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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공자(孔子)에 대한 역사상 10가지 이미지 (I)

by 중은우시 2008. 10. 5.

글: 천행운(天行雲)

 

공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전통문화의 주요대표인물이다. 한나라때 이미 사람들은 공자를 "소왕(素王)"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공자에게는 왕자(王者)의 덕은 있으나 왕자의 지위는 없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왕"은 바로 사상문화영역에서 무관의 왕인 것이다. 청나라때 통치자들은 그에게 하나의 칭호를 부여하니 바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그것이다. 아마도 2천여년의 중국역사상 독서인(讀書人, 글읽는 선비)이 받은 최고의 직함일 것이다.

 

강유위는 일찌기, "중국의 국혼(國魂)은 무엇인가? 가로되 공자의 가르침 뿐이다" "중국의 일체의 문명은 모두 공자의 가르침과 관계가 있다" '국혼'이라는 칭호는 '소왕' 보다는 훨씬 숭고하다. 양계초는 "공자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2천년이래의 중국이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하고, "소크라테스이후 소크라테스는 있을 수 있지만, 공자의 이후에 공자는 없다" 이 말은 공자가 중국에 최대의 영향을 끼친 대인물이라는 뜻이고, 전무후무하다는 것이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근대 존공파(尊孔派)의 선봉자격인 인물들이다.

 

송, 명의 이학자들은 심지어 더욱 극단적인 말도 했다: "하늘이 중니(仲尼, 공자)를 낳지 않았다면, 만고는 밤처럼 길었을 것이다" 이 말의 뜻은 공자가 우주간의 태양이며,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암흑속에서 길을 모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명나라때 사상가인 이지(李)가 이를 조소하여 이렇게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삼황오제시대의 사람들은 백주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길을 걸었었구나!" 지금 여기에서는 공자사상을 토론하지는 않는다. 그저 공자의 역사적 이미지만을 토론한다. 그렇게 하면 이슈가 더욱 간단해질 것이다.

 

공자는 한(漢)나라에 이르러, 국가정치사상영역에서 이미 합법, 정통의 이미지를 수립했다. 그의 저작인 <<춘추(春秋)>>는 천하를 다스리는 하나의 거울이 되었고, 공자 본인은 왕의 스승이 되었다.

 

첫번째 이미지는 "성화(聖化)"이다.

 

벼슬을 지내지 않은 포의(布衣)의 공자를 성인으로 이미지메이킹하는 데에는 중간에 개략 사,오백년의 과정을 겪었다. 오(吳)나라의 대부(大夫)는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의 스승은 성인이 아니란 말인가? 왜 이렇게 다재다능한가?" 그러자 자공은 대답했다: "하늘이 그에게 성인의 자질을 부여했다. 그래서 그는 다재다능하다." 여기에서 자공은 공자를 '하늘이 내린 성인'이라고 칭송했다. 처음으로 공자의 이미지를 천부적인 '성인'으로 포지셔닝시킨 것이다. 1백여년후, 맹자는 공자에 대하여 고도의 평가를 하면서, "백성들이 태어난 이래로, 공자는 없었다"라고 한다. 그 뜻은 인류가 나타난 이래, 공자보다 더욱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맹자는 "불의를 하나 행하고, 무고한 자를 하나 죽이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모두 하지 않았다"(맹자. 공손축상). 고대성인은 서로 다른 측면이 많다. 그러나 맹자가 보기에, 공자의 몸에는 성인의 각 측면의 장점이 응집되어 있어, 고대성인의 '집대성'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성화"되는 과정에서, 사학가인 사마천이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천하군왕중에 현명한 사람이 많았다. 생전에는 번영했으나, 사후에는 그만이었다. 공자는 포의이지만 십여세를 전해지면서, 학자들의 조종이 되었다. 천자왕후부터 중국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자는 모두 공자의 말씀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니 지성(至聖)이라고 말할 수 있다"(사기. 공자세가). 이는 바로 제왕으로부터 학자에 이르기까지, 만일 육경을 핵심으로 한 지식학문을 연구하면, 모두 공자의 관점을 시비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로써 생각하면, 사마천은 공자를 가장 위대한 성인(至聖)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두번째 이미지는 "왜화(矮化)"이다. 공자의 "왜화"는 노자로부터 비롯된다. 공자가 살아있을 때 서쪽으로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묻는다. 노자는주례(周禮)의 창시자인 주공이 일찌기 죽었으므로, 주나라의 예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시대조류가 허락하는지를 살펴야한다고 보았다. 노자는 경고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교기(驕氣)와 다욕(多慾), 태색(態色)과 음지(淫志)를 버려야 한다. 모두 그대의 몸에 이롭지 못하다"라고 하였다(사기. 노자열전). 이는 공자의 몸에는 교만한 자세와 모습, 그리고 지나친 욕망과 이상이라는 두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공자세가>>의 기록에서, 많은 동시대의 은사들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공자를 각종 방법으로 조소했다. 혹은 그를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을 구분하지 못한다(四體不勤, 五穀不分)"이라고 풍자하기호 하고, 혹은 그를 "허리아래는 우(禹)보다 삼촌이나 짧고,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고 조롱하였거나, 혹은 공자의 학생들에게 '피인지사(避人之士, 공자를 가리킴)'를 따르는 자들은 피세지사(避世之士, 은사)를 따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나간 일은 간할 수 없고, 오는 날은 아직 쫓아갈 수 있다"는 말로 공자에게 입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장자. 덕충부>>는 사지장애인 '숙산무지(叔山無趾)'라는 인물이 공자에게 배움을 구하면서 도를 논하였는데, 결국 공자가 열세에 처하게 되자, 스스로의 몰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는 전형적인 예이다. 실제로 <<장자>>라는 책에는 여러가지 공자를 "왜화"시키는 이야기가 많다.

 

도가에서 공자를 "왜화"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통이 있다. <<열자. 탕문>>은 한가지 이야기를 날조해 냈다: 공자가 동쪽으로 유세를 갔는데, 두 어린아이가 아침의 태양과 정오의 태양중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가까운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쌍방은 모두 형상이나 온도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물었다. 공자는 결정하지를 못했다. 두 어린아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당신이 지식이 많다고 하는가?'" 실제로 이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이천년후의 천문학자들이 정밀한 계산후에 비로소 답안을 도출해 냈다. 그러나, 공자가 성인이 아닌가?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주장에 따르면, '성현은 무소불통(無所不通), 무소불능(無所不能)이니, 무엇을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소부지의 성인은 어린아이의 문제에도 답변하지 못했다. 이것은 교묘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세번째 이미지는 "정통화(正統化)"이다.

 

한나라때 동중서(董仲舒)가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의 견해를 제출한 이래, 공자의 이미지는 점차 정통화하게 된다. 동중서는 "춘추는 대통일한 것이고, 천지의 상경이며 고금의 통의이다...육계의 과 공자의 술에 속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그 도가 막힐 것이므로 들어가지 말 것이다. 사벽의 설은 없어질 것이고 그 후에 하나로 통일될 것이며, 법도가 분명해지고 백성이 따르게 될 것이다" 원래 공자의 이미지는 "성화"이건 "왜화"이건 모두 일종의 민간행위이다. 현재 동중서는 국가기관의 역량을 빌어, 공자사상을 지고무상의 지위로 끌어올려, 천하의 사람들의 사상을 통일시키고, 국가의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동중서는 극력 공자가 만든 <<춘추>>를 숭상하였다, "춘추의 도리는 크게 얻으면 왕(王)이요, 적게 얻으면 패(覇)이다"라고 하였다. <<춘추>>는 "대일통(大一統)"의 관념을 지니고 있고, '육합동풍(六合同風), 구주공관(九州共貫)"을 추구했다. 이는 국가정치판도와 이데올로기의 이중통일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통치자는 <<춘추>>의 사상본질을 장악하면, 왕천하(王天下)할 수 있고, 최소한 패천하(覇天下)는 할 수 있게 된다.

 

조금 후 유향(劉向)은 <<설원, 건본>>에서 "국가는 춘추를 배우지 않을 수없다. 태어나면서 존귀한 자는 교만하고, 태어나면서 부자인 자는 오만하다. 태어나면서 부귀하고, 본받을 것이 없으면서 스스로 얻는 자는 드물다. 춘추는 국가의 본받을 것이다" 이렇게 명확히 춘추를 통치자가 필독하여야 할 책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한나라에 이르러 국가정치사상영역에서 이미 합법, 정통의 이미지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네번째 이미지는 "신화(神化)"이다.

 

공자는 한나라때 관방 및 어용학자인 동중서등에 의하여 독존으로 '정통화'되는 외에 공양파(孔羊派) 유생들에 의하여 고도로 '신화'되었다. <<춘추위.연공도>>, <<효경원신계>>등의 책에서 공자의 출생, 용모 내지 행위방식에 대하여 정교하게 날조하여 "신화"하였다. 1. 공자는 속인들과 같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는 사람과 신의 교합을 통하여 탄생했다. 공자의 부모는 니구산에 기도하여, 흑룡의 정기를 받아 중니를 낳았다. 2. 공자는 태어나면서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공자는 키가 십척이고, 입이 크고, 머리는 튀어나왔으며, 네모난 얼굴에 월각일준(月角日準), 하목용상(河目龍), 두순창안(頭脣昌顔)을 지니고 있었다" "손은 무릎을 지나고, 귀는 주정(珠庭)에 늘어지며, 눈썹은 십이채이고 눈은 육십사리이며, 서면 봉황과 같고, 앉으면 용과 같다" 3. 공자는 봉천승운의 "소왕"으로서 춘추, 효경등을 편찬했고, 후세를 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을 제정했고, 72제자를 이끌고 북극성에 제배하였다. 이때, 하늘은 "하얀 안개가 땅에 내려앉고, 붉은 무지개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황옥이 되니, 길이가 삼척이었다. 위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공자가 무릎을 꿇고 이를 받아 읽었다: 보문출, 유계악, 묘금도, 재진북, 자화자, 천하복(寶文出, 劉季握, 卯金刀, 在軫北, 字禾子, 天下服)." 이 말은 공자가 일찌기 유방이 진왕조를 대체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예언했다는 말이다.

 

일정한 의미에서 보자면, "신화"는 "정통화"에 대하여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공자에게 더욱 큰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다. 공자를 인성세계의 모범에서 신성세계의 구세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고미서>> 권25에는 신화가 하나 있는데, 아주 좋은 예이다. 노(魯)나라의 한 사람이 바다로 나갔다가 방향을 잃었다. 나중에 해상에서 공자를 만났다. 공자는 그에게 손지팡이를 하나 주면서, '눈을 감고 타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해리포터처럼 손지팡이를 타고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노나라 왕에게 공자의 경고를 전달했다: 머지않아 외적이 침입할 것이니 일찌감치 성벽을 높이 쌓아두어라. 나중에 제나라의 군대가 몰려왔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갔다.

 

다섯째 이미지는 "강화(僵化)"이다.

 

1천여년동안 전해내려오면서, 공자의 이미지는 송나라때에 점차 이학가(理學家)에 의하여 '강화'된다.

 

 사상사의 발전맥락에서 보자면, "강화"는 "정통화"가 피할 수없는 논리결과이다. 먼저, 송나라때의 황제는 공자존중의 사회분위기를 더욱 조성했다. 송태조 조광윤은 여러번 국자감에서 성대한 공자제사의식을 주재했고, 송진종 조항은 친히 곡부로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공자를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에 추존했다. 통치자의 정치적인 극력지원이 있음에 따라, 이학자들은 공자를 천리(天理)를 보호하고, 인욕(人慾)을 억제하는 '강화'된 이미지로 개조했다. 주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천리가 있으면 인욕이 망하고, 인욕이 승하면 천리가 소멸한다." "공자의 소위 '극기복례(克己復禮)', 중용의 소위 '치중화 존덕성, 도문학(致中和, 尊德性, 道問學)', 대학의 소위 명명덕(明明德)...성인의 모든 말씀은 그저 사람들에게 천리를 남기고, 인욕을 멸하라고 시키고 있다" 춘추시대의 공자사상은 풍부하고 다채로왔다. 어찌, 그저 사람들에게 천리를 남기고 인욕을 멸하라는 것만 가르쳤겠는가? 공자는 일찌기 "행유여력, 즉이학문(行有餘力, 則以學文)"이라고 하였고, "군자불기(君子不器)", 즉 사람은 당연히 여러 방면의 재능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바둑을 두고, 활을 쏘는 등 심신에 유익한 활동을 하도록 가르쳤다. 심지어 이런 생활태도를 찬양했다: "춘삼월에 봄옷을 입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교외에 나가서 놀고, 강물에서 수영을 하고, 높은 대에서 바람을 쏘이며, 그 후에 시가를 부르면서 돌아온다"

 

그러나, 이학가들은 이런 것들은 모두 버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공자를 "강화"하여 그저 천리로 인욕을 멸하라는 정치설교자로 만들었다. 청나라때의 대학자인 대진은 이학자들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이(理)라는 것은 혹리가 말하는 법(法)과 같다. 혹리는 법으로 사람을 죽였고, 후유(後儒)는 이로 사람을 죽였다" 공자의 이런 '강화'된 이미지는 후세인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근대이래로, 공자사상이 공격을 받는데, 공자의 이미지는 '추화'된다. 이것도 모두 '강화'와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