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자안태후(慈安太后, 1837-1881)는 뉴고록씨(鈕鈷錄氏). 만주 상황기(鑲黃旗)출신. 부친인 목양아(穆揚阿)는 일찌기 광서우강도(廣西右江道)를 역임함. 함풍2년(1852년)에 뉴고록씨는 정빈(貞嬪)이 됨. 나중에 정귀비(貞貴妃)로 품계가 오름. 그녀는 정숙하고 행동거지가 단아하며, 말은 더듬과 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후궁중에서 총애를 다투지 않아, 함풍황제가 좋아했다. 그리고 함풍황제는 그녀를 황후에 앉힌다.
1861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을 침입한다. 함풍제는 여러 비빈을 데리고 황급히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간다. 함풍제는 원래 몸이 좋지 않았는데, 놀란 와중에 황급히 도망하느라고, 승덕(피서산장)에 도착하자마자 병으로 누웠다. 황제가 병으로 쓰러지자, 혁흔(奕訢)을 제외한 왕공대신들이 모두 열하에서 황제의 곁을 지켰다. 7월이 되자, 함풍제의 병세가 악화된다. 황급히 친왕인 재원, 단화, 숙순, 경수, 목음, 광원, 두한, 초우영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한다.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재순(載淳)이 이제 겨우 만6세였으므로, 함풍제는 어쩔 수 없이 순치제가 고명대신을 임명한 것을 본떠서 8명의 고명대신을 임명하서, '일체의 정무를 찬양(贊襄)하도록 하였다. 후사를 안배한 후 얼마지나지 않아 함풍제는 세상을 뜬다. 함풍제가 죽은 후, 나이 갓 6살된 재순이 황제에 오르니, 연호를 기상(祺祥)으로 한다. 그리고 만25세된 함풍황후 뉴고록씨를 자안황태후로 하고, 생모인 예허나라씨를 자희황태후로 한다. 이들이 세상사람들이 동태후, 서태후로 부르는 여인들이다.
함풍제는 서거전에 팔대신이 황제위를 찬탈할 것도 걱정하고, 서태후가 정권을 독점하는 것도 우려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팔대신으로 하여금 정무를 '찬양'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황태후의 수중에 '주비(朱批, 황제가 최종결재할 때는 빨간색으로 씀)'의 어새(御璽, 황제도장)를 맡겨 팔대신을 견제할 수 있도록 했다. 함풍제가 살아있을 때, 자희의 마음이 악독하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친아들이 황제에 오르게 되면, 정권을 농단할 것이 우려되었다. 팔대신의 우두머리인 숙순은 극력 함풍제로 하여금 한무제가 구익부인(鈎弋夫人)을 죽여버린 예를 본받아 예허나라씨를 죽임으로써 후궁의 정치간여를 막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함풍제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어서, 차마 손을 쓰지 못한다. 그리하여, 함풍제가 죽은 후, 자희태후는 정무를 보좌하는 팔대신에게 불만이 많았다. 대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자희태후는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 혁흔과 연합하여 궁중정변을 일으킨다. 조상의 법도에 따라, 함풍제가 죽은 후, 당연히 함풍제의 친동생인 혁흔이 보정대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함풍제는 혁흔에 대하여 거리낌이 있었으므로, 혁흔을 보정대신에서 배제해버린다. 그리하여 혁흔도 팔대신에 불만이 많았다. 자희태후는 자기의 심복인 태감 안득해를 몰래 북경으로 보내어 공친왕 혁흔으로 하여금 장례식전에 승덕으로 핑계를 대서 오게 한다. 그후 자희태후는 혁흔과 모의하여 궁중정변을 일으킨다.
팔대신이 정사를 처리하지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다, 어사인 동원순이 돌연 상소를 올린다. 두 황태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순등이 이를 물리쳤다. 자희태후는 팔대신이 동원순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틈을 타서, 동태후인 자안태후에게 이친왕등 팔대신이 정권을 독단하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하니, 마치 황제위를 빼앗으려는 것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황태후는 서로 협력해서 조치를 취해서 수렴청정을 할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말한다. 동태후는 원래 수렴청정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이렇게 말하자 사태가 정말 급박한 줄 알고, 팔대신을 제거하는 의지(懿旨)에 동의한다. 서태후는 의지를 얻은 후, 북경의 혁흔과 연합한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팔대신을 체포해버리게 된다. �고 서태후와 동태후가 수렴청정을 한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연호도 기상에서 동치(同治)로 변경한다. 서태후는 비록 황제의 생모이지만, 자안이 황후였으므로, 지위에 있어서는 서태후보다 높았다. 비록 동태후가 성격이 온화하여, 정사에 거의 간여하지 않아서, 조정의 대권은 서태후의 손에 쥐어져 있었찌만, 이런 지위상의 차이는 그녀의 이후 운명에 은환이 된다.
1881년 4월 8일, 몸이 괜찮았던 자안태후가 돌연 궁중에서 급사한다. 나이는 겨우 45살이었다. 동태후인 자안태후는 너무 급작스럽게 죽었고, 죽기전에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궁중의 정사에서도 동태후의 죽음에 대하여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동태후가 죽은지 얼마지나지 않아, 세상에는 말들이 많았다. 동태후의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이 나타난다.
하나의 주장은 동태후가 서태후에게 화가나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청패류초>>에 따르면, 기상정변후, 서태후와 동태후는 공동으로 수렴청정을 했고, 조정대권을 장악했다. 동태후는 성격이 온화하고, 정사에 대하여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은 실제로 서태후 한 사람이 통제했다. 다만 딱 한번, 서태후가 돌연 병이 들어, 정사를 처리할 수 없게 되자, 동태후는 서태후를 대신해서 혼자서 조정의 사무를 처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동태후가 이를 기화로 자신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심하게 말을 했고, 서태후는 화가나서 비연호를 삼키고 자진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은 서태후가 동태후를 독살했다는 설이다. 이 설에도 세 가지 판본이 있다. 한 판본은 운육정(惲毓鼎)의 <<숭릉전신록>>이다. 여기서는 함풍제가 열하에서 죽기 전에, 서태후가 간악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나 나중에 아들을 내세워 나쁜 짓을 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황후인 동태후에게 밀서를 내린다: "효정태후에게 내림: 의귀비(서태후의 당시 봉호)는 아들로 인하여 부득이 태후로 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됨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그대가 알아서 단독으로 처결하라. 분수를 지키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 은혜를 베풀고; 만일 행동이 어긋나면 그대가 신하들을 불러몽서, 짐의 이 글을 보여주고, 즉석에서 주살하여, 후환을 없애라. " 동태후는 서태후와 수렴청정을 한 후에, 잘 지낸 편이었다. 1881년의 어느 날,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함풍제의 말년의 일을 얘기하자다, 동태후가 서태후에게 그 밀지를 보여준다. 서태후는 깜짝 놀라서, 마음이 넓은 동태후에게 그 밀지를 불태우도록 종용한다.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동태후는 연못가에서 금붕어를 보고 있는데, 돌연, 서태후의 곁에 있는 태감인 이연영이 점심을 가져왔다: '이 점심은 서태후께서 맛있다고 생각해서, 혼자서 드실 수 없다고, 동태후께 보내드린 것이오니 맛을 보시지요'라고 한다. 동태후는 듣고는 기뻐서 그 자리에서 한 조각을 맛본다. 그런데, 그날 밤에 동태후는 세상을 떠난다. 이는 동태후가 군기대신들을 접견한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동태후가 죽은 후, 제도에 따르지 않고, 먼저 군기대신을 부르고, 다시 어의를 불러서 약방을 내게 했다. 그리고 군기대신이 약을 검사했다. 그리고 동태후의 가족들이 궁에 들어가서 시신을 볼 수가 없었다. 급사한 후 바로 시신을 수습해서 입관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서태후가 보낸 점심에 독이 들어있다고 생각했고, 동태후를 독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막을 눈치챌까봐 사후에 이상하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독살설의 두번째 판본은 동태후가 서태후의 심복이 안덕해를 죽였고, 서태후가 경극배우와 사통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동태후를 죽여서 사실을 은폐하려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청궁쇄문>>등 야사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서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안덕해가 서태후의 옷을 만들기 위하여 북경을 나갔다. 청나라궁중의 법도에 다르면, 태감은 경성을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안덕해는 서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으므로, 거리낌없이 경성을 벗어났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요란을 떨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산동순무인 정보정이 이 소식을 들은 후에 황급히 동태후 자안과 공친왕 혁흔에게 글을 올린다. 동태후는 이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이 노비가 이처럼 경거망동을 하다니, 국법에 따라 처치하라" 그리고 동치제로 하여금 안덕해를 참하도록 명을 내리게 한다. 서태후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동태후에게 원한을 갖게 된다. 여기에 광서제가 즉위한 후, 동태후와 가까이 지내므로, 더더욱 서태후가 미워하게 되었다.
서태후는 경극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자주 당시의 유명 배우를 불러서 공연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서태후가 그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궁중에 남게 하여 밤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동태후가 서태후의 궁을 찾아갔는데, 돌연 한 배우가 서태후의 침상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동태후는 이를 보고 대노하여 즉석에서 그 배우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선황이 남긴 "만일 서태후가 아들을 끼고 교만하고 불법한 일을 저지르면, 조종의 가법에 따라 죽여도 좋다"는 조서를 내놓고 서태후를 폐위시키고자 한다. 서태후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동태후는 서태후를 용서한다. 그러나, 서태후는 계속 불안했다. 동태후가 언젠가 자기에게 불리한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궁녀를 시켜 동태후에게 점심을 보내고, 동태후는 점심을 먹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어의를 부를 시간조차 없었다.
이외에, 청나라때 문정식의 <<문첨우기>>에는 "광서8년봄, 유리창에 백(白)씨성의 골동품상이 있었다. 이연영을 통하여 서태후를 알게 된다. 당시 서태후는 46세였다. 백모는 궁안에서 1개월여를 머물다가 나온다. 오래지 않아, 서태후가 임신한다. 동태후가 이를 알고 대노한다. 예부대신을 불러서 서태후의 폐위문제를 논의한다. 그런데, 그날 밤에 동태후가 궁안에서 급사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서태후는 동태후가 자신을 폐위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먼저 손을 써서 그녀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 판본의 여러가지 주장은 모두 민간의 야사나 필기에 기록된 것이다. 관방의 정사에서는 다르다. 주수명의 <<광서조동화록>>에 따르면, 동태후는 확실히 병사했다. 이 책에는 광서7년 3월 10일에 동태후가 병이 든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초아흐레, 동태후가 몸이 좋지 않아, 약을 지어서 바쳤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10일 병세가 악화ㅚ었고, 가래가 기도를 막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술시에 사망하였다" 동시에 <<옹동화일기>>에도 동태후가 병이 난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광서 7년 1월에 병이 났는데, 병세가 심하고, 정신이 혼미했으며, 입을 꽉 다물고, 가래가 기도를 막았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가들은 동태후는 아마도 현재의 뇌혈전과 같은 유형의 질병을 앓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이 유형의 질병은 통상적으로 발병이 빠르다. 당시의 의료조건하에서 의사들이 원인을 찾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종 추측을 낳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뇌혈관질병이 발병하면 얼굴색이 검어지고, 입으로 거품이 나오는등 중독된 것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더더욱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샀을 수도 있다.
동태후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여러가지의 주장이 있다는 것은, 주로 세상사람들이 서태후를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태후가 이렇게 급히 죽지 않았더라도, 세상사람들은 서태후에게 이런 저런 죄명을 덮어씌웠을 것이다. 후세인들이 당시의 상황을 알 수는 없는 것이고, 모든 주장은 그저 일부 자료에 근거한 추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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