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재(木梓)
역사를 되돌아보면, 당당한 명분이나 이익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때문에 진실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서는 안된다. 인정세고(人情世故)같은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류사회의 진보는 아마도 장기적으로 보면 필연적인 규율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면,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반대로 혼란스러워 보이고, 맥락을 잡기 어렵다. 이러하게 되는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그중의 하나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정'이다. 많은 일들이 인정의 앞에서는 왕왕 꺽이곤 한다. 황제도 실은 사람이다. 신격화되었을 뿐이다. 그도 육욕칠정이 있고, 보통사람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서 일반인들이 접촉, 교류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다만 두 종류의 사람은 달랐다. 그들은 황제와 접촉하여 감정을 쌓을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바로 생리적인 결함을 지닌 환관과 황제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여성, 즉 유모였다.
고대인들은 황제가 유모의 손에 자란다고 말해왔다. 유모는 황제의 유년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즉위후의 황제는 유모에 대한 예우를 후하게 갖추었다. 명희종 주유교(朱由校)가 등극한지 반달정도 지난 후, 유모인 객씨(客氏)를 봉성부인(奉聖夫人)으로 하였고, 그녀의 아들은 금의천호(錦衣千戶)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그 이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한때, 안제는 유모인 왕성을 "야왕군"에 봉하였다; 순제는 유모인 송씨를 "산양군"에 봉하였다; 영제는 유모인 조요를 "평씨군"에 봉하였다; 북위때 태무제는 생모가 어려서 죽자, 유모인 두씨를 "보태후(保太后)"로 모셨다; 이어서 문성제도 유모인 상씨를 "보태후"로 모셨으며, 다음 해에는 다시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당중종은 유모 간씨를 "평은군부인"으로 하고, 유모 고씨는 "국부인"으로 하였다; 당예종은 아들(당현종)의 유모인 장씨를 "오국부인"으로 하고, 막씨는 "연국부인"으로 하였다; 원나라때, 원세조 쿠빌라이는 황자 연왕의 유모인 조씨를 "빈국부인"으로 삼았고, 유모의 남편인 공성록은 "성육공"으로 삼았다; 원문종은 유모의 남편을 "영도왕"으로 삼았다; 원성종은 유모의 남편을 "수국공"으로 삼았다; 원인종은 유모의 남편인 양성영을 "원국공"으로 삼았다; 원영종은 유모인 후두타이를 "정양군부인"으로 삼았고, 그녀의 남편인 아라이를 "정양군왕"에 봉했다; 명성조는 유모인 풍씨를 "보중현순부인"으로 삼았다; 명인종은 유모를 "익성공혜부인"으로 하였다; 명선종은 유모 이씨를 "봉상부인"으로 하였다.
황제와 유모의 감정연결을 끊기가 어려웠다. 유모의 영향력은 이런 젖을 먹은 아들이 은혜를 생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그리하여, 황제에 접근하려는 자들에게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유모는 황제의 총애를 믿고 교만을 부리고 불법적인 일들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역대에 여러 사례가 있다. 서한때 한무제의 유모는 궁외에서 범법을 저질러서, 한무제가 법에 따라 처리하고자 했다. 유모는 동방삭에게 가서 도움을 구하자, 동방삭은 이렇게 말한다: "황제가 너를 내보내면서,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말할 때, 너는 말을 하지 말라. 그저 떠날 때 두 세 번 되돌아서 황제를 보기만 해라. 이렇게 하면 아마도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모는 동방삭의 조언대로 했다. 한무제의 곁에 있던 동방삭이 소리쳤다: "뭘 뒤돌아 보는 것이냐? 지금 황제가 아직도 네 젖을 먹고 싶어할 것같으냐?" 그 말을 듣고 한무제는 유모에게 안겨서 젖을 먹던 정이 되살아나서, 그녀의 죄를 사면해준다.
한안제때, 유모인 왕성 모녀와 환관인 강경, 이윤등이 결탁하여, 태후를 비방하고, 태후의 가족을 공격하며, 내외에 선동하며, 하고 싶은대로 하여, 일찌기 재상인 양진을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핍박하기도 했다. 나중에 태자까지도 폐위해버린다. 동한의 영제의 유모인 조요는 총애를 믿고 교만하여, 환관 증절, 왕보와 원한이 있었는데, 함정을 파서 증절, 왕보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로써 볼 때 유모들이 얼마나 발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명희종의 생모는 어려서 죽었다. 양육을 책임졌던 이선시(李選侍)도 궁을 나갔다. 마침 건청궁에서의 황제의 일상생활을 유모가 돌보아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존호를 올리고 "봉성"이라는 명칭을 내린 것은 이해할 만하고, 인지상정이다. 이리하여, 객씨는 스스로 황상의 팔모(八母)중 하나로 자처하기 시작한다. 명광종의 황후 곽씨, 명희종의 생모인 왕재인, 그리고 명사종의 생모인 유숙녀는 이후에 모두 태후가 된다. 그러니, 이 세 사람은 희종에게 있어서 이미 돌아가신 "삼모(三母)"이다. 살아있는 동리(東李), 서리(西李), 그리고 조선시(趙選侍)도 역시 "삼모(三母)"이다. 여기에 다시 "구귀인(舊貴人)"도 '일모(一母)'에 들어가니, 모두 합하면 "칠모(七母)"이다. 여기에 유모 객씨를 합하면 모두 "팔모"가 되는 것이다.
명나라때,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궁내(宮內), 여비(女婢), 유모등은 모두 서이소(西二所)에 거주해야 한다. 다만 객씨는 파격적으로 함안궁(咸安宮)에 거주하도록 해준다. 매일 아침 건청궁으로 와서 황제의 일상생활을 돌보아준다. 그녀가 해주는 음식을 "노태가선(老太家膳)"이라고 불렀다. 원래 명희종은 어선방에서 만든 음식에 대하여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객씨가 해주는 음식을 좋아했다. 특히, 객씨가 해주는 조개, 제비집, 샥스핀, 새우등 십여가지 해산물을 한꺼번에 넣고 끓여주는 요리를 좋아했다.
객씨는 언제든지 명희종의 곁에서, 함께 꽃과 달을 구경하며 즐거워했다. 객씨의 생일에는 명희종이 반드시 챙겨주었다. 명희종은 객씨에게 "인삼 한포대, 무게 약 2,30근을 내린 적도 있었다. 객씨가 여름에 더위를 타자 함안궁에 시원한 차양을 만들게 하고 계속 얼음을 하사해 주었다. 천계원년 여름에는 명희종이 특지를 내려, 객씨가 언제든지 출궁하여 사가를 찾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때의 그녀는 이미 영화부귀를 다 누리고 있었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였다. 객씨는 궁중에서, 매일 화장을 하고, 작은 가마를 타고 다녔으니, 비빈들과 마찬가지였다. 매번 출궁하여 사가(북경 서성구 풍성후통)로 돌아갈 때면 호송하는 호위들만 수백명이었고, 궁중의 내시들이 무릎을 꿇고 배웅했다. 출궁후에는 여덟명이 드는 가마를 탔고, 거리에는 소리치며 다른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막았다. 궁으로 돌아올 때는 앞에 8명의 태감이 서서, 홍사등으로 인도하니, 멀리서 보면 황상의 행차처럼 보였다. 의장으 뒤에는 네덜란드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이미 중국과 교류가 있어서, 등 백개를 선물했던 것이다. 명희종은 객씨에게 그 중 스무개를 하사하고, 밤에 궁중을 드나들 때 쓰도록 해준다. 누런 비단을 깔고 등을 비추면 마치 대낮과도 같았다. 마지막에는 온갖 장식을 한 봉련(鳳輦)이 있고, 봉련의 위에는 객씨가 앉아 있다. 정말 위엄이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당시 조정의 대소신료와 왕공대신은 거의가 객씨의 일당이었다. 그들은 매일 입조하고나서 멀리 등불빛이 찬란한 것이 유성처럼 움직이면, 바로 객씨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모두 어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객씨의 가마와의 거리가 10여보가 되면, 사람들은 우루루 무릎을 꿇었다. 어떤 사람은 태부인(太夫人)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성모낭낭(聖母娘娘)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성태태(聖太太)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천세(千歲)를 세번 외치고, 어떤 사람은 누나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양모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의모라고 불렀다. 입안으로 이렇게 부르면서, 몸은 개처럼 엎드리는 것이다. 마치 황상의 행차를 맞이하는 것과 같았다. 명희종이 어좌에 오르면, 곁에는 하나의 봉좌(鳳座)를 놓았는데, 바로 객씨가 앉는 자리이다. 명희종이 퇴조할 때, 객씨도 난연(鸞輦)을 따라 회궁했다.
명희종이 객씨를 총애하여, 궁중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조리 객씨에게 처리하게 하였따.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집안 노비들이 그녀를 "구천세태태(九千歲太太)"라고 불렀다. 매일 그녀에게 세번 문안인사를 하는데 그 때마다 "노태태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치게 하였다. 명희종의 여덟 어미중에서 죽은 자이건 살은 자이건 모두 유모인 객씨만 못했다. 정말 천고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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