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손건화(孫建華)
오만한 악비
악비는 북송이 멸망하기 4년전에 하북 진정선무사 유합이 결사대를 모집할 때 모집에 응해서 군인이 되었다. 나중에 악비는 종택(宗澤)의 휘하에서 근무했는데, 나중에 종택을 따라 동경을 지키는데 여러번 전공을 세워, 병의랑(秉義郞)이 되었다.
조구(趙構)가 황제에 즉위한 후, 악비는 신분과 지위가 낮음에도, 송고종 조구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 내용은 곁에 두고 있는 재상 황잠선, 왕백언등은 적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해서 고토회복의 대임을 맡을 수 없으니, 황상이 직접 동경으로 돌아가서 친히 6군장병을 이끌고 북벌하여 중원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송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비를 해임한다. 악비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신임 하북초무사 장소(張所)를 만나서 그에게 중용된다. 장소는 하북초무사이면서 그의 관할구역은 바로 황하북안의 지금의 하남성, 하북성일대이다. 그리하여, 그는 수하인 도통제(都統制) 왕언(王彦)으로 하여금 악비를 포함한 11명의 통제(統制)와 7천명의 인마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금나라와 전투를 벌였다.
왕언은 도통제였는데, 통제들을 지휘하는 직위였다. 그는 분명히 악비보다 경력이 뛰어났다. 왕언은 황하를 건넌 후, 신향에 이르렀다. 금나라병사가 너무 많아서, 왕언은 병사를 신중하게 움직였다. 악비는 그가 간이 작다고 비웃었다. 그리고 혼자 부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깃발을 빼앗고 휘둘렀다. 왕언은 할 수 없이 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향을 함락시킨다. 왕언은 악비가 지휘를 따르지 않은데 대하여 질책한다. 그러나, 악비는 왕언이 적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반목하고, 악비는 부대를 이끌고 독자행동을 한다.
바로 이때, 금나라사람들은 송나라의 대군이 하북에 진입하자, 황급히 수만의 정예병사를 모아서 토벌한다. 신향을 물샐틈없이 포위한다. 왕언은 여러 병사를 이끌고 결사항전한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할 수 없이 죽음을 무릎쓰고 포위돌파전을 벌이게 된다. 싸우고 물어나고 하면서 공성(하남성 남휘현) 서산까지 물러난다. 곁에는 겨우 700여명이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험한 곳에 병영을 차리고, 완강하게 사수한다. 그리하여 흩어졌던 부하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이때, 악비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때 기세등등하게 위기에 처한 왕언에게 군량미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은 화가나서 악비를 군법에 따라 처결하자고 한다. 그러나, 왕언은 악비를 풀어준다. 그리고 술상을 차리고, 현재 황량한 산에 갇혀 있어, 남은 양식이 없으니, 악비보고 돌아가서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한다. 그러나, 악비는 이런 위기의 시기에 부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동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종택에게 돌아간다.
고종 6년 2월, 본부는 왕언이 부대를 잘 관리하여 그를 양양지부, 경서남로안무사로 승진시긴다. 왕언은 악비가 형양번방면군사령관으로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맡지 않는다. 장준수는 왕언을 행영전호부군도통제, 도독부참모군사로 삼도록 주청을 올린다. 현재의 문제는 왕언은 왜 경서남로안무사, 양양지부로 승진할 때, 악비가 형양번을 통제하고 있다고 하여 사임하고 맡지 않았을까?
유일한 원인은 바로 악비가 당시 마음대로 하북의 전쟁터에서 떠나버린 행위는 명실상부한 전장터에서 도망친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왕언의 마음이 좁은 것이 아니라, 악비가 교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밑에서 있고싶어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도망친 악비
고종3년, 금나라 올술이 대거 진공해오고, 두충은 건강으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금나라에 항복한다. 악비는 2000여명을 이끌고, 강소성 의흥 일대에서 항전한다. 금나라 올술의 10만대군이 항주로 돌격할 때, 악비는 금군과 싸워 6전 6승을 거둔다. 그러나 그 지역은 금나라군대에 노략질당하여, 부대의 식량이 끊긴다. 악비는 굶어죽을지언정 부하들이 백성들을 약탈하지 못하게 한다. 금나라군대가 북으로 돌아갈 때 한세충이 금나라군대를 공격하는데, 악비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우두산에 매복을 하고 4전4승을 거둔다. 그리고 이미 비어있던 건강성을 수복하여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다. 고종도 그를 높이 평가한다. 단 1년의 기간내에 통태진무사가 되고 장준의 지휘를 받아 회동을 방어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때, 악비는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일이 벌어진다.
태주와 양주는 장강 및 강소의 대문이다. 전략적인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비록 나중에 악비가 명을 받아 초주를 구하러 가고, 유광세가 명을 받아 증원되어 와서 통,태주를 수비하지만, 악비의 원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태주로 돌아간 후, 그해 11월 금나라군대가 진격해오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태주를 버리고 장강을 건너 강음 사주로 가버린다. 비록 <<송사. 악비전>>에서는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만일 안되면 사주에서 백성을 보호하고 반격을 기회를 노리라는 성지가 있었다. 악비는 태주가 험준한 곳이 없어 지키기 힘들다고 보고 시허로 물러나서 지켰다. 남패교에서 싸우는데 금나라를 대파한다. 백성을 사상으로 장강을 건너게 하고, 악비는 정예기병 이백으로 지키니 금나라 병사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악비는 태주를 잃은 죄를 청했다"
만일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왜 지키지 못한 죄를 청했을까?
악비등이 회동에서 싸울 때, 섬서를 모두 잃었다. 사천도 위기일발이었다. 만일 사천을 빼앗기면, 운남, 귀주도 지킬 수가 없었다. 금나라는 장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강소절강으로 내려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남송의 대세는 기우는 것이다. 다만 이처럼 여러 장수들이 속속 웅크리고 있을 때, 진봉로 부총관 겸 봉상지부의 직위를 가진 오개는 패주하는 병사 수천을 모아서 동생 오린과 함께 적을 거슬러 공격하여 지금의 보계 서남쪽에서 이름없는 화상원에서 봉상의 금나라군대를 막아낸다.
한중은 사천을 지키는 최후의 전략요지이다. 자고로 사천을 취하려면 먼저 한중을 취하여야 한다. 반대로 사천을 지키려면, 반드시 한중을 지켜야 했다. 화상원은 한중의 앞부분이다. 수직거리는 약 160킬로미터이다. 오개가 화상원을 지켜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건너편의 봉상부성이 원래 그가 지켜야할 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언, 유자우등 명장과 같이 원래 부평회전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패전하면 회복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봉상을 적이 점령한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었다. 이때 그는 한중으로 물러나 있었고, 여러 장수들과 병사를 모았다. 아무도 그를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중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직분을 지키는 위험한 길을 선택한다.
더욱 존경스러운 점은 그들이 여기서 굳게 지키고 있는데, 본부에서는 아무도 그가 외로이 군대를 이끌고 이 곳에 있는 줄을 몰랐다. 부하들 중에서 일부도 그가 공연히 애를 쓴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해서, 심지어 그들 형제를 붙잡아 금나라에 바칠 것을 공모하기도 하였다.
금나라사람도 당연히 오개가 자기들의 앞길을 막는 것을 그냥 두고보지는 않았다. 여러번 병사를 일으켜 공격했는데, 모두 오개에게 패하였을 뿐아니라, 송나라군이 적은 수로 많은 수의 금나라군을 격파하는 첫번째 사례를 만든다.
이는 금나라 올술이 송고종 3년 10만대군이 한세충에 의하여 패배하여 도망친 후, 처음으로 송나라군에게 같은 수량의 비율로 참패한 것이다. 올술은 옷을 바꿔입고, 수염을 깍고 변장을 한 후에야 겨우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송의 이후 5대주력중 오개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금나라군과 직접 대면해서 작전을 벌인 사령관이다.
똑같은 열세였고, 똑같이 험준한 방어물이 없었고, 똑같이 식량이나 지원군이 없었는데, 하나는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본직을 포기했고, 적의 앞에서 도망쳤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명령이 없는데도 스스로 나서서 적을 맞이하고, 본직을 지켜냈다. 하나는 장강방어선에서 3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촉의 입구요충인 한중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가는 일목요연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서에서 왜 '악비가 방어하지 못한 책임으로 죄를 청했다'는 이유이다.
오개와 악비의 대비를 하는 것은 악비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역사지위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엄숙하게 대하고, 역사인물을 엄숙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진실한 악비
악비의 품격은 모두 존경할 만하다. 그는 확실히 영웅이라 할만하다. 다만, 그를 완전무결한 지위로 끌어올리고자 한다면 그것의 역사의 진상이 아니다.
악비가 생활하던 시대에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송사>>에 그를 미화한 부분이 적지 않지만, 우리는 그래도 여전히 알아낼 수 있다. 악비는 당시의 지위가 '여러 장수'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머지는 한세충, 장준, 유기, 오개, 유광세이다. 이들은 금나라에 항거한 공적이 악비에 못지 않다. 여기는 앞의 종택이나 나중의 우윤문등은 포함되지도 않은 것이다.
악비의 "악가군"은 군기가 삼엄하고, 굶어죽어도 약탈하지 않았고, 얼어죽어도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종택의 수하로 통제를 맡고 있을 때, 그가 이끄는 부대는 마찬가지로 백성을 약탈했다. 그가 피살되었을 때, 거의 아무도 그를 위하여 좋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많은 부하들은 진회의 편을 들어 그를 모함했다. 그저 한세충만이 교분을 생각해서 한마디 해주었을 뿐이다. 이로써 볼 때, 그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죽은 후 수십년이 지나서 주전파가 우세를 점한 후에 장준의 북벌선전에 맞추어 남송조정은 그를 명예회복시켰다. 그러나 이때의 북벌은 다시 실패한다.
원나라때, 한족은 북방유목민족에 정복당한다. 한,당이래로 쌓아왔던 자존심이 다 무너진다. 자신감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를 과장하는 환상에 젖게 된다. 그리하여 악비의 공적을 찬양하므로써 사기를 고무시킨다. <<금사>>와 <<송사>>는 모두 원나라때 탈탈(脫脫)이 편찬한다. 원래 아주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자세이 이 두 책을 살펴보면, 문자품격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확실히 송나라에 치우쳤다. 송나라의 항금활동은 많이 미화되었고, 금나라의 전적은 그저 한마디로 덮어버렸다. 왜냐하면 금나라가 송나라보다 먼저 망하였고, 원나라에서 사서를 편찬할 때 대다수가 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항금전적은 미화된 측면이 많다.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소설등이 나타나면서 더욱 과장된다. 이리하여 사실에서 점차 더 멀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역사사실에 근거하면, 만일 악비의 주장처럼 단일부대를 이끌고 적진에 깊숙히 들어가면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여진인들은 이미 북방에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중원은 여진인들이 지원하는 괴뢰정권이 있었다. 송나라와 금나라는 중원에서의 교전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자주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아무도 손쉽게 상대방을 소멸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악비도 백전백승의 장군은 아니다. <<금사>>를 보면 여러번 그가 패전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만 <<송사>>에서는 이를 숨기고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일 것이다.
역사인물을 평가하는데에는 나누어 보아야 한다.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영웅이미지수립에도 불리하다 사람들에게 허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악비의 공과득실을 분석하는 것은 그의 신분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이미지를 더욱 풍만하게 하여 역사의 진실에 더욱 접근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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