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명청(明淸)의 신하들은 어떻게 황제를 욕하였는가?

중은우시 2008. 7. 4. 13:30

글: 군랑합작(群狼合作)

 

중국역사상 황제는 신권(神權), 황권(皇權), 족권(族權)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고, 군주에 대하여 충성을 하는 것(忠君)은 최고의 정치원칙이자 도덕기준이었다. 공공장소에서 황제에 대하여 대불경(大不敬)을 저지르는 것은 사죄(死罪) 즉, 죽음을 당할 큰 죄였다. 그래서 옛날 속담 중에는 "문 걸어잠그고 황제를 욕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놓고 황제를 욕하거나, 타유시(打油詩, 풍자시), 희극극본등의 방식으로 황제를 욕한 경우가 있다. 황제를 욕하는 것이 가장 유행하였던 시절은 당나라와 명나라 두 황조이다.

 

당나라때의 당태종 이세민은 거의 위징으로부터 욕을 얻어먹으면서 황제를 했다. 위징은 정책문제부터 풍기문제에 이르기까지 욕으로 일관했다, 만일 당태종이 사치를 부리면 바로 상소를 올려, "경년이래, 의재종사(頃年以來, 意在縱奢, 최근들어 방종하고 사치한데만 뜻을 두고....)"라고 쓰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국가의 재물을 낭비하면, 바로 "종욕이노인(縱慾以勞人, 하고싶은 욕망대로 하느라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라고 하고, 만일 풍기에 바르지 않을 조짐이 나타나면, "지재희유(志在嬉遊, 놀고 즐기는데만 뜻을 두고....)"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욕을 먹을 때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결국은 이를 악물고 부러진 이빨도 뱃속으로 삼키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초에 황제 자신이 자기의 피부가 간지러울 때, 아무도 자기에게 욕을 몇마디 해서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지 않을까 우려하여, 일부러 궁중에 언관(言官)을 두었었다. 언관이라 함연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인데, 대관은 관리를 감시하고, 간관은 황제를 감시했다. 어떤 때는 둘의 직능이 합쳐지기도 했다. 언관은 황제를 욕하더라고 아무런 책임도 부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제 자신이 언관으로 하여금 욕하라고 시켰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징이 당태종을 욕하더라도, 그 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태종은 화나는 것을 꾹 참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또 하나의 황제가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고, 자주 대신들로부터 욕을 얻어먹었다. 그 황제는 바로 당목종(唐穆宗)이다. 그는 정담(鄭覃)에게 심하게 욕을 얻어먹었는데, 당목종이 막 즉위한 후에 정담은 황제에게 이렇게 써서 올렸다: "폐하께서는 막 등극하여, 마땅히 정사(政事)에 전력을 다하여야 함에도, 오히려 날마다 놀기를 좋아하고, 연회와 음악을 그치지를 않으니...." 그러나, 정담은 '언관'이었다. 황제를 비판하는 것이 그의 직책이었고, 비판하지 않으면 그것이 직무유기였다. 그래서 당목종은 어쩔 수 없이 정담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과인의 잘못을 직언하다니 충성스럽구나"

 

황제를 욕한 것은 '언관'들만이 아니었다. 이상은, 백거이, 낙빈왕과 같은 문인들도 황제를 욕한 주류인사들의 하나였다. '언관'처럼 편리하게 황제에게 나아갈 수 없었고, 황제의 귀에 들리게 할 수는 없으니, 그저 황제가 보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백거이등의 문인은 자기의 붓을 가지고 황제를 질타했다. 마찬가지로 통쾌하게 욕했고, 실컷 욕했다.

 

이상은의 '타유시'인 <<여산유감(驪山有感)>>을 지었는데, "불종금여유수왕(不從金輿惟壽王, 금여를 따르지 않는 것은 수왕 뿐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수왕은 당현종의 아들로 양귀비의 남편이었는데, 부친인 당현종이 양귀비를 빼앗아 간 것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이상은이 감히 싯구 속에 이러한 '난륜'을 언급하고 비난한 것이다. 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거이는 이상은보다 더욱 악독했다. 그는 장한가를 통하여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를 길게 읊었는데, 거기에는 당현종의 '정사를 해태한것', '정사를 내팽겨쳐둔 것', '정사를 어지럽힌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봄밤이 짧다고 한탄하며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났다. 이로부터 군왕은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즐기고 연회를 여느라 시간이 없었다. 봄이면 봄놀이 밤이면 밤놀이"

 

이상은은 당나라의 진사이고 현위, 비서랑, 동천절도사판관등의 직을 지냈고, 백거이도 진사로, 교서랑을 지냈으며, 나중에 한림학사, 좌습유, 찬선대부를 지냈고, 충주자사까지 역임했다. 어느 정도 조정을 관리였는데도 이처럼 심하게 통치자를 비난한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사료의 어디를 보더라도 이들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무측천이 정권을 잡게되자, 낙빈왕은 눈에 거슬렸다. 그리하여 붓끝을 무측천에 겨냥했다: "입문견질, 아미불긍양인; 엄수공참, 호비편능혹주(入門見嫉, 娥眉不肯讓人; 掩袖工讒, 狐媚偏能惑主)" 이 말도 참 듣기 거북하다. 무측천이 구미호라는 말이 아닌가? 무측천은 이 글을 보고도 그냥 웃으면서, 낙빈왕을 불러 관직을 주려고 했다.

 

1564년, 해서(海瑞)가 북경으로 부임했다. 당시 가정제가 재위하고 있었는데, 나이 환갑에 가까운 가정황제는 도교를 신봉해서, 사원을 만드는데 많은 돈과 힘을 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여 국사를 내팽겨쳐서 백성들의 생활이 힘들었다. 그리하여 해서는 가정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거기서 가정제의 여러가지 죄행을 하나하나 열거한 후 전혀 봐주는 것없이 이렇게 말한다: "황상은 혼궤다의(昏聩多疑, 멍청하고 귀먹었으며 의심은 많고)하고, 강퍅잔인(剛愎殘忍, 강퍅하고 잔인하며)하며, 자사허영(自私虛榮, 이기적이며 허영심에 넘침)하니, 혼군(昏君, 멍청한 군주)이기도 하고, 폭군(暴君)이기도 하다. 좋은 황제가 아닐 뿐아니라, 좋은 사내라고 할 수도 없다. 천하의 신하백성들이 일찌감치 당신에게 불만이 있다. 그러니, 이른 나쁜 버릇들은 고치길 바란다"

 

이 일은 당시에 천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소식이 퍼져가자 길거리마다 이 일을 얘기했고, 전국이 떠들썩했으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해서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욕하고 싶으면 욕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각오를 하고 있어서 관까지 사서, 집안의 대청에 놓아두었고, 황제가 그를 죽이면 시신을 수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서는 죽지 않았을 뿐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광동신어>>에 의하면, 황제는 해서의 글을 읽고는 "이 자는 비간(比干)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짐은 주(紂)임금이 아니다" 그리고 '달아나게(遯)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궁녀가 혼잣말로, "그는 충신이 되고자 하는데 어찌 달아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황제는 황중귀를 불러서, "이 자는 죽음으로써 이름을 떨치고자 한다. 그를 죽이는 것은 그가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이니, 차라리 유배시켜 스스로 죽게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욕을 한바탕 얻어먹은 가정제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명나라의 만력제때 적지 않은 대신들이 황제를 비난했는데, 언사가 격렬했고, 태도도 강경했다. 예를 들면, 우도어사 조운총독 이삼재는상소를 올려 만력황제에게, "오늘날 대궐의 정치는 엉망이 되어 버렸는데, 폐하의 병의 근원은 바로 재물이 탐닉하는 것입니다" "폐하가 정사를 어지럽힘은 육대의 시절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천신이 모두 분노하니, 큰 난이 곧 일어날 것입니다"라는 심한 말까지 하였다.

 

이삼재는 이런 글을 올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야의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는 분위기하에서 황제는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명실록에 의하면 대신들이 말을 심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고는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이유로 신하들 중에서 강등되거나 쫓겨난 경우는 있다. 그러나 심하게 처벌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황제에게 직언하였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