대권을 이어받은 섭정왕 재풍은 정치체제개혁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그저 9년예비의 기존결정을 지키겠다고 할 뿐이었다. 심지어 1910년 10월 입헌청원활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질 때, 17개성의 총독순무가 연명으로 주청하는 상황하에서도 청나라조정은 억지로 원래 정한 9년의 기간을 5년으로 단축하는데 동의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확정기간을 다시는 재론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다시한번 민의를 멸시한 것이다. 원래 청나라조정에 희망을 걸고 있던 입헌파들은 실망을 넘어 화를 냈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에서 멀어져간다. 심지어 일부분의 인사는 혁명을 지지하게 된다. 단명한 황족내각은 1911년 5월에 성립돈 후, 겨우 5개월여의 기간을 버텼을 뿐이고, 11월 1일에 해선을 선언한다. 쫓겨났던 원세개는 다시 등용되고, 같은 달 9일 청나라조정에 의하여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된다. 다만, 이때는 이미 무창의거의 총성이 울린 뒤였다.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었다. 민의를 짓밟은 청나라왕조는 인민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