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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마잉주 집안내력 탐방

by 중은우시 2008. 6. 6.

글: 이영강(李榮剛) <<환구인물>> 기자

 

호남성 장사(長沙)의 서남쪽에 있는 상담(湘潭)현 백석향(白石鄕) 마가언(馬家堰)에는 사문전(寺門前)이라는 곳이 있다. 2008년 3월 22일을 전후하여 이 곳의 사람들의 눈은 해협 동쪽의 대만섬으로 향했다.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대만에서 진행되는 선거였다.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와 민진당의 세창팅(謝長廷)간의 대만총통선거였다. 마잉주가 선거참여를 선언한 때로부터 최종승리때까지 전체과정을 그들은 주시했다.

 

이들은 바로 마잉주의 대륙에 있는 친척들이다.

 

3월중순, 기자는 마가언으로 갔고, 사문전을 방문했다. 마잉주의 집안내력을 조사하기 위하여서이다. 우연하게도, 기자가 현지에 도착하여 인터뷰를 할 때, 마씨종족은 족보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들과 얘기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놀랍게도, 마잉주의 조상은 원래 성이 마(馬)씨가 아니라, 조(趙)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남의 봄은 자주 비가 내린다. 하늘 가득한 빗속에 기자는 상담현 백석향으로 갔다. 이곳은 전형적인 남방의 구릉지대였다. 눈을 들어보면, 곳곳에 기복이 있는 녹색지역이다. 기름보다 값진 봄비를 맞으면서, 논밭, 수목, 들풀은 아주 파랬다. 공기도 맑았다. 상강의 강물은 조용히 흘러서, 백석향의 동남부쪽으로 지나갔다.

 

마잉주의 조적(祖籍)인 사문전은 바로 이렇게 대자연이 돌보아주는 지역이다. 한 마을노인이 길을 안내해주어서 기자는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사문전은 상강의 서안에 있고, 오래된 부두는 강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속에 다른 곳과는 다른 역사의 무게가 느껴졌다. 부두를 보고, 시골노인은 기자를 데리고 하얀색의 2층짜리 작은 집으로 데려갔다. "마씨집안사람들은 이곳에서 족보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으면 마씨집안의 역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는 작은 집으로 들어갔고, 나이가 예순은 넘어보이는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마씨육수족보이사회(馬氏六修族譜理事會)"의 위원인 마영귀(馬英貴)였다. 기자가 온 이유를 설명하자, 마영귀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마잉주는 나와 같은 배분입니다. 우리는 호전마씨(湖田馬氏, 호전은 마잉주의 조상이 호남에 옮겨와서 처음 자리잡은 곳임)의 제22대손입니다. 모두 '영(英)'자돌림입니다. 족보안에서 '상존대인, 영재계기(上尊大人, 英才繼起)'에서 딴 것입니다"

 

마영귀는 말을 하면서 기자를 또 다른 노인에게 데려갔다. 그는 마씨족보를 관리하는 마대양(馬大洋)이었다.

 

마잉주는 여러번 자신이 동한의 명장 마원(馬援)의 후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기자는 이에 대하여 마대양에게 확인을 구했다. 노인은 시원시원하게 <<호전마씨오수족보>>와 <<호전마씨육소족보(초본)>>을 보여주었다. "마원은 동한의 명장입니다. 공을 세워 복파장군에 오릅니다. 그의 후손은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는데, 호남상담의 호전마씨도 그 중의 중요한 한 갈래입니다." 족보에 따르면, 마잉주가 마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전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잉주의 조상은 마씨가 아니라, 조씨였다고 한다. 즉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이다. 조사는 하북 한단에서 출생하였고, 조나라군대를 이끌고 진나라군대를 물리쳤다. 공로가 탁월하여 조나라 왕이 그에게 '마복군(馬服君)'이라는 호를 내린다. 이때부터 마잉주의 조상은 성을 마씨로 바꾸고 현재에 이른다.

 

마대양노인이 보기에, 마씨선조가 생활하고 활동한 궤적은 하나의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하북한단에서 시작한 마씨가족은, 동한때까지 명성을 떨친다. "마원은 일생동안 남북각지를 다니면서 전쟁을 치렀고, 나중에 섬서성 무릉현에 자리잡습니다. 그에게는 마발(馬拔)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자가 부풍(扶風)입니다. 마씨집안은 공로가 커서, 그 마을은 부풍필공촌(扶風畢公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마잉주의 조적이 섬서 부풍이라고 보도하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1335년, 마씨의 조상은 강서로 이주한다. 주원장의 홍건군에 가담한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파양호에서 격전을 벌일 때, 주원장은 적은 수로 진우량의 군대를 격파한다. 마씨조상은 명을 받아 진우량을 추살했고, 강서에서 호남으로 들어온다. 이때부터 상담현에 자리를 잡게 되고 후손을 늘여간다.

 

전국시대부터 지금까지, 2000여년동안, 하북에서 섬서, 다시 강서, 최종적으로 호남으로 오기까지 족적은 거의 중국의 절반에 걸쳐 있다. 무수한 후손들이 남북으로 다니면서 전투를 했고,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

 

마잉주의 여러 선대들 중에서, 지금까지 고향사람들에게 명확히 인상을 남긴 사람은 부친인 마학릉(馬鶴凌)을 제외하고는 조부인 마립안(馬立安)이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속에 마립안은 아주 관후하고 중국문화전통이 골수에 스며있는 시골선비였다.

 

마립안은 청나라 동치연간(1868년 2월 12일)에 상담현 마가언 사문전에서 태어났고, 민국16년(1927년) 형산 형산현에서 사망한다.

 

마립안은 어떤 인물인가? 기자의 이 질문에 마대양 노인은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기자를 데리고 부둣가로 가서, 청석판을 따라 올라갔다. 오래지 않아 근 100년이 된 세 개의 석비앞으로 데려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원래 마립안등의 마가언 사람들이 돈을 내서 부두를 만든 공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공덕비의 옆에는 두 개의 석사자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반세기 가량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후세인들에게 마립안등의 공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석사자의 눈썹은 이미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이것들을 볼 때마다 마립안을 떠올린다.

 

석사자를 뒤로 하고, 마립안의 대에 이르러 마씨의 가업은 이미 상당히 컸다. 마립안은 장사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주철그릇공장, 도축장, 정미소등. 마씨의 점포는 아주 많았다. 대부분이 강가에 세워져 있어, 교통이 아주 편리했다. 그리하여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회계관리하는 선생만 3명을 불러놨었습니다" 이외에 마씨는 300여무(1무는 200평)의 논이 있었고, 40여명의 일꾼을 고용했다. 관리인도 여러명이었다.

 

당시 마가언 일대에는 마립안의 집안이 의심의 여지없는 명문집안이었다. 재산을 많이 모은 마립안은 고향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망 지나온 부두도 마립안이 돈을 내어 만든 것이고, 부근의 나가패용산교, 진강구의도, 육영당등을 지을 때에도 마립안이 돈을 냈어요"

 

후세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마립안은 "황금비보서위보, 만사개공선불공(黃金非寶書爲寶, 萬事皆空善不空, 황금이 보배가 아니라 책이 보배이고, 모든 일이 헛되지만 선행은 헛되지 않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이 유언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교육을 중시하고 선행을 중시하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나중에 이 14글자는 마씨들의 조훈(祖訓)이 된다. 마잉주의 대만 사무실에도 이 글이 걸려 있다고 한다.

 

마옥소(馬玉昭) 노인은 이런 노래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남북이병기만천, 인인취도사문전, 호남단총수제일, 천하문명마립안(南北二兵幾萬千, 人人醉倒寺門前, 湖南團總誰第一, 天下聞名馬立安)" 이것도 마립안의 또 다른 선행에 대한 칭송이다. 청나라말기부터 민국초기까지, 마립안은 단련(團練, 옛날 지방선비가 도적과 비적에 대항하고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조직한 무장부대)을 10여년간 이끌었는데, 자주 자기집안의 돈을 내서 부근 지역의 군대를 먹였다. 그리하여 상담, 형양일대의 인사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고, 그를 "상중제일단총(湘中第一團總)"이라고 불렀다.

 

마립안의 족적을 찾기 위해서는 마씨집안의 고택(古宅)을 가보지 않을 수 없다.

 

부두 남쪽으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황무지가 있다. 풀을 뽑으면, 낮은 담장의 흔적이 나타난다. 이곳에 바로 마잉주집안의 집이 있던 곳이다. 무성한 풀 숲에는 기와조각이 적지 않게 흐트러져 있다. 벽돌이 흙 속에 박혀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기초의 분포로 보아서 예전에는 아주 큰 집이었을 것이다. 개략 100년전에, 마립안의 족적은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마립안의 마지막 행적은 사문전에서 찾을 수가 없다. 상강의 둑을 따라 남쪽으로 5킬로미터를 가면 바로 마립안이 영면한 곳 차은사향 쌍양평촌이 나온다. 마을 입구를 들어가니, 두 노인이 맞이하는데, 기자의 증명서를 요구한다. 이 관문을 통과한 후 촌지부서기의 집으로 갔다. 그는 담배를 붙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우리가 너무 경계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어떤 홍콩 대만의 매체들이 무책임하게 마잉주의 조상묘가 현지 백성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하였는데, 전혀 그런 일이 없다. 우리는 마씨의 조상묘를 잘 보호하고 있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우산을 들고, "가자, 우리가 같이 가보자. 한번 보면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쌍양평촌의 촌지부서기의 집에서부터 진흙탕길을 100미터정도 걸어가자, 시멘트도로가 나왔다. 이 도로는 마씨조상묘까지 가는 도로로 닦은 것이다. 개략 100미터 되는 곳이 바로 마씨조상묘이다. 비록 마씨의 고택은 세월의 풍상으로 이미 사라졌지만, 마립안이 영면한 마씨조상묘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촌지부서기는 이 묘는 1928년에 만들어졌고, 한백옥석비와 시멘트묘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삼합토(三合土, 흙, 모래와 석회를 섞은 것)로 되어 있어 아주 견고하다고 하였다.

 

쌍양평의 한 촌민은 마씨의 후손이 아주 흥성하여, 이 묘는 항상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기자가 마잉주 조적지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마잉주의 부친인 마학릉과 관련된 일이었다.

 

83세의 마옥소(馬玉昭)는 마잉주의 당저(堂姐)이다. 그의 부친은 마포생(馬浦生)으로, 마립안의 첫번째 처인 유씨(劉氏, 1915년 서거)소생이다. 마학릉은 마립안과 두번째 처인 향씨(向氏)소생이므로 두 사람은 동부이모의 형제간이다. "이숙(二叔, 마학릉)은 나보다 5살이 많아서, 나는 그와 친했어요. 그리고 말이 통했죠. 1980년대초에 대륙과 대만이 직접 통신되지 않았을 때 나는 편지를 미국으로 보내고, 다시 대만의 이숙에게 전해지게하였죠. 그래서 직접 통신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숙에게 편지를 더 많이 보내게 되고, 이숙도 시간이 있으면 회신했어요"

 

마옥소가 보기에, 그의 이숙 마학릉은 체육선수였고, 애향, 애국하는 사람이었다. "토비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조부 마립안은 가족을 이끌고 형산현에 가서 생활했어요. 그 때 이숙의 나이가 아직 어렸지요." 마옥소에 따르면, 이번에 어쩔 수 없는 피난은 마학릉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남악 형산의 산자락아래에 "악운(岳雲)"이라는 중학교가 있다. 1935년에서 1940년까지 마학릉의 중학시절(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를 초중, 고중으로 하여 중학교로 부름)을 여기에서 보낸다. 그의 교육, 국문, 물리, 역사과목은 모두 성적이 괜찮았다. 그중 체육이 특히 강했다. 당시, 체육주임인 양일남 선생의 지도하에 마학릉은 중학2학년때 호남서운동회 만미터 우승을 차지한다. 그 후에 여러번 400미터, 800미터, 1500미터와 1만미터의 우승을 했다.

 

여러해 이후, 대만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마학릉은 악운중학에 1만달러를 기부했고, "일남체육장학기금"을 설립했다. 이로써 모교와 은사에 대한 감사의 정을 나타냈다. 그는 모교에 대련을 보내어 조국이 강성하기를 기원했다.

 

악치남천, 만천도리흥중국(岳峙南天, 萬千桃李興中國)

운비사해, 십억염황진대동(雲飛四海, 十億炎黃進大同)

 

마옥소는 또한 마학릉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숙은 형산에서 그의 가장 고귀한 시절을 보냈고, 그는 나중에 자신을 형산사람이라고 했어요.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듣고는, 내가 6페이지의 편지를 썼죠. 증거를 찾고 이치를 설명해서 그에게 우리는 모두 상담사람이라고 말했죠. 서신을 받자 바로 이심(二, 숙모 즉 마학릉의 부인이자 마잉주의 모친)이 전화를 해와서, 나보고 말이 많다고 이숙이 안좋아한다고 말해줬어요. 그래도 난 겁나지 않아요,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그 이후 마학릉은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가 상담사람이라고 말했다

 

마학릉이 고향을 떠난 이후, 마옥소가 다시 마학릉을 만난 것은 1995년이다. 그해 5월 19일, 마학릉 일행 16명은 장사로 돌아왔다. 이는 그가 고향을 떠난 지 40년후의 첫번째 대륙방문이었다. 장사의 상강호텔에서, 마학릉은 대륙의 친척, 친구를 만났다. 당시의 상황을 말할 때면 마옥소는 아직도 감정을 가누지 못한다. "이숙의 상담사투리는 아주 괜찮았어요" 그날 저녁, 친척, 친구들이 떠난 후, 마학릉은 마옥소를 남으라고 하고는 상담말로 밤늦게까지 얘기했다. "비록 내가 그의 조카딸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보다 5살밖에 어리지 않아서, 우리는 옛날 얘기를 밤새워 했지요. 나는 당시에 시간이 그렇게 빨리간 줄 몰랐어요. 내가 할 말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장사를 떠나서 대만으로 갔지요"

 

마옥소는 지금까지도 한 가지 일을 후회하고 있다. 2005년 청명절날, 마학릉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와 함께 섬서로 가서 조상을 찾아뵙고 싶다는 것이었따. "나는 알았어요. 이숙은 나같은 늙은이에게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하는 것을. 그래도 나는 그 때 응락하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다음 해에 이숙은 떠났어요. 만일 세상에 후회약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제일 먼저 사고 싶어요"

 

상담현성의 어느 깊은 골목속에 "중의부교수 유조례 의우(醫寓)", "상담현 삼포친우연의회", "중의의원연합문진부"라는 몇개의 간판이 있는 2층짜리 작은 집이 있다. 이곳이 마잉주의 사촌형인 유조례(劉肇禮)의 집이다.

 

기자가 유조례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마침 집에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한 눈에 건너편 벽에 마학릉이 쓴 글이 쓰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조례의 딸은 중약을 자르고 있었다. 그녀는 기자가 그 서예작품을 보고 있자, "그 글은 나의 외삼촌이 1989년에 내 부친을 만났을 때, 부친이 고향말로 더빙한 비디오를 주가 감격하여 써준 것이예요"라고 말했다. 네모난 선지위에 마학릉은 행서로 이렇게 썼다: "할별가원사십년, 사간녹영칠정전. 고아탁립수가호, 절부여생숙애련. 여묘이위황초식, 강향유공고괴면, 임안미허가귀거, 노루종횡감만천(割別家園四十年, 乍看錄影七情煎. 孤兒卓立誰呵護, 節婦餘生孰愛憐. 廬墓已爲荒草蝕, 江鄕猶共古槐眠, 臨安未許歌歸去, 老淚縱橫感萬千)"

 

기자가 그 글을 음미하고 있는데, 돌연 소리가 들렸다. "기자가 왔어요" 기자가 바라보니 자켓을 입은 어른이 걸어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유조례였다.

 

유조례는 외삼촌 마학릉에 대하여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조례의 모친은 마운영(馬雲英)으로 마학릉의 친여동생이다. 1948년 마학릉이 대만으로 간 때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오누이는 소식이 철저히 끊겼었다. "1975년이 되어서, 사촌여동생(마학릉의 첫째딸)이 미국에서 서신을 우리에게 보내와서, 처음으로 연락이 되었어요"

 

"나중에, 외삼촌이 우리에게 서신을 보냈고, 여러번 나와 모친을 그리워하는 말을 했어요. 이전에는 소식을 몰라서, 매번 우리 모자를 생각할 때마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와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마학릉은 하루빨리 여동생을 보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생각했고, 1989년에 겨우 친척방문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1989년 5월, 대만은 대륙 교직원들이 대만으로 친척방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마학릉은 여러가지 힘을 써서, 여동생 마운영과 외조카 유조례가 대만으로 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다. 1990년 10월, 마운영과 유조례 모자는 대만으로 갔다. 비행기가 대만 도원공항에 내려앉을 때, 마학릉은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와서 동생의 손을 붙잡고 통곡을 했으며, 오랫동안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했다. "나와 모친은 외삼촌의 집에 근 3개월을 머물렀어요. 여러 곳을 가보았지요. 그 때 매번 집안 일을 떠올리면 외삼촌은 눈물을 흘리곤 했어요" 그래도 마학릉은 42년후에 오빠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미 나이든 여동생에게 오빠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왼쪽눈을 이미 실명한 여동생을 위하여 대만의 가장 좋은 병원에 데려가서 진찰받게 해주었고, 눈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리하여 여동생은 새로 세상을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2000년, 유조례의 모친인 마운영이 세상을 떠난다. "모친은 생전에 저에게, 만일 그녀가 죽으면, 소식을 외삼촌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었어요" 유조례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그런데, 외삼촌은 자주 전화로 모친에 대해서 물었어요. 한번은 내가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어서 말했고, 외삼촌은 전화통을 붙잡고 방성대곡을 했어요. 외삼촌은 누이동생을 너무나 사랑했었던 것이죠" 유조례를 여기까지 말하면서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1989년 유조례는 친구에게 자기 가정을 소개하고, 고향풍경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찍게 해서 외삼촌에게 부쳤다. 마학릉은 이를 본 후에 감격했다. "외삼촌은 편지를 써서, 비디오를 보고 또 보는데 너무 감동했다고 말하며, 하루속히 고향으로 달려가서 친척들과 만나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고 하였어요" 그는 또한 유조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아주 깊은 정을 드러냈다: "기사년 년말. 고향의 비디오를 얻어서, 눈으로 예아(유조례)가 난을 당한 후에 의사로서의 생애를 보내고, 운누이(마운영)가 고생스럽게 40년간 수절하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묘를 돌보고 있다니 위로가 된다. 고향집을 오랫동안 그리워하였는데, 이제 주춧돌 몇 개만 남았구나...운누이가 홀로 강가의 홰나무 옆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는 아마도 평생 가장 큰 한이 될 것이다"

 

1990년 대만에 친척방문후에 돌아와서, 유조례는 마학릉과 전화와 서신연락을 유지했다. 1998년, 호남에서 홍수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학릉이 주변의 친구들과 함께 호남에 100만대만달러를 기증했다. 2004년 3월초, 대만에서 선거를 하기 전날, 마학릉은 전화로 유조례에게 말해주었다. '국민투표'와 '대만독립'에 반대하기 위하여 그는 이미 대만의 마씨들에게 호소를 보냈고, 모두 한표를 행사해달라고 말했다고.

 

2005년 10월 30일, 마학릉은 심장병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소식을 들은 후, 유조례의 전가족은 전화기 옆에서 외삼촌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1월 1일 저녁, 전화에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조례는 비통해서 밤을 새워 외삼촌의 제문을 적었다: "외삼촌이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고 유언하셔서, 공개적으로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저도 대만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례식 전날(11월 4일), 마학릉의 처인 진후수는 전화로 유조례에게 말해주었다. 그가 쓴 제문은 사촌형제중에서 한 사람이 호남말로 낭송하였다고. 진후수는 유조례에게 그가 쓴 만련을 사람에게 부탁해서 글로 써서 영당에 걸어두었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저는 이미 나이가 많고, 사촌동생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연전, 송초유처럼 조국대륙에 많이 방문해서 고향사람들도 만나보고, 조상묘에 성묘도 하고, 고향의 땅을 밟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유조례에 따르면, 마잉주는 어려서부터 장사(長沙) 영향의 외할머니댁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는 장사말밖에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마잉주는 장사말을 아주 잘한다. "한번은 고향친구가 타이페이로 그를 만나러 갔는데, 보자마자, 마잉주는 아주 기뻐하며, 장사말로 말했다: '우리 국어(표준말)로 말하지 말자. 장사말로 하자'"

 

1990년, 유조례는 모친과 함께 대만으로 가서 외삼촌과 만났는데, 타이페이에 있는 3개월동안, 유조례와 마잉주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했었따. 그래서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내가 가장 기억나는 것은 사촌동생이 전통도덕을 아주 중시하는 것이었어요. 사람에 대하여 겸허하고, 개명되었지요. 그는 모친을 아주 존중하고, 매일 안부인사를 했어요. 외삼촌, 외숙모에게 말할 때도 공손하였고 예절바르게 행동하였어요" 유조례에 따르면, 마잉주는 공무로 바빴지만, 그들이 대만에 머무는 동안, 가능한 시간을 내서 함께 해주었고, 고향말로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나와 모친이 대만을 떠날 때, 그는 나에게 자기가 쓴 <<신해양법론 조어대열도와 동해경계획정문제>>라는 책을 주면서 친필로 서명해주었어요"

 

얘기하면서, 유조례는 또 하나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많은 매체는 마잉주가 술한잔도 입에 대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도 주량이 괜찮은 편인데, 술을 탐하지는 않아요. 그는 평소에는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데, 매번 집안에서 식사할 때면, 호남특산의 주귀주를 꺼내서 작은 잔으로 한 잔씩 마셨어요. 매번 바깥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식탁에 주귀주가 있으면 기뻐서 몇잔을 마시곤 했지요"

 

유조례가 가장 최근에 대만을 가본 것은 2006년 4월이다. "그 때도 마잉주를 만났어요. 그 때 보니 이전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그 자신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같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만나자마자 농담을 했죠: '내가 사촌형님이라고 불러야 될지, 사촌동생이라고 불러야될지 모르겠다'고"

 

마잉주가 나이들어보인 이유에 대하여, 유조례는 "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어요. 매일 수면시간이 5,6시간에 불과했고, 아주 힘들어했어요. 다행히 식사량이 많았고, 매일 달리기로 건강을 유지해서 버텼지요"

 

유조례는 마잉주의 사무실에 "황금비보서위보, 만사개공선불공"이라는 대련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마학릉은 이를 조훈으로 생각해서 자녀들에게 교육시켰고, 마잉주도 이것을 보면서 자신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