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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과 유태인(猶太人)의 관계

by 중은우시 2008. 10. 13.

작자: 미상

 

1. 개봉유태인(開封猶太人)

 

고대에 개봉(Kaifeng)은 중국에서 유태인이 거주하는 중심지였다. 송나라때 제왕은 우호적으로 유태인들을 대했다: "우리 중하(中夏, 중국)에 귀순하여 풍습을 지키면서, 변량(개봉)에 머물러도 좋다" 이는 명백하게 그들에게 자신의 종교와 풍습을 지키면서, 중국황제의 곁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한 거이다. 황제의 이 말을 처지가 곤란해진 유태인들에게는 아주 반가운 말이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처를 얻고 자식을 낳으며, 중국의 각종 과거에도 참가했고, 각급 문무관리를 맡았다. 송나라때 유태인은 개봉에 약 1000여명 있었다고 전해지며, 명나라때는 약 5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중화민족의 대열에 기꺼이 가입하였는데, 이는 세계사와 이스라엘역사에서 드문일이다. 다른 국가에서 유태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핍박을 받아 개종하고, 마음 속으로만 유태민족의 신앙을 보존하여야 했었다.

 

명나라때, 유명한 천주교 전도사인 마테오 리치는 중국개봉에 유태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 유태인들이 유태율법인 '모세오경'을 보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추측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고, 사람들은 속속 개봉으로 가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개봉유태인들이 신봉하는 것은 이스러예교(一賜樂業敎)였는데, 이는 이스라엘(Israel)의 발음과 같았다. 중국의 회족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소와 양을 죽일 때, 힘줄을 골라냈다(그리하여 중국인들을 이들을 挑筋敎라고 불렀다). 그 습속도 유럽의 유태인과 완전히 같았다; 그들은 주로 개봉에 거주하고있고, 일부는 천주, 항주, 광주등지에 살았다. 이들 전도사들은 또한 중국역대군주와 민중들이 유태인들에게 각박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고, 중국유태인들이 중국인과 융합하고 동화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들은 마르코 폴로를 '중외교류를 촉진한 대가'로 받들고 있다. 사실, 그보다 더 일찍 중국에 우호적인 서양인은 유태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야곱(雅可布)인데, 마르코 폴로와 같은 동향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안나크의 솔로몬의 아들이고, 이탈리라 플로렌스 유태법학박사의 조카"라고 하였다. 그는 1270년 이탈리아반도에서 중국으로 장사를 위해 온다. 그는 찬란한 중화문명에 감탄하고, 280페이지짜리 양피지에 두터운 책을 한 권 써서 그가 6개월간 거주했던 도시를 찬송하고, 책이름은 <<광휘의 도시>>라고 한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 책은 출판되지 못하고 만다. 원인은 그가 책에서 격렬하게 천주교회의 전횡과 무치를 비판하였고, 전도사들이 아랍인과 유태인간의 불화를 적극 조장하였다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르코 폴로'의 이름은 '야곱'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2. 상해유태인

 

상해가 외국인의 '모험가의 낙원'이 되었을 때, 중국의 유태인중심은 이로 인하여 개봉에서 상해로 이전된다. 상해의 첫번째 부를 거머쥔 사람들은 유태인이었다. 사손(沙遜), 하통(哈同), 카두리(嘉道理)등이 그 대표자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첫째, 서방열강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대담하게 거래하고, 유태인의 정교한 예측과 장사능력을 발휘해서, 단기간내에 거액의 재물을 긁어모았고, 상해탄의 유명인사가 된다; 둘째, 널리 친구를 사귀고, 널리 돈벌 일들을 벌이며, 다원화발전을 꾀한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적지 않은 유태인은 이 혁명에 가담한다. 독일 유태인인 에이브러함 코헨 장군은 한때 손중산의 위대장을 맡은 적도 있었다. 손중산은 1920년 4월 24일 <<이스라엘 텔리그라프>>의 편집장이자 상해유태인계의 저명한 활동가인 N. 아이츠라선생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자신이 유대시온주의운동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표명하고, 이 운동은 '당대의 가장 위대한 운동중 하나'라고 칭한다.

 

반파시스트전쟁중, 상해유태인은 중국의 특별대우를 받는다. 당시, 각국은 모두 유태이민을 금지하거나 제한하였다. 오로지 중국의 상해만이 그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2차대전전에 상해로 피난와 유입된 유태인이 3만명을 넘어선다. 그곳의 생활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히틀러의 칼날은 피할 수 있었다. 항전기간동안, 이들 유태인은 상해의 각종 공익활동과 문예오락활동에 참가했다. 죽음의 기운이 감돌던 상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중국의 비엔나'가 되게 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장사측면에서 큰 성취를 거둔다. 상해의 경제발전에도 공헌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원래 '피난지'였던 상해는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게 된다. 1943년 일본인이 홍구구에 유태격리구를 설립한 후, 많은 상해의 유태이는 상해를 떠난다. 그러나, 중국인은 남은 유태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고, 심지어 이차대전말기 미공군이 홍구구를 오폭했을 때, 적지 않은 상해인들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유태인들을 구해주었다.

 

3. 소련간부와 항전유태인

 

제정러시아와 동유럽의 유태인은 장기간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혁명에 투신했다. 그리하여 혁명의 중견역량이 된다. 예를 들어, 소련의 영수인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카나보비치등이 바로 유태인이다. Cheka(KGB의 전신)의 영수인 케렌스키는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그러므로 코민테른과 소련정부가 중국원조를 결정할 때, 중국에 파견되어 일하던 간부들 중에도 유태인이 많았다.

 

월비(越飛, Adolf Abramovich Joffe, 1883.10.10 - 1927.11.16). 소련유태인, 일찌기 소련외교인민부위원(부처장)을 맡았고, 소련정부가 중국에 파견한 최고위급 대표였다. 그는 손중산과 여러번 회담하고, 손중산이 "연아연공(러시아와 연합하고, 공산당과 연합한다)"는 정책을 쓰도록 하였고, 국민당의 집권에 도움을 주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다.

 

마림(馬林, Hendricus Josephus Franciscus Marie Sneevliet, 1893.5.14.-1942.4.13). 네덜란드유태인,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견한 첫번째 정식 대표. 그는 중공'1차당대회'에 참가하고, 중공과 국민당의 제1차국공합작과정을 관찰하며, 중국혁명사업에 큰 공헌을 한다.

 

보로딘(鮑羅廷, Michael Borodin, 1884-1951). 소련유태인, 소련정부가 광주혁명정부에 파견한 대표. 역시 손중산의 정치고문. 그는 손중산을 도와 국민당을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의 건립을 도운다. 그는 중국에 머문 기간이 비교적 길었고, 중국혁명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중국항전시기에 만은 유태인들이 용감하게 싸웠고, 힘들게 일했으며, 심지어 순직한 사람까지 있다.

 

한스 시페(漢斯 希伯, Hans Shippe, 1897-1941) 독일유태인, 독일공산당원. 저명한 기자 겸 정치평론가. 그는 대량의 팔로군, 신사군에 대한 기사를 썼고, 세계에 혁명군대를 선전했다. 그는 중공영수 모택동등과 교분이 밀접했고, 사람들이 그를 "외국팔로"라고 불렀다. 불행한 것은 1941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당하였다는 점이다.

 

야곱 로슨필드(羅生特, Jacob Roenfield, 1903-1952). 그는 오스트리아의 중산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그는 의료기기를 들고 신사군에 가입한다. 의술이 뛰어나고, 열심히 일하였으며, 태도가 아주 부드러워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백성들은 그를 "대비자(大鼻子)"라고 불렀다. 전사들은 그를 "신사군의 백구은(白求恩)"이라고 불렀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특별당원이 된다. 그는 1943년 팔로군 115사단에서 일하고, 항전승리후 계속 혁명부대에서 일한다. 불행한 것은 여러해동안의 힘든 일로 심장병이 발병하여 1952년 친척방문중에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사망하였다.

 

4. 건국후의 유태인

 

신중국성립이후 일부 유태인은 계속 중국에 남아서 일했다. 그들중에 중국국적을 취득하거나, 중국공산당의 당적을 취득한 경우도 있다.

 

Sidney Shapiro(沙博理, 1915 - 1988). 원래 미국유태인이다. 변호사를 지냈고, 2차대전때 미군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데 뽑힌다.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을 존경한다. 그는 1947년 미국에서 중국으로 온다. 그리고 주욱좌익작가인 봉자(鳳子)와 결혼한다. 1963년 그는 주은래총리의 배려로 중국국적을 취득한다. 샤피로는 장기간 외문출판사에서 일하며, 중국의 명저 <<수호전>>과 <<창업사>>, <<가>>등의 작품을 영문으로 번역한다. 동시에 그는 여러 사회직무도 맡는다. 심지어 영화연출도 한다. 아주 활발하고, 영향력이 컸던 정치가 겸 사회학자이다. 그는 개봉유태인연구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의 <<구중국의 유태인: 중국학자의 연구>>라는 책을 1984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다. 그는 부인 봉자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서 이 책의 출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Israel Epstein(愛潑斯坦, 1915-2005). 원래 미국유태인이다 부모는 폴란드계 유태인이다. 샤피로와 마찬가지로, 그도 중국에서 유명한 유태인이다. 그는 어려서 중국으로 온 후에, 홍콩에서 송경령이 이끄는 "중국보위동맹"에 가담한다. 그는 중국고위지도자인 모택동, 송경령, 주은래, 주덕등과 교분이 깊었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그는 처인 구말리(邱茉莉)와 1951년 미국에서 유럽을 돌아 북경으로 온다. 그리고 영문판 <<중국건설>>을 창간하고 오랫동안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1957년 중국국적을 취득한다. 1964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전국정협상임위원을 맡는다. 그는 또한 <<모택동선집>> <<등소평문선>>등 중요저작의 영문판에도 참가하여, 중국의 대외선전에 특수한 공헌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