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설연(侯雪蓮)
2008년 10월말, 창홍 PDP는 양산체제에 들어갔다. 60억위안의 거액투자는 중국칼라TV업계에서 후방산업으로 진군하기 위한 최대의 투자였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모든 TV대기업중에서 마쓰시다(松下), 히타치(日立) 만이 견고한 PDP파에 속해 있다. 국산 PDP진영중에서는 어느 기업도 창홍처럼 PDP에 올인한 곳이 없다. 창홍의 성패는 이번 싸움에 걸려 있다.
2004년 7월 9일, 창홍의 전동사장인 예윤봉(倪潤峰)이 사직하고, 조용(趙勇)이 다시 기용되었다. 금년은 조용이 장홍을 다시 경영하기 시작한지 4년째가 되는 해이다. 엔지니어출신의 조용은 칼라TV의 평면화에 분명한 인식을 지니고 있다. 디지탈시대가 곧 오게 되면서, 창홍의 운명도 여기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를 위한 창홍의 준비는 아주 미흡했다.
조용은 먼저 창홍의 프로젝션사업을 취소합병해버렸다. 프로젝션과 자그마한 평면TV사업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평면TV사업부로 만들었다. 이 조치에 대하여 당시에는 말들이 많았었다. 왜냐하면 프로젝션 TV는 창홍의 당시로서는 영리를 얻는 중요사업이었기 때문이며, 업계내에서 비교적 시장점유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용은 프로젝션에 대하여 애정이 많았으며, 그동안 중요한 공헌을 해왔었다. 2001년 창홍의 첫번째 고화질 프로젝션 칼라TV는 바로 당시 창홍 총경리인 조용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다만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기술조류는 이미 흘러갔고, 프로젝션은 평면TV보다 뒤쳐졌다는 것을.
당시, 일본 한국의 브랜드는 이미 거액을 LCD 및 PDP의 생산라인에 투자하고 있었다. 조용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평면시대에 모니터가 없으면 TV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조용은 심지어 창홍 내부회의에서 이렇게도 말했다: "만일 우리에게 모니터 자원이 없으면, 나는 창홍에게 산업전략을 바꿀 것을 건의한다. 즉 평면TV제조를 포기하는 것이다"
원인은 두 가지이다. 먼저 평면칼라TV의 원가중 70%이상이 바로 모니터로 결정된다. 한 생동감있는 주장은 모니터의 생산라인을 1미터만 늘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칼라TV의 생산라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평면TV의 기술발전은 현재까지 90%이상이 모니터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크기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저화질에서 고화질로, 외형이 계속 얇아지는 것등등이다. 모두 모니터의 기술진보가 평면TV의 기술진보로 연결된다. 모니터자원을 장악하지 못하면 생산력이 없다는 것이다. CRT시대에는 중국칼라TV가 전세계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는데, 그것은 완전한 산업체인을 갖추고 있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제약을 받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방향이 명확해 졌다. 다만, 창홍이 어떠 조건으로 모니터사업을 벌일 것인가? 자금측면에서 창홍은 APEX에 거액의 미수금사건을 막 겪었다. 아주 현실적인 원인은 바로 "LCD는 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6세대이상의 LCD 생산라인에는 2,30억달러의 자금이 필요했고, 기술이 급속히 업그레이드되고, 이윤주기가 비교적 길다. 창홍이 600만-800만의 3기 PDP모니터라인과 모듈프로젝트에 모두 20억달러만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안정적인 이윤을 유지할 수 있다. 동시에, 창홍은 PDP는 대형인치측면에 장점이 있다는 것을 중시했다. 그리고 대형TV는 향후 칼라TV발전의 방향이었다.
합작
당시, 마쓰시다, 삼성, LG등 거두들은 전세계 PDP 모듈의 6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성품, 모듈과 모니터의 수직통합의 발전모델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듈을 대외판매하는 분량은 50%가 되지 않았다. 어떤 경우는 심지어 겨우 20%만 외부판매했다. 그리고 PDP모듈(모니터 포함)의 원가는 PDP완성품 가격의 60%-80%를 차지했다. 어떻게 이런 상대적인 독점시장을 뚫고 들어갈 것인가? 조용은 합작자원을 찾기 시작했다.
2005년, 창홍은 차이홍(彩虹)그룹(국내 최대의 CPT-color picture tube-생산기업임)와 의기투합을 했다. 이전에 차이홍은 이미 근 10년간의 PDP 연구개발경험이 있었다. 2006년 7월 쌍방은 합작으로 "사천세기쌍홍모니터유한공사"를 만들었고, PDP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부터 규모있고, 경쟁력있게 하기 위하여, 세기쌍홍은 "팔면취(八面取, 한장의 판을 8편의 42인치 PDP판으로 나누는 것)"의 생산라인을 확정했다.
다만, 차이홍만으로는 부족했다. 차이홍은 비록 300여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핵심특허(즉 PDP를 만드는 필수기술)는 없었다. 장래 제품수출시 비교적 복잡한 특허라이센스문제에 부닥칠 것이었다. 여러번 고민한 끝에 세기쌍홍은 미국 MP회사로부터 한국 Orion회사의 지배주식을 인수한다.
오리온은 원래 한국대우그룹 산하의 모니터제조회사였다. 대우에 문제가 생긴 후, 오리온은 미국투자기금인 MP회사에 매각되었다. 2006년 12월, 세기쌍홍은 1억달러로 미국MP의 수중에서 오리온의 75%지분을 매입했다. 오리온은 몇 백개의 PDP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에 약 12개는 업계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핵심기술이었다. 동시에 세기쌍홍, 창홍과 MP는 합작으로 "사천홍구모니터유한공사"를 설립하여 PDP모니터프로젝트의 구체적인 건설에 들어갔다.
오리온을 인수함으로써 창홍은 진정 PDP특허"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창홍에 따르면, 이후 창홍의 PDP Dielectric Paste, 구동선로, 핵심IC, 형광분분무, 에칭, 코팅등의 20여 가지 기술이 차례로 국가의 "전자산업발전기금", "863계획", "신형전자원자재및원재료핵심기초산업화전문프로젝트"등에 포함되었다.
2007년 4월, 6.75억달러를 투자한 홍구PDP프로젝트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비준을 받는다. 그리고 사천성 면양시에서 정식으로 착공한다. 만일 제2, 제3기를 합친다면 이 프로젝트의 총투자금액은 20억달러를 넘는다.
방향
사천창홍의 계획에 따르면, 금년 10월말 제1기공정이 생산개시된 후, 홍구 PDP프로젝트는 2009년도에 제2기준비단계로 들어간다. 2010년에는 제2기공정이 양산체제에 돌입하며, 제3기공정은 2009년 제4분기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2012년에는 생산개시하게 되며, 그 때의 생산능력은 600만-800만개가 되며, 전세계 4강에 속하게 될 것이다.
'화살은 앞으로 나아가지 뒤돌아가는 법이 없다' 창홍은 PDP분야에서 확장을 이미 시작했다. 다른 국산칼라TV브랜드드은 이미 LCD모듈프로젝트에 이미 투자하거나 지분참여를 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창홍은 진정으로 PDP의 최핵심분야에 진입하였다. 국내에서 PDP를 사용하는 Power IC 및 고효율형광분에서 이미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이는 중국이 이미 PDP의 핵심산업기술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수직통합"의 산업체인모델은 PDP산업의 하나의 특색이었다. 이는 개방정도가 비교적 높고, 참여자가 비교적 많은 LCD와는 차이가 있다. '자급자족'의 모델은 각 공장의 이윤을 보장하는 동시에, 많은 정도로 PDP산업의 장기적 발전을 제약하고 있다. 비곡 2000년대부터 마쓰시다, 창홍등 국내외 공장에서 연이어 PDP TV를 내놓고 있지만, 기술성능우세는 장기적으로 소비자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PDP는 급속히 발전하는 국내평면TV시장에서 계속하여 성장속도가 시장의 평균증가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창홍 PDP의 현재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이다.
PDP TV분야에서, 창홍의 경쟁적수는 직접적으로는 삼성, LG, 마쓰시다, 히타치이다. 조용은 솔직하게 말한다. 기술의 성공이 최종적인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종적인 성공은 반드시 판매로 이루어져야 한다. 중국제조의 각도에서 보면, 국내브랜드는 반드시 일본,한국보다 더 낮은 원가우세를 지녀야 한다. 창홍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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