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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추악한 호남인

by 중은우시 2008. 10. 24.

글: 장일일(張一一)

 

미국작가 벨과 유진이 공저한 <<추악한 미국인>>이라는 책은 미국국회에서 아주 귀한 경종을 울린 것으로 존중받고 있다; 백양(柏楊)선생은 당초 <<추악한 중국인>>을 쓰려고 준비했는데, 감옥에 갇힐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해를 허송했다; 이에 비추어, 이 글 <<추악한 호남인>>을 쓸 때는 이미 죽기를 각오했다. 호남의 네티즌들로부터 받을 침에 익사할 영광스런 준비를 마쳤다. 이런 각도는 정말 장려(壯麗)하지 않은가?

 

1. 호남인의 못말리는 자부심

 

호남작가인 왕개림(王開林)은 일찌기 <<호남인은 무엇으로 중국을 종횡하였는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손발을 휘저어가면서 호남인들을 추켜세웠다: "정권을 잡는데는 모택동, 나라른 다스리는데는 유소기, 전투를 하는데는 팽덕회, 극을 쓰는데는 전한, 그림을 그리는데는 제백석, 글을 쓰는데는 심종문, 작곡에는 담순(譚盾), 농업에는 원륭평...." 마지막에는 스스로 희희낙락하는 모습으로 자주 보던 말을 덧붙였다. "반부의 중국근대사는 상인(湘人, 호남사람)이 썼다"

 

왕개림선생이 예로 아주 상세하게 들었는데, 부족한 점이라면, 모, 유, 팽, 전, 제, 심은 모두 이미 사망했고, 담순은 미국인이 되었고, 원륭평은 아예 호남인이 아니라 강서인이다. 왕개림 선생이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일련의 리스트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호남인은 오르지 못했다. 다른 성의 네티즌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적 얘기냐. 옛날을 회고해서 무슨 소용이냐. 현실을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울을 쳐다봐라. 지금 자랑할 게 얼마나 남아 있는지.

 

2. 호남인의 고추 잘먹기

 

"사천사람은 매울까봐 겁내지 않고, 귀주인은 매워도 겁내지 않고, 호북인은 맵지 않을까 겁내고, 호남인은 맵지 않으면 겁낸다." 모택동이 "고추를 먹지 않으면 혁명이 없다"는 말에서 제14기 계림의 서시(書市)에는 "호남인은 고추를 잘 먹기 때문에 글도 잘쓴다"는 플랭카드가 걸렸다. 호남인들이 고추를 잘먹는다는 것이 괜히 유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추를 먹거나 혹은 고추를 먹지 않거나 이건 그냥 생활습관이다. 뭐 자랑할 것은 못된다. 만일 누군가가 술에 가득 취해서 이백이라고 떠벌인다면, 담배에 절어서 사는 것이 등소평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고추를 먹는다고 하여 허장성세를 부려서 모택동과 같은 위인이라는 분위기를 내려고 한다면, 그거야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웃지 않겠는가? 실제로 한 사람의 생활수준의 높낮이 혹은 몹값의 높낮이는 고추를 먹고 먹지 않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확실한 예가 있다: 장일일 선생은 문무의 기예를 습득한 후 제왕가에 학문을 팔아먹기 위하여, 큰 뜻을 품고 남하하여 광동으로 가서 공을 세우고자 했다. 사촌누나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사촌자형은 소문에 고추를 잘먹는 맹수라고 하였다. 맹수에게 위세를 보여서, 이후 이 어르신이 아무 거리낌없이 그의 집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탕이 나오기 전에 단숨에 5병의 "라오깐마고추기름"을 마셨다(사실은 1병반이다. 그중 반병에는 그동안 사촌누나네식구들의 침도 섞여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고추대왕이라고 불리던 사촌자형은 놀라서 반쯤 죽었다. 그후로는 한번도 자신의 고추와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장일일선생이 고추를 먹는데는 용맹함을 드러냈지만, 어쩌랴, 반달을 돌아다녀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결국 조용히 되돌아와야 했다. 이로써 볼 때 고추를 잘먹는다는 것이 대단할 것도 없다. 고추를 잘먹는다고 인생이 바뀌지도 않는다. 고추를 잘먹는 것은 그저 현지의 기후조건때문이지 무슨 자랑할만한 재주도 아니다.

 

3. 호남인은 산만하고 나태하다.

 

국경절연휴에 7,8명의 친구들과 천안문을 갔다. 검표소에서 4명은 성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원인은 4사람이 모두 슬리퍼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4사람은 모두 영준한 호남인이었다. 천안문 성루는 아주 엄숙한 곳인데, 이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타난 것이다. 두뇌가 단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호남인들의 산만함을 알아볼 수 있는 사례이다.

 

출퇴근때 입안에 빈랑을 오물거리거나, 대소변후에 손을 씻지 않는 것, 거실 쇼파에서 방약무인으로 귀를 후벼파거나 손톱, 발톱을 자르는 것, 식사후 얼마되 않아 십팔반무기를 꺼내들고 이빨을 쑤시는 것, 심지어 이빨을 다 쑤신 이쑤시개를 아주 창의적으로 응용하여 귀를 후비는 것...좋다 누구인지 묻지 말라. 분명히 호남인이다. 그래서 언젠가 성의 지도자가 의미심장하게 나중에 낙엽귀근이라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헌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장일일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결벽증이 있는데, 고향사람들이 귀후비고 이빨쑤시는 좋은 습관을 모두 바꾼 다음이라면 생각해보겠다.

 

4. 호남인은 허두팔뇌(虛頭八腦, 표리부동, 허위적)하다. 

 

장일일선생은 대학을 호남에서 다녔다. 기숙사에 같이 산 것은 거의 모두 호남촌놈들이었다. 한때 캠퍼스에서는 '처남(處男)'을 수치로 생각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적지 않은 남학생들이 여학생의 손도 못잡아봤으면서, 전세계가 자신이 서문경같은 수퍼바람둥이라는 것을 몰라줄까봐 걱정하였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대학졸업후 개략 반년간, 하루는 기연이 있어, 장일일선생이 시내버스정류장에서 한 동창이 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나가서 인사를 했다: "XX, 너도 버스를 기다리는 거냐?" 그러자 그 동창은 대경실색을 했고, 그는 이미 버스를 타보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은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 침을 튀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용왕을 꺼내어 담배 1개비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를 잡아끌면서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나는 이 친구가 반년간 못봤더니 아주 잘 나간다고 생각했다. 온 몸에 명품을 걸치고, 머리카락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이고, 34위안씩이나 하는 부용왕을 피웠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겨 그와 저녁을 먹으면서 요령을 들어보려고 하였다.

 

이자는 과연 세상물을 먹었다. 요리를 시킬 때도 비싼 것으로 골라 시키고,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자는 돈계산할 때가 되자 금기를 범한다. 카드로 긋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누가 알았으랴. 이 가게는 아주 시대를 잘 따라가서 신용카드기계를 들여놓았다. 이 자는 갑자기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돈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나보고 대신 내줄 수 없겠냐고 하였다. 나는 돈도 없으면서 34위안이나 하는 부용왕을 피우고 해산물을 이렇게 시키느냐고 말하며, 내가 돈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자는 학교에서부터 내 쇠고집을 잘 알고 있어서, 내가 장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사실 월급이 800위안이고, 부용왕은 자기의 체면을 위헤서 갖고 다닌다고 한다. 평소에는 아예 피우지도 않고, 담뱃갑 속에는 왼쪽에는 부용왕을 넣고, 오른 쪽에는 백사(白沙)를 넣고 다니면서, 상대방에게는 부용왕을 권하고, 자기가 피우는 것은 백사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놀라운 지혜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동창의 우의도 생각하고, 나도 젓가락을 몇번 대었다는 것을 생각하여, 대금을 내가 부담했다. 그 동창은 그날 밤에 헤어지면서, 나에게 아주 성의있고 애걸하듯이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동창들에게는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비로소 안심하고 소매를 펄럭이며 떠났다.

 

이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개략 작년 겨울, 이 자는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감동적으로 예전에 함께 학교에 다니던 추억을 언급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감동했고, 마치 그 피끓는 청춘시대로 되돌아간 듯했었다. 이 자는 아마 내가 적당히 감동했다고 느꼈는지, 말을 돌려서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말로는 그의 처에게 언니가 있는데, 윗동서가 차를 샀다는 것이다. 아랫동서로서 차를 사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빌리려는 거냐고 물으니 10만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마침내 말했다. "1만정도..."  다행히 장일일 선생이 세상물정을 조금은 알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때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이후, 매번 차가 막힐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혹시 이렇게 많은 차량들 중에서 혹시 나의 그 친구와 같이 허두팔뇌의 호남인이 있지는 않을까?

 

5. 호남인은 리듬이 느리다.

 

몇년전의 원단 새벽, 하늘이 막 밝으려고 할 때, 나는 친구들과 북경의 다이아몬드 전궤(錢櫃)에서 기어나왔다. 택시를 타고, 예의상 택시기사와 얘기를 나누었다: "장사 잘되나요?" 택시기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당신이 내가 12시에 교대한 후에 두번째 만난 손님이다. 그런데 무슨 장사가 잘되겠는가." 나는 뻘쭘해졌고,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런 대화는 호남에서라면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그 후에 나는 공무로 호남에 간 적이 있다. 친구들과 KTV에서 놀다가 흥이 남아서, 새벽 2시에 발안마집에 가기로 했다. 새벽 2시경인데, 4군데 발안마집을 돌아다닌 끝에야 비로소 3명자리가 남아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득불 "각도(脚都)" 호남의 밤생활이 이처럼 번성하다는데 마음 속으로부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라. 저녁에 그렇게 많은 할일없는 사람들이 가라오케, 술집, 발안마집에 모여 있는데, 도시의 리듬이 어떻게 빠를 수 있겠는가? 밤생활이 풍부하다는 것이 실제 반영하는 것은 생활과 업무의 스트레스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외에,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일 호남인과 약속을 하거나 협상을 할 때, 네가 저녁 8시에 만나고 싶으면 반드시 약속을 저녁 6시로 해야 한다. 호남인들은 늦게 오기를 즐긴다. 그리고 떠들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천하대세를 손바닥 안에 놓고 다 알고 있고, 천문지리를 모르는 것이 없다. 주제와 상관없는 말을 많이 떠들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해두지 않으면, 저녁에 일찍 집에 들어갈 생각은 버려야 한다.

 

호남인의 리듬이 느린 것에 대하여 호남작가협회 부주석인 하립위 선생이 볼 때는 하나의 미덕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경, 상해와 같은 1류대도시에 비하면, 호남인들은 생명의 원기가 충만하고, 속세의 쾌활을 지니고 있다" 지금 큰 배를 두드리며 행복을 만끽하는 하립위 선생이야 걱정이 없겠지만, 우리는 아직도 한참 각고분투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아닌가?

 

6. 호남인은 문화가 없다.

 

호남은 염제, 굴원의 영혼이 매장되어 있고, 주돈이, 왕부지와 같은 대유학자들이 출현한 바 있다. "유초유재, 어사위성(惟楚有材, 於斯爲盛)", "대강동거, 무비상수여파(大江東去, 無比湘水餘波)"라는 말은 얼마나 기세등등한가. 장일일이 감히 호남에 문화가 없다고 말하다니, 얻어터지고 싶은 건가?

 

호남인은 과거에는 문화가 있는 것처럼 보였따. 그러나 최근들어 보이는 것은 '문(文)도 문이 아니고, 무(武)도 무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추억을 빼고나면, 남은 것은 여전히 추억이다. 왕개림 선생이 절찬한 <<호남인은 무엇으로 중국을 종횡했는가>>에 살아있는 호남문인이 있는가? 역사소설을 쓰던 당호명은 일찌감치 붓을 꺾었고, 관료사회소설을 쓰던 왕약문은 점차 시들어가고 있다. 왕개림 선생의 단편산문으로는 주류에 끼어들 수가 없고, 남아있는 장일일선생의 일부 글들이 홀로 싸우고 있다. 고여있는 썩은 물의 중국문단, 호남문단에서 멋진 문화가 떠돌지 않는 것은 한때 흥성했던 호남문화에 크나큰 불행과 비애이다.

 

7. 호남인의 집안싸움

 

"중국이 망했다고 하려면, 호남인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 상군(湘軍)은 싸움을 잘하였으며, 모택동도 대명이 자자하다. 그러나, 최근들어, 호남인들의 이러한 재주는 '치국평천하'에 쏟지 않고, '집안싸움'에 쏟고 있다. 우리의 경애하는 호남작가협회 부주석 왕개림선생은 또 다른 작가협회 부주석 하립위선생으로부터 얻어맞았다. 이는 호남인의 집안싸움특징을 가장 잘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시 좌종당부터 여러 사람을 보면 호남인들은 거의 대부분 "담장안에서 꽃을 피우고, 담장 밖으로 향을 내뿜는(다른 성에 가서 이름을 떨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크게 성공을 거둔 호남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호남본토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연유를 깊이 따져볼 필요도 없다. 뻔한 일이다.

 

8. 호남인은 마음이 좁다

 

왕개림선생의 '영사(影射)"에 관련된 글로 수십명의 유명한 호남인들이 마주앉아 결국은 주먹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보고 마음이 좁다고 하지 않으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하면, 호남의 고향사람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실험을 한번 해보자. 장일일 선생의 이 글을 다 읽은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를 '호남인의 추악화'에 앞장서는 인물로 보고 나를 불공대천의 원수로 보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부끄럼없는 호남인의 걸출한 대표이다. 만일 이 장일일 선생의 대작을 읽고도 화를 내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는다면, 심지어 내가 실사구시적이고 어느 정도 유머감각이 있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이런 유형에 속하지 않고, 우리 호남인들이 바로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