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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대진국(大秦國)이 로마제국인가?

by 중은우시 2008. 7. 16.

 

 

글: 김우비(金宇飛) 발췌 

 

중국의 고대문헌을 보면, "대진국(大秦國)"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통상적으로는 대진국을 로마제국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에 대하여는 의문이 있다.

 

서역의 대진국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서 처음 나타나고, 이후 <<진서>>, <<위서>>, <<북사>>등에도 나타난다.

 

<<후한서. 서역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진국(大秦國)은 리건(犁?)이라고도 하는데, 해서(海西)에 있어, 해서국이라고도 한다. 지방은 수천리이고, 400여성이 있다. 소국으로 예속된 곳이 수십곳이다. 돌로 성곽을 만든다...."  <<진서. 사이전>>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서. 서역전>>, <<북사. 서역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진국은 일명 려헌(黎軒)이라고도 하는데, 도읍은 안도성(安都城)이다. 조지(條支)에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곡선으로 1만리이다, 거현에서 3만구천4백리가 떨어져 있다...."

 

<<후한서>>로부터, <<진서>>, <<위서>>, <<북서>>에 이르기까지 서역대진국의 묘사는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이를 보면, 동한때로부터 북조에 이르는 5,600년간은 서역에 대진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구당서>>에 들어서면서 내용은 약간 변화한다.

 

<<구당서. 서융전>>에는 : "불름국(拂?國), 일명 대진(大秦). 서해의 위에 있고, 동남으로 페르시아와 접해 있다. 지방은 만여리로, 성이 4백이며..."

 

<<신당서. 서역전>>에는 : "불름, 고대진(古大秦)이다. 서해상에 있어, 해서국이라고도 한다. 경사에서 4만리 떨어져 있다. 점서(?西)에 있고, 북으로 돌궐 가살부에 직접 연결되고 서로는 바다에 연해있으며 지산성이 있다. 동남으로 페르시아와 접해 있다. 지방은 만리이고 성이 사백이며, 병사가 백만이다..."

 

<<송사. 외국전6>>에는: "불름국은 동남으로 멸력사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에 이르며, 모두 40정(程)이다. 서로는 바다까지 30정이다. 동으로는 서대식(西大食) 및 우전, 회흘, 청당에서 중국에 이른다. 역대에 조공을 바친바 없다..."

 

<<명사. 외국전7>>에는: "불름, 즉 한나라때 대진이다. 환제때 중국과 통하기 시작했다. 진나라 및 위나라는 모두 대진이라 불렀고, 조공을 바치러 왔었다. 당나라때는 불름이라 불렀고, 송나라도 마찬가지로 물렀다. 역시 여러번 조공을 바치러 왔다. 그런데, <<송사>>에서는 역대에 조공을 바친 바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대진이 아닌 것으로 의심스럽다. 만력대 대서양인이 경사로 와서 말하기를 천주 예수가 여덕아에서 태어났는데 바로 고대의 대진국이라고 한다..."

 

역대의 사학자들은 신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불름이 바로 옛 대진국이라고 인식하고, 불름은 통상적으로 동로마 비잔틴제국으로 인식하였으므로, 이를 합쳐서 고로마로 통칭했었다. <<명사>>에는 이를 더욱 확실히 하여 "불름은 한나라때의 대진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천주 예수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였는데,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지역은 역시 로마제국 시리아행성의 일부분이고, 역시 동로마제국의 강역범위에 들어가므로, 천년이상 로마제국의 땅이었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중국사적에 나타나는 서역 대진국은 중외학자들에 의하여 로마제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결론은 지금까지도 사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져 있다.

 

이외에 1623년에는 섬서성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발견되어, 더더욱 유럽학자들은 대진이 바로 로마제국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진국이 바로 로마제국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로 굳어지는 것같지만, 여전히 그 속에는 풀리지 않은 의문도 남아 있다.

 

첫째, 명칭의 수수께끼.

 

대진이 고로마라면, 고로마를 왜 대진이라고 불렀을까? 이것은 대진이 고로마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온 주제이다. 연구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국사적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언어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위서. 서역전>>과 <<북사. 서역전>>에는 "대진국....그 사람들이 단정하고 장대하며, 의복, 마차깃발이 중국과 비슷하여, 외역에서는 대진이라고 불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중국역사대사전>>에서는 이렇게 고로마가 대진으로 불린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인들은 중국을 습관적으로 진(秦)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국세가 강성하고, 문물제도가 중국에 비견할만하다고 하여 그를 대진(大秦)으로 불렀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해가 되는가? 당초 한무제가 파견한 장건이 서역으로 갔을 때는 이미 기원전139년전후이다. <<사기>>에는 '대진'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당시는 이미 한나라였다. 진나라(기원전221년-기원전206년)는 연대, 강역, 인구, 종합실력(경제군사)에서 모두 양한(기원전202년-기원후220년)과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진나라의 강역이 하서주랑에까지 미쳤는지에 대하여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즉, 서역과 직접 접경하였는지). 그런데, 어떻게 당시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사람들이 중국을 '진'이라고 부르겠는가? 특히 장건이 사신으로 서역에 갔을 때는 그 사람들이 중국사람을 '진나라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당시라고 하면 진한시기인데 북아시아의 대부분은 흉노가 장악하고 있었다. 흉노는 계속 한나라와 싸우기도 하고 교류도 하여 양자의 관계가 밀접한 편이었다. 진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흉노도 중국을 당시 '한'이라고 불렀고, 중국사람을 '한인'이라고 불렀다. 중국역대사적에서도 외국인들이 중국을 '진'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진'을 외국으로 부른 기록은 있다(예를 들면 서역의 대진국). 하물며 서역인들이 동쪽에 있는 중국은 '진'이라고 부르고, 서쪽에 있는 로마제국은 '대진'이라고 똑같이 부른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적지 않은 학자들은 고대언어에서 '대진'명칭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가설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Edkins는 중국인들은 아마도 로마인들이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성공을 신속히 거두었고, 주위의 국가를 정복하였으므로 그들을 진나라와 비교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 전도된 불교도들이 로마를 대진으로 불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명칭은 대체로 반초가 중앙아시아(아프간)와 인도에서 유행하던 모종 언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본다: 등전풍팔(藤田豊八)은 고대 안식인(파르티아)들은 로마와 그 동방영토를 Dasina(뜻은 왼쪽이라는 것. 왼쪽은 서쪽을 가리킴)라고 불렀는데, Dasina에서 a를 빼면 Dasin이 되고, 대진(大秦, Daqin)은 바로 Dasin의 음역이라고 본다; 잠중면(岑仲勉)은 '대진'은 '서방(西方)'의 음역이라는 것이 의문이 없다고 말한다; 백조고길(白鳥庫吉)은 등전의 주장을 극력 부정한다. 그는 안식인 혹은 아랍인들이 로마제국을 Dasina라고 불렀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라때의 중국인들이 세상의 다른 나라가 중국보다 뛰어나다고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서쪽 끝에 아주 강한 나라가 있는데 중국과 비슷하게 강하다는 말을 듣고는 분명히 중국의 후예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이미 '한'이라고 자칭하던 한나라사람들은 '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고 한다; 장서산(張緖山)은 고증을 통하여 다른 중국고적들을 살펴본 후에, 중국고적에서의 의미는 '대진'이 '먼 곳의 강력한 국가'라는 의미였다고 보았다.

 

그런데, <<위서.서역전>>과 <<북사.서역전>>을 보면, 대진국이 '의식이 중국과 비슷하여 외국에서 대진으로 불렀다"고 되어 있어서, 대진이라는 명칭을 중국사람들이 붙인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다. 물론 대진이라는 이름은 중국과 관련은 있다. 그리하여, 고대언어에서 대진명칭의 기원을 찾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 아닐 수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여허한 고로마의 역사나 세계사에서도 고로마가 스스로 자신을 '진'으로 부르거나, 다른 사람들이 '진'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로마의 어느 속국이나 속지도 스스로 '진'이라 부르거나, 남들이 '진'이라 부른 곳이 없다. 바?로 고로마인들은 외국을 '진'이라고 부른 기록은 있다.

 

1세기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홍해,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일주한 그리스인은 <<에르투리아항해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나라(金州)의 뒤에는 바다가 연이어져 진(Thin)의 어느 지방까지 이어진다. 진의 내륙북부 모처에는 친나이(秦奈)라는 큰 성이 있는데, 생사(生絲), 생선(生線)과 기타 사직품(絲織品)을 육로로 운송한다. 파크트리아를 지나 포루가차에 이른다. 또한편으로 항하의 수로를 따라 리무리에 이른다. 그러나, 진나라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그곳에서 오는 사람은 아주 적다" 장서산은 이곳에서 말하는 진(Thin)나라는 바로 중국이라고 본다. 이 칭호는 인도가 중국을 부르는 칭호인 Cina, Cinastan과 일치하며, 현재 중국의 서남부(운남)와 버마북부의 접경지역을 가리킨다.

 

고대로마의 문헌에 '진'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은 기괴하다. 스스로 '진'이라고 칭한 적이 없는 고로마사람들은 동쪽에 '진'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원전2세기이후 다시는 '진'이라고 자칭하지 않은 중국인들은 역사서에서 서역에 '대진국'이 있다고 적었다. 지금도 고로마문헌에 나오는 '진'은 중국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사적에서의 '대진국'은 고로마로 해석하고 있다. 두개의 서로 자신은 '진'이라고 칭하지 않는 대국인 고로마와 고중국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서로 상대방을 '대진' 혹은 '진'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희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인종의 수수께끼

 

<<후한서. 서역전>>에는 대진국 사람들이 장대평정(長大平正)하며, 중국인과 비슷하다고 적고 있다. <<진서. 사이전>>에서도 대진국사람들은 장대하여 중국인과 모습이 비슷하다고 적고 있다. <<위서.서역전>>과 <<북서.서역전>>은 사람됨이 단정 장대하며, 의복, 차기가 중국과 비슷하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마치 대진국은 중국과 같은 인종으로 보인다.

 

중국의 역대사적에서 서역인들의 용모특징은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예를 들면, <<사기. 대완열전>>에서는 "대완의 서쪽은 사람들이 모두 눈이 깊고, 수염이 많다", <<한서. 서역전>>에는 "대완의 서쪽에서 안식국?..사람들은 눈이 깊고, 수염이 많다", <<위서, 서역전>>에는 "고창의 서쪽에 있는 여러 나라의 사람은 눈이 깊고 코가 높다.."등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진국 사람들이 중국사람과 비슷하다'는 기록은 비록 대완의 서쪽에 있지만, 눈이 깊고 수염이 많고 코가 큰 특징을 가진 인종이 아니라 중국인과 비슷하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진서.사이전>>에는 서역의 외국으로 3곳을 드는데, 대완국(大宛國), 강거국(康居國), 대진국이다. 대완국에 대하여는 '눈이 깊고 수염이 많다', 강거국에 대하여는 '대완국과 비슷하다' 그리고 대진국에 대하여는 '중국과 비슷하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특별히 대진국의 사람들의 용모가 서역사람과는 다르고 중국사람과 유사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대진국의 인종에 관한 이슈에 대하여 대진을 고로마로 보는 학자들은 아예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오직, 백조고길만이 약간 추측성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한나라때 중국인들이 세상에서 다른 나라들 중에서 중국보다 뛰어난 나라는 없다고 보아서, 나중에 서쪽에 큰 나라가 있는데 중국과 비길만하다는 말을 듣고는 이들을 '대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당시 중국인들은 세계의 동쪽에는 봉래,방장,영주의 신선이 사는 산이 있고, 서쪽 끝에는 서왕모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대진국이 서왕모가 있는 곳에 가깝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은 반드시 '장대평정'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고, 이 사람들이 진나라의 후예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진'이라고 한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키가 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백조고길의 의견에 대하여 대다수의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사서의 기록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대진국의 인종은 중국인과 같은가 아닌가 이것도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셋째, 산업의 수수께끼

 

<<후한서. 서역전>>에는 대진국의 사람들은 습속이 밭을 힘으로 갈고, 양잠과 뽕나무를 심는다고 하고 있다. <<위서. 서역전>>과 <<북사. 서역전>>에도 대진국은 "토지가 오곡, 뽕나무, 마에 적합하고, 사람들은 벌레(양잠)와 밭에 힘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대진국은 양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대진국의 주요 산업중의 하나가 양잠이었다.

 

대진국이 동한시기부터 양잠을 하였다면, 그리고 대진의 주요경제산업이었다면, 도대체 이 대진국이 로마제국이 될 수 있는가? 로마제국은 본토는 물론이고, 속지(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서도 양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기나 한 것인가?

 

허드슨의 <<유럽과 중국>>의 제4장 "훔쳐온 누에"라는 곳을 보면 로마제국이 양잠기술을 획득하게 된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프로카피오스에 따르면, 인도에서온 몇몇 승려가 차스티니가 비단무역에서 곤란을 겪고 있고, 중간상의 착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이 궁중으로 와서 누에알을 제국으로 훔쳐와서 부화시켜 로마에서 비단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말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오랫동안 인도에 있는 여러 나라들 중에서 Serinda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들은 양잠기술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하였다. 황제가 보수를 두둑히 주겠다고 약속하자, 이들은 인도로 돌아가서 누에알을 훔쳐왔고, 부화에 성공했다. 그리하고 누에를 뽕잎위에 놓고 길렀다. 오파니스는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약간 다르게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누에알을 훔쳐온 것은 페르시아인이며, 누에알은 사국인(絲國人)의 국가에서 훔쳐온 것이고 비어있는 막대기 속, 개략 대나무 속에 숨겨서 가져왔다"

 

스타프리아노스는 <<세계통사>>라는 책에서, 로마제국은 개략 6세기중엽(비잔틴제국시기)에 양잠기술을 습득했다고 한다.

 

대진국이 양잠을 주업으로 했다는 기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도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넷째, 풍속의 수수께끼

 

<<진서. 사이전>>은 대진국은 문자가 호(胡)를 익혔고, 백색으로 덮은 작은 차가 있고, 우역제도가 있다. 모습은 중국인이 호복(胡服)을 입은 것같다고 한다. 대진국은 문자와 의복이 호(胡)를 닮았다는 것이다. <<진서. 사이전>>에서 흉노등 북방민족을 "호"라고 부르므로 흉노등 북방민족의 풍속을 한인들은 합쳐서 '호속(胡俗)'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진국의 풍속에 대하여 논의하는 학자들도 드물다.

 

<<사기. 대완열전>>에 따르면, 서역의 풍속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흉노와 같은 풍속으로 오손, 강거, 엄채, 대월지등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흉노와 다른 풍속으로 대완, 대하, 안식등의 나라이다.

 

그런데, <<위지. 서역전>>과 <<북사. 서역전>>에서는 대진국의 의복, 차기가 중국과 비슷하다고 적었는데, 이 부분은 진서의 내용과 모순된다. 그런데, 위서, 북서는 모두 선비족이 주류인 국가에 대한 기록이고, 선비족은 기본적으로 흉노와 같은 북방민족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자신들과 같다고 기록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한족이 주체인 <<진서. 사이전>>에서 '호속'이라는 것은 결국 흉노의 풍속 내지는 북방민족의 풍속이라는 것으로 이해되고, 위지와 북사에서 중국의 풍속이라는 것도 결국은 북방민족의 풍속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진국의 풍속은 로마의 풍속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다. 이것도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다섯째, 종교의 수수께끼

 

1623년에 중국의 섬서성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발견되었고, 이것은 대진이 로마제국이라는 중요한 물증이 되었다.

 

경교(景敎)가 무엇인가? 이는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를 일컫는다. 네스토리우스파는 기독교의 일파로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기원한다. 처음에는 431년과 451년의 두번에 걸친 종교회의에서 교의에 대하여 질책을 받고는 로마정교회에서 분리하여 별도의 파를 이룬다. 네스토리우스파는 동로마제국황제에 의하여 '이단'으로 낙인찍힌다. 네스토리우스는 유배된다. 신도들은 페르시아로 도망쳐서 페르시아황제의 지지를 받아 5게기말에 독립교회를 세운다. 당태종 정관9년(635년)에 기독교 시리라교회의 전도사 아로본은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다. 이때부터 장안(서안)에 교회를 세운다. 사원은 처음에는 '파사사(波斯寺)'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대진사(大秦寺)'로 불린다. 덕종 건중2년(781년)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운다.

 

경교와 동로마제국의 관계는 '정의'와 '이단'의 관계이다. 즉, 상호 대립, 배척하는 관계이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낙인찍힌 후, 동로마제국의 경내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할 수 없이 페르시아등 외국에서 발전의 기회를 찾았다. 그러므로, 431년 혹은 451년에 동로마제국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금지된 후, 자신들이 스스로 '동로마인'이라고 할 리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로마제국에서 금지된 이후 자신들을 '로마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635년은 451년에서부터 기산하면 거의 200년이 지난 후이다. 몇명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신도들(이들은 페르시아인일 것이지, 동로마인은 아닐 가능성이 많다)이 자신들을 동로마인이라고 인식했을까? 이때는 특히 동로마와 페르시아가 장기간에 걸쳐 전쟁상태에 놓여 있었다. 바로 627년에 페르시아는 동로마를 대파한다. 만일 네스토리우스파가 이 시기에 스스로를 동로마인 혹은 로마인으로 자칭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경교도들이 자칭 "대진경교"라고 하였는데, 대진을 로마 혹은 동로마로 보면, 스스로를 동로마네스토리우스파, 혹은 로마네스토리우스파로 불렀다는 말인데,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이것도 수수께끼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