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뇌이(雷頤)
"선견포리(船堅砲利, 선박은 튼튼하고 대포는 날카롭다)" 이것은 근대중국인들이 서방열강에 대한 최초의 인상이다. 그러나, 청나라정부가 근대해군을 만드는 과정은 파란만장했고, 순조롭지 못했다.
제1차아편전쟁에서 직접 영국침략군과 교전한 임칙서는 근대해군의 위력을 심각하게 느꼈다. 그래서, "사이장기이제이(師夷長技以制夷,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서 오랑캐를 제압한다)"를 주장한다. 이것은 최초의 근대해군을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다만, 당시 조야는 여전히 세계대세에 몽매했고,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은 여전히 중국바깥의 '오랑캐들이 사는 나라"였다."사이조선(師夷造船, 오랑캐에게 배워서 배를 만드는 것)"은 "천조"의 체제를 잃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현상에 만족하고, 선박을 사거나 선박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임칙서는 군대군함을 구매하고 모방하여 만들자는 생각은 조야상하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치고, 도광제는 심지어 임칙서가 배를 만들자고 건의한 상소문에 답변으로: "완전히 헛소리"라고 썼다.
임칙서의 근대해군을 만들자는 주장이 부정되면서, 유명무실하고, 낙후부패하였으며, 일찌감치 한주먹감도 되지 않는 녹영수사(綠營水師)는 당시 중국의 유일한 수군이었다. 비록 나중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군(湘軍)이 강남에서 여러차례 태평군과 수전을 펼치면서 부득이 수사(水師)를 둔다. 그러나 여전히 구식수군이었다. 제2차아편전쟁시기에 영국프랑스침입군은 해상으로 진공했고, 결국 수도로 직접 진격했다. 이는 조야를 진동시킨다. 일부 사람들은 근대해군의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1860년대초 청나라조정은 서방에서 군함을 사오거나 모방하여 건조할 것을 생각한다. 이때는 임칙서가 근대해군을 설치하자고 건의한 때로부터 꼭 20년이 흘렀을 때였다. 그리고 바로 이 20년간, 서방의 해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증기선은 이미 범선을 점진적으로 대체하여 해군의 주요한 선박이 되었다.
1874년말, 이홍장은 만자에 이르는 <<주의해방절(籌議海防折)>>을 올린 바 있다. 청나라조정은 이전보다 해군건설을 중시하기 시작하니, 바로 북양해군의 시작이다. 그러나, 중국의 길다란 해안선과 험악한 국제정세를 비교하면, 청나라조정의 해군에 대한 중시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10년동안, 해군의 발전은 이상적이지 못했다. 북양해군외에 나머지 남양, 복건, 광동의 세 수사의 발전은 아주 느렸다. 더욱 중요하고, 현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바로 전국에 통일된 해군지휘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수사는 현지의 독무(督撫)가 관할했다. 그리하여 합동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각 독무는 수사를 자기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여 이동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예를 들어, 복건은 남양관할인데, 남양대신은 명의상 복건수사에 대한 지휘권이 있었다. 그러나, 1879년 5월 양강총독 겸 남양해방대신인 심보정(沈?楨)은 남양각성의 매2달에 한번씩 오송구로 불러모아 훈련을 1차례씩 함으로써 서로 협력하기 좋게 하고, 긴급상황하에서 서로 지원작전을 펼치게 하자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복건장군 경춘, 민절총독은 각종 이유를 들어 미루었다. 남양해방대신의 명령으로도 자기가 관할하는 수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면 전국해군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청나라조정은 여전히 전통수사를 관리하는 방법으로 근대해군을 관리하고자 했다. 근본적으로 근대해군의 장비와 기술이 상당히 복잡하여 반드시 통일되고, 계통적으로 관리하여야 하며 그 수준은 예전의 수사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물며, 조야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육부(六部)에 없으면서 겨우 '오랑캐'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 것은 '오랑캐의 것으로 중화를 바꾸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서방화'라고 질책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10년후, 1884년 8월 중국과 프랑스의 마강전투가 발생하는데, 이는 중국근대해군이 조직된 이래 첫번째의 대외전투이다. 그러나 복건수사는 거의 전멸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얻는다. 해군의 참패는 청나라조정으로 하여금 해군건설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다. 1885년 6월에 반포한 상유에서, 비록 일찌기 조선공장을 건립하고, 해군을 만들었지만, "배는 견고하지 못하고, 무기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장수를 잘 뽑지 못했고, 비용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주요한 실패원인으로 꼽았다. 그리고, "과거를 징벌함으로써 미래의 교훈을 삼고 수사를 잘 다스리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연해각 독무는 "각자 견해를 밝히고, 확실하게 논의하여 신속히 상소를 올리라"고 한다. 이는 10년전에 일찌기 '해상방어를 논의'한 이후의 두번째 해상방어논의였다.
모든 상소문중에서 좌종당(左宗棠)과 이홍장(李鴻章)의 상소가 가장 조정으로부터 중시받았다.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을 자기 손으로 만든 바 있는 좌종당은 전국해군지휘가 없는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복건수사가 전멸한 것이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그는 즉시 조정에 상소를 올려, "해방전권대신" 혹은 "해부대신"을 두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일체의 해상방어의 권한을 그 대신이 통일적으로 처리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장병선발, 물자조달, 선박건조, 대포제조의 전권을 주고, 관청은 장강에 두어, 남으로는 민월(복건,광동)을 장악하고 북으로 수도를 보위하도록 하며, 대신은 혹은 관청에 앉아서 일을 보고 혹은 돌아다니면서 순열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머리서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부신(副臣)'을 한 명두어 관청에 있을 때는 보조적인 일을 처리하며, 나갔을 때는 남아서 일을 처리하도록 한다. 이 대신은 책임이 중대하므로반드시 인품이 훌륭하고,서학에 정통하며, 중국과 외국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 맡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 상소를 받은 후 서태후는 '의지(懿旨)'를 반포하여, "해상방어업무는 군기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왕대신이 이홍장과 함께 논의한 후 보고하라. 순친왕 혁현과 함께 논의하고, 모든 좌종당등의 상소를 살펴보라"
통일된 해군지휘기관이 없는 위험에 대하여 이홍장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찌기 1884년 2월말, 즉, 중국프랑스 마강해전 반년전에 그는 일찌기 총리아문에 "해부"를 두어 전국해군을 통할하게 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당시 총리아문은 "해방"아문을 두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연해칠성의 해군건설임무를 한 중신이 통할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기구는 북경에 두지 않고 연대(煙臺)에 두려고 하였다. 이는 직급도 낮고 실권도 적은 기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지방대신일 뿐이다. 이 제안에 대하여,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해부겸해군을 둘 것을 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여기서 위의 방안을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땅이 넓은대. 여순, 대련에서 대만, 해남도까지 동일한 지방대신이 주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한 사람의 힘이나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총리아문에 이 대신의 지위와 권한이 너무 크면, 중앙권력이 약화되므로, "외신이 강해지고 내정이 약해지는"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의견은 직접 북경에 중앙기관인 "해부"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달리 지방색채를 지닌 "해방아문"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방각국의 "외부(外部, 외교부), 해부(해군부)는 관청을 수도에 두는데, 해부의 체제도 다른 부와 비슷하게 해야 하며,모든 병권과 군수조달권과 인사권을 주어야 하고, 다른 부의 제약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해군은 근대중국의 새로운 군대형태라는 것을 알았고, 지방성 근대해군은 이미 강대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만일 중앙에 해부를 둔다면, 반드시 완고파의 더욱 큰 반대를 받을 것이고, '오랑캐의 제도로 중화를 바꾼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해군이 외국오랑캐로부터 전래된 것이므로 배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논의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싫어하나, 사실 완전히 초재진용(楚材晋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총리아문이 '해방(海防)"이라는 용어를 쓰고, "해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는 고충은 이해되고, 원래 뜻은 "남의 실질은 따르지만, 남의 이름은 피하겠다"는 것이며, 이로써 완고파의 반대를 피하고자 한다는 것도 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직접 "해부"라는 두 글자를 써야한다는 것이다. '해방'이라는 두 글자를 쓰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뜻에 불과하므로, 국가의 위엄을 떨쳐서 적의 위풍을 멸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외환이 이처럼 엄중한데, 직접 수도에 '해부'를 설치해야지 비로소 응급조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은 원래 '해방아문'의 설치에 소극적이었는데, 이홍장이 반대하자 이 일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당연히, 이홍장의 "해부"를 설립하자는 더욱 급박한 건의는 더더욱 조정의 찬동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반년후에 중국해군은 마강에서 참패한다. 조정은 다시 해방을 논의하고, 전기가 생긴 것이다. 이홍장은 자연히 10여년을 기다려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즉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서, 총분히 전국적인 해군아문을 두어야 할 이유를 전개하고 논술한다. 이 장문의 상소문에서 이홍장은 개별사안별 대책을 논한 것이 아니라 상세하고 전면적으로 10년이래의 근대해군건설의 어려웠던 역정을 회고하고, 해군사업의 발전청사진을 제출한다. 그는 이 몇해동안의 자신의 생각을 모두 토해낸다. 글자의 행간에서는 조정의 해군사업에 대하여 충분히 중시하지 않아준데 대한 불만과 이후 조정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었다. 그는 각각 선박, 함대, 조선, 군항, 부두, 포대, 학교등 여러 방면의 구체적인 상황을 논했다. 이홍자의 소개가 이처럼 상세한 것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고, 동시에 약20년전에 그가 총포탄약, 증기기관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소개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청왕조 근대화의 계몽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해군인재를 배양하고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창설하는데 겪은 여러가지 곤란과 효과가 미진했음을 논하면서 그는 더욱 감개했다. 조정에 대한 불만이 말에서 드러난다. '조정이 이 일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 세가의 뜻있는 자들이 가서 배울 곳이 없었다' 이홍장을 포함한 미신(微臣)들은 상소에서 조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적으로 불만의사를 드러낸 것은 그가 신식해군인재에 대한 배양이 해군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조정에서 중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과거제"는 신식해군학교의 건설에 장애가 되는 중요요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이 '바른 길(正途)'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반드시 해군학교학생은 '진사와 동등하게 대우해주고, 다 배우고 나면 정도(正途)와 마찬가지로 중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새로운 자격증'과 '옛날 자격증'간에 어떻게 서로 등급을 맞출 것인지에 대하여, 어떻게 직책을 임명하고 승진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논하고 있다. 만일 정말 해군사업을 펼치려면 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상소에서 경비를 마련할 각종 방법도 논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확실히 전국을 통할하는 해군아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서방국가는 수군을 두면서 해부를 두지 않는 곳이 없다. 즉 일본은 해군을 별도로 두어 이를 통할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남양, 북양으로 나누고, 각성에는 별도의 지방신하가 있어, 서로 이동하기 힘들고, 의견도 통일되지 않는다. 많은 규장제도가 서로 다르다. "각성의 역대 지방관리의 뜻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고, 방식이나 명령이 서로 각양각색으로 다르며, 남북양대신도 통할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이런 혼란상황에서 어찌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의 전국적인 지휘기관을 설립하지 않을 것인가? 그저 "육부"의 구제도를 지키기만 하고, 오랑캐로부터 왔다는 이유만으로 해군아문의 신설을 반대할 것인가?
이홍장의 상소를 받고는 청나라조정도 아주 이치에 맞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에게 북경으로 오게 하여 중앙의 각대신들과 함께 이 일을 논의했다. 9월 30일, 청나라조정은 군기대신, 총리아문왕대신에게 이홍장과 함께 해상방어의 일을 논의하게 하였고, 순친왕 혁현도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마지막에 총리아문이 다시 보고하여, 해부 혹은 해방아문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왕대신을 파견하여 그 일을 담당하게 학자 하였따. 해전에 참전할 수 있는 선박수가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잠시 먼저 북양의 몇 선박으로 정예해군을 양성하고, 나중에 다른 함대를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각지 독무의 상소도 대부분 통일된 해상방어를 주장하였는데, 구체적인 조치는 서로 달랐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10월 12일 의지를 반포하여, "총리해군사무아문(간칭 해군아문)"을 두는데 동의했다. 순친왕 혁현이 총리가 되고, 경친왕 혁광, 이홍장이 회판(會辦), 증기택(曾紀澤)이 방판(幇辦)이 되었다. 해군아문을 설립한 후, 북양해군을 먼저 정예화하기 위한 방침으로 북양해군은 신속히 발전한다. 1888년 10월, 청나라조정은 이홍장이 구체적으로 북양해군을 책임지는 <<북양해군장정>>을 비준한다. 이는 북양해군의 정식창설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군아문이 성립되었고, 전국의 해군사무를 통할하게 되었지만, 그 총리, 회판, 방판은 모두 겸직이었다. 아무도 해군아문의 일만을 담당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청나라조정은 해군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해군아문은 더 일찍 설립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전직으로 담당해야 했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오랫동안 구식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럴 식견과 용기가 없었다. 현대해군는 반드시 통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일종의 보편적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날 수군을 관리하던 경험을 그대로 견지하며 현대해군을 관리한다. 구기관은 없애지 못했고, 신기관은 감히 새로 만들지 못했다. 그저 거대한 실패를 거쳐, 통타를 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설립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청나라정부는 적극적으로 변혁을 시도한 적이 없고, 대부분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응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확실히 병이 이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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