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과 월남문화

by 중은우시 2008. 10. 5.

글: 임해(林海)

 

월남은 어디에 있는가?

 

Marguerite Duras의 붓끝에 쓰여진 메콩강의 풍광인가? 아니면 영웅영화의 속에 끼어있는 삼륜거의 인력거꾼인가? 미국영화에 나오는 숲 속에 숨어있는 전사인가? 아니면, 폐쇄된 공산주의국가의 모습인가? 마치 그 모든 것인 것같기도 하고, 모든 것이 아닌 것같기도 하다.

 

아시아의 소국이며 남해변의 한줄기 허리띠같은 나라이다. 근대의 월남은 주마등처럼 바뀌는 대국들에 끼어서 자신의 생존공간을 찾아왔다. 중국, 프랑스, 일본, 소련, 미국, 모두 월남에 드러나게 혹은 숨어서 모습을 보였다. 월남은 세계 냉전과 열전의 최전선인 적도 있었다.

 

모든 제3세계국가와 마찬가지로, 월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이었다. 독립을 위하여는 침략에 항거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전쟁은 근대의 월남을 계속 따라다녔다. 독립후의 민족은 다시 자신의 생존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대국의 영향은 다시 전쟁이 끝난 후에 또다른 형식으로 찾아왔다.

 

세계조류는 호호탕탕(浩浩蕩蕩)하고, 대국의 굴기와 흥망성쇠는 모두 월남에 뒷그림자를 비추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경제개발을 막 시작하다보니, 문화가 독립되는 것은 더욱 요원하다.

 

이런 국가들 중에서 중국의 영향이 가장 크고, 프랑스가 그 다음이며, 미국의 영향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일찌기 또 다른 대국들도 이 곳에서 풍운을 질타했다. 그러나 현재는 역사적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주 드물다.

 

월남이 만일 현재의 경제파동을 순조롭게 넘긴다면, 아마도 당년의 아시아의 사소룡(四小龍)과 마찬가지로 , 세계산업자본이전의 제3의 물결을 이어받아 신속히 성장할 것이고, 부국강병이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국가가 경제독립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문화도 따라서 흥성하게 된다.

 

현재의 월남은 오토바이의 국가이다. 하노이이건 호치민시이건 오토바이는 메뚜기처럼 사방팔방에서 아무런 규칙도 없이 너를 향해 달려들 것이다. 네가 교통규칙을 준수하여, 오토바이가 없을 때, 도로를 건너가려고 한다면,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의관(友誼關)으로 입국하면, 월남남자들의 머리에 쓰고 있는 녹색군모외에 중국과 가장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건축물이다. 1858년, 프랑스는 선교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스페인연합함대를 만들어 다낭에 포격을 가하였다. 프랑스는 이때부터 월남에 대한 침략을 시작한다.

 

프랑스는 월남의 언어를 바꾸었을 뿐아니라, 프랑스식 건축을 가져왔다. 월남의 한 역사학자는 최초의 관리계층이 프랑스인을 따라 프랑스식 건축물을 만들었고, 나중에 이 전통은 천천히 민간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건축은 미황색(米黃色)이고 녹색의 백엽창(百葉窓, persiennes jalousie)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기와지붕이다. 이는 "월남인으 현대적 심미기준에 부합"한다.

 

하노이에서, 가장 전형적인 프랑스건축은 바딘(Ba Dinh)광장 부근의 주석궁이다. 호치민시에서는 마찬가지로 유명한 옛 시청청사가 있는데, 그 곳은 이미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건축풍격이 프랑스식으로 바뀌었지만, 건물을 짓기 전에 풍수를 보는 것은 여전히 불변의 규칙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중국문화가 월남에 끼친 영향은 하나는 유교이고, 하나는 불교이다. 불교의 신념은 이미 사람의 생활양식으로 내재화되었다. 보살에 절하고, 향을 사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기원하는 의식이다.

 

건축풍격은 서양적이다. 그러나 건축물에 걸고 있는 국기는 붉은 색 바탕에 노란 별이다. 월남인들은 국기를 거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국가명절이 되면, 모든 집에서는 국기를 내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전통은 디엔 비엔 푸(Dien Bien Pu)대첩시대에 형성되었는데, 당시에 전쟁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건축물 풍격도 월남에 영향을 미친 적이 있다. 하노이 구도심을 걸어가면, 반드시 건물 한 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월남이 1960년대이후 친소련 외교정책을 취했고, 소련이 월남에 대량의 원조를 제공했었던데서 기원한다. 월남의 각 성에는 모두 소련이 원조하여 지은 프로젝트가 있다. 특히 정부청사가 그렇다. 수도인 하노이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호치민묘이다. 이는 전소련의 지도설계하에 완성되었다.

 

다만, 러시아 풍격은 월남에 대규모로 남겨지지는 못했다. 아마도 월남-소련의 밀월기가 너무나 짧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러시아 풍격이 월남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국문화

 

월남에 영향을 가장 많이 준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중국이다. 끊어도 끊어지지 않고, 다듬어도 다시 흐트러진다.

 

16세기말, 프랑스 선교사는 월남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중에 월남인들의 문자도 바꾸었다. 즉 현재 월남의 공식언어인 월남어이다. 이런 표음문자는 프랑스 선교사가 월남방언의 원래 발음특색에 따라 만들어서 이루어졌다. 발음이 쉽고, 기억하기 쉬워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다만, 월남어에는 여전히 많은 발음이 중국의 광동화발음과 거의 같다. 예를 들어, 월남어에는 "중국(中國)"이라는 두 글자의 발음이 "중궈"이고, "정부" "농촌" "노동"등의 발음도 한어와 비슷하다. 필자는 월남에 며칠간 머물렀는데, 어떤 때에는 통역이 필요없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고,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월남전쟁박물관에서 필자는 또한 발견했다. 1975년이전에 월남민주공화국의 화폐에는 한자로 "越南民主共和國"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재, 아시아에서 월남과 인도네시아만이 라틴어 알파벳을 본국언어로 한다. 이는 일부 월남의 지식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지식인들은 이것이 역사의 맥락을 끊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중고생들이 한자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제창한다.

 

월남의 옛 이름은 "교지(交趾)"이다. 679년, 당나라는 그 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고, 교주(交州)를 관청소재지로 하였다. 그리하여 안남(安南)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조정은 완조(阮朝)의 개국임금인 완복영(玩福映)을 "월남국왕"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월남(越南)이라고 부르게 된다.

 

월남의 수도 하노이의 가장 오래된 역사유적지인 문묘(文廟)에는 모조리 한자로 쓰여 있고, 공자상을 모시고 있다. 문묘는 고대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들을 위하여 비를 세우고 월남의 최고학부가 강연하던 곳이다. 그런데, 이 곳으로 걸어들어가면, 북경의 역사고적에 들어간 것과 다른 것을 느낄 수 없다. 중국인들은 통역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남인들은 그렇지 않고, 통역이 필요하다. 소수의 편액에는 곁에 월남어로 번역한 글을 놓아두고 있다. 하노이 거리에서, 고대역사가 있는 곳에는 모두 한자가 있다.

 

적지 않은 월남건축에는 여전히 잘 보이도록, "복(福)", "덕(德)"과 같은 한자가 쓰여 있다. 월남인들의 집에는 모시는 단을 만들어, "공희발재(恭喜發財)", "부귀평안(富貴平安)"등의 글자를 붙여놓고 있다. 월남역사를 잘 알고 있는 한 월남기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월남농촌의 사당에는 모두 한자로 쓰여 있다고.

 

월남TV에서 중국의 드라마를 가장 많이 보여준다. 그리고 소리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고, 그저 한 여자 목소리로 동시통역해준다. 중국의 전 주월남대사인 이가충(李家忠)은 그가 월남에 있을 때, TV에서 <<서유기>>를 틀면, 길가에 어린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TV드라마 <<포청천>>은 15년동안 월남에서 반복하여 방영해주고 있으며,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나는 한 월남인에게 왜 그렇게 재미있게 보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여줄 것이다.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당연히 좋아한다"

 

월남에서 가장 유행하는 것은 홍콩영화이다. 하노이 통역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미국의 블럭버스터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보니 주인일가는 중국스타 조미(趙薇), 서기(舒淇)가 나온 영화를 배경으로 한 MTV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필자가 인터뷰하는 중에 월남인들은 보편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중국-월남전쟁을 언급할 때도, 그들은 고의로 가볍게 묘사했다. 그저 "지나간 일"이라는 것이다. 한 노병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의 사람들은 생각이 모두 같다. 중국과 월남은 친구이다. 모택동과 호치민도 친구였다" 그후에 그는 한어로 그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노래인 "대해항행고타수(大海航行靠舵手)"를 불렀다. 그는 군대내에서 군수업무를 책임졌었다.

 

길가에서 쌀국수를 파는 장삿꾼은 내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자, 찬미하는 눈빛을 보내면서 큰 소리로 "중궈"라고 하였다. 통역이 나를 데리고 그의 집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적극적으로 부근의 한 상점주인에게 나를 중국에서 왔다고 소개해주기도 하였따.

 

나는 매번 이야기를 나눌 때면, 통역에게, "중국의 상황을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이면 기꺼이 대답해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들은 나에게 거의 묻는 것이 없었다. 아마도 중국에 대하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내가 보통시민에게 중국에 관해서 몇 가지를 물어보니까, 그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중국의 영향이 어떤 곳에서는 약화되고 있었다. 작년 하반기, 국내의 인터넷에는 한 소식이 전해졌다: "월남인들은 중국물건을 무시한다". 그리하여 중국의 네티즌들이 불안해 했다. 이 소식은 미국의 뉴스위크에 실린 것이고, 글에서는 월남에서 염가상품시대는 이미 지났고, 월남인들은 더 이상 저가에 저질상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내가 친히 목도한 사실은 작년 5.1. 하롱베이의 한 섬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각 나라의 관광가이들이 구두로 조용히 설명하고 있었다. 돌연, 중국광동의 관광단이 들어왔다. 확성기의 목소리는 졸지에 다른 소리를 다 덮어버렸다. 모든 관광객의 눈은 삽시간에 그 관광가이드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고대인지 현대인지, 정치적인지, 경제적인지, 문화적인지, 심지어 좋은지 나쁜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같았다. 이 모든 것은 월남인이 보는 중국인상을 형성하고 있다.

 

난감한 미국

 

미국의 월남에 대한 영향은 마치 역설중에 나타나는 것같다. 한편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미국과 악수해야만 한다. 비록 전쟁의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월남 동과 미국 달러는 월남에서 계속 나란히 유통되었다. 최근들어 통화팽창이 가속화된후, 많은 사람들은 미국달러로 받는 것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KFC는 호치민시의 번화한 도심에 점포를 열었다. 젊은이들의 생활방식은 미국에 경도되어 있으며, 남부지역이 더욱 명확하다.

 

또 다른 측면으로, 민중의 미국에 대한 정서는 부정적인 것이 위주이다. 미국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니, 하노이의 보통시민들중 몇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답했다: "미국은 좋은 나라가 아니다." 작년 5월 1일, 필자는 월남의 타이응웬성(太原省)의 한 시골마을을 방문했다. 마침 큰 비가 내렸는데, 한 촌민은 내 부근에 월남전쟁때 남겨신 아직 폭파되지 않은 폭탄을 발견했다. 그는 격동하여 나를 끌고가서 그 폭탄을 보여주면서, "American"이라고 소리쳤다. 마치 나와 같응 이국인에게 전쟁이 남긴 흔적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듯이.

 

2006년, 월남전쟁이 끝난지 31년이 지났다. 미국대통령 부시가 하노이를 방문했다. 월남총리 응위엔 탄 둥(阮晋勇)은 네티즌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시기의 많은 다른 월남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미국정부를 미워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국민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당과 정부는 현재 미국과 좋은 관계를 건립하기를 희망한다" 얼마전에 그는 미국방문을 마쳤다.

 

호치민시에 관광을 오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두 곳을 꼭 방문한다. 하나는 전쟁유적박물관이고 하나는 땅굴전유적이다. 필자가 7월 5일 전쟁유적기념관을 참관했는데, 전쟁피해자부분의 전람은 가슴을 아프게 하였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물관에서 많이 보이는 것은 푸른 눈의 서양인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그저 미국의 1960년대의 반전운동을 이해하려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각국의 관광객이 호 호안 키엠(還劍湖)의 관광지를 오면, 중국인이건 프랑스인이건 러시아인이건, 아미면 관광가이드인 월남인이건 모두 영어로 얘기해야 한다. 영어는 월남 중고생의 필수외국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