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숭환)

원숭환(袁崇煥): 군사재능이 과대평가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06. 11. 8.

작자: 누흔(淚痕)

 

원숭환이 지휘해본 전투로 가장 휘황한 것은 영원대첩(寧遠大捷)과 영금대첩(寧錦大捷)이다.

그러나, 이 두 차례의 대첩은 본인의 생각으로는 순전히 정치선전의 결과물이다.

 

소위 영원대첩을 보자.

원숭환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일설에는 3만), 누르하치는 13만의 군사를 데려왔다(일설에는 6만).

모든 전투는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고작 이틀일 뿐이다!

전투의 전과정은 이렇다. 누르하치는 영원성을 공격한다. 원숭환은 성문을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누르하치는 고성(孤城)인 영원성 바깥의 모든 군사시설, 군수물자를 부숴버리고, 돌아가버린다.

1:10의 병력으로 고성을 이틀간 지켜낸 것이다! 만일 이런 경우도 대첩(大捷)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소위 대첩이라는 것이 뭐란 말인가? 역사를 뒤져보면, 이런 병력으로 고성을 1개월, 2,3개월, 심지어 1년이상 버텨낸 경우도 숱하게 많다.

1만의 병력으로 10만의 병사를 맞이하여 고성을 이틀간 지켜내고, 적이 고성바깥의 일체의 군사시설을 부숴버리고 돌아갔는데, 뭐 그리 크게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소위 영원대첩에서, 누르하치가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것은. 신뢰도가 많이 떨어진다.

첫째, 누르하치는 죽을 때 69세였는데, 인생칠십고래희인 시절에 누르하치가 이 나이에 죽었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

둘째, 청나라 대군이 영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바로 병사를 몰아서 명왕조의 관외 군수물자기지를 공격하여 모든 장병을 죽여버리고, 모든 양초(糧草)를 불태우고 갔는데, 만일 누르하치가 중상을 입어 곧 죽을 상황이라면, 청나라 대군이 이렇게 한가롭게 군수물자기지나 공격하고 있었겠는가?

셋째, 청나라 기록을 보면, 누르하치는 죽기전 8개월간(영원성전투이후 죽을 때까지) 시종 국사를 처리하였다. 만일 영원성에서 포탄을 맞아 죽을 정도였다면 누르하치가 어찌 국사를 처리할 정력이 있겠는가.

영원대첩으로 청나라 병사가 얼마가 죽었는가? 기록상으로는 겨우 500명이다.

 

영금대첩으로 넘어가면 더 말도 안된다.

영금(영원성, 금주성)에는 6만의 군대가 있었고, 청태종의 군대는 10만이었다. 전체 전투는 꽉채워서 계산해도 24일간이다.

전투의 전 과정은 이렇다. 청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영금200여리에 와서, 한번은 금주를 공격하고, 한번은 영원을 공격했다. 원숭환은 무엇을 하였는가? 한걸음도 성밖으로 나가지 못했다(유일하게 한번 나갔다가 대패하고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청태종은 영원, 금주 바깥의 모든 군사시설를 훼멸시키고 돌아간다.

이런 전투를 대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인의 생각으로는 위충현(魏忠賢, 환관으로 당시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음)이 전공을 자랑하기 위하여 낯두껍게 벌인일이다. 후세 사람들도 이런 전투를 대첩이라고 계속 부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과거전투에서 공성과 수성의 난이도의 차이가 얼마나 컸었는지.

 

1만대 10만으로 고성을 이틀간 지켜내고, 6만대 10만으로 고성을 24일간 지켜냈을 뿐이다. 결과는 예외없이 적군에 의하여 고성바깥의 모든 군사시설을 훼멸되고 만다.

이런 전투가 뭐 그다지 대단한가? 이것도 대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대첩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위충현은 변방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하여 사실에도 불구하고 크게 자랑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전투가, 공전절후의 이소승다(以小勝多)의 전형적인 전투로 탈바꿈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되는 과장을 통해서 위충현은 대명황조를 구원한 개세의 공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알고 있다: 영원을 방어하지 못했다면 산해관도 잃었을 것이다. 만일 산해관을 잃어버린다면 북경성도 위험하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만일 위충현이 영명하게 영도하지 않았다면 원숭환은 영명하게 영원, 영금대첩을 지휘할 수도 없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명왕조 자체가 바로 멸망하지 않았겠는가.

원숭환은 명나라의 정치선전하에 신화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선전의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영원, 영금의 소위 대첩을 들여다보면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전혀 대첩의 특징을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의 본질에서 보자면, 그것은 전혀 대단할 것이 없다.

전략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원을 함락당하면 산해관을 함락당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말이 되지 않는다. 청나라는 우세한 병력으로도 영원과 금주를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더욱 단단한 산해관은 어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청나라가 산해관을 함락시킬 힘을 가졌다면 영원과 금주와 같은 곳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영원대첩의 신화를 위해서 위충현은 애매한 다른 고급장군들에게 화를 돌렸다. 고제는 산해관으로 물러나서 지켰는데, 주력부대를 이끌고 영원을 원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큰 죄를 받는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여리 떨어진 고성이다. 고제가 산해관을 버리고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주력부대가 영원성안에 들어갔더라면 그것은 스스로 국방을 망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적의 대군이 영원성을 포위하면, 10여만대군이 하루에 먹는 식량과 말이 먹는 풀이 얼마나 될 것인가? 영원성에 얼마나 많은 식량과 풀을 보관할 수 있는가? 아마도 1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목숨을 걸고 포위망을 뚫었어야 했을 것이다.

야외전투를 벌인가면 청나라군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고제가 명나라 주력군대를 이끌고 산해관바깥 200여리 지점에서 결전을 벌인다면 이것은 국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10만과 10만이 맞닥뜨린다면 명나라군대에게는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제가 주력부대를 보내서 영원성을 지원했더라면 마찬가지의 결과였을 것이다.

영원이야 있든 없든, 산해관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만일 명왕조의 주력대군이 산해관 200여리바깥에서 궤멸된다면 산해관도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나, 원숭환의 신화를 위하여, 위충현은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제를 폄하한다.

전투에 있어서, 고제의 행위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고제등이 영원, 금주를 포기한 것도 전략상의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합리적이었다. 고제, 왕재진등의 사람들이 왜 영원, 금주를 포기했던가에 대하여는 추가하여 말하지 않겠다.

전투에 있어서 영원대첩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공성은 어렵고, 수성은 쉽기때문이며, 1만대군이 이틀 버텨낸 것이 뭐 대단할 것이 있는가? 6만대군이 24일 버텨낸 것이 뭐 대단할 것이 있는가.

일체는 위충현이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것이고, 이를 위하여 영원, 영금전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숭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이런 선전때문에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된다.

그래서 숭정제는 황제에 오르자 마자, 그를 중용한다. 원숭환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큰소리를 떵떵쳐서 젊은 숭정황제를 혹하게 한다.

그의 이런 큰소리는 그저 숭정황제나 속여넘길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허예경이 그에게 "네가 5년만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계산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원숭환은 그저 "내가 보기에 황제가 마음이 조급해 하는 것같아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한 것이다"라고 하고 만다. 원숭환은 그저 큰소리나 칠 줄 아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저 이렇게 큰소리만 쳤으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스스로 뽑아올린 자기와 가까운 고급장령들을 임명할 때나, 나중에 요동군대의 편제를 개편할 때나, 모문룡을 죽였을 때나 그는 입만 열면 "이것은 5년내에 요동을 평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조대수등의 사람을 뽑아올린 것도 5년내에 요동을 평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5년이 되어도 요동이 평정되지 못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그들을 죽이겠습니다. 폐하는 물론 마찬가지로 저를 죽이십시오" "내가 모문룡을 죽인 것도 5년내에 요동을 평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나의 5년내 요동평정계획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 때까지 요동을 평정하지 못하면 신을 죽여주십시오"

마치 진짜 5년내에 요동을 평정할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했든, 원숭환은 이런 큰소리와 속임수로 요동을 평정하는 최고지휘관에 오르게 된다.

원숭환이 최고지휘관에 오른 후에 처음으로 한 일은 계문의 조솔교를 다른 곳으로 보낸 일이다. 원숭환은 숭정황제로부터 중용을 받자마자 조솔교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린다. 후세 사람들 중에서는 원숭환이 서부의 계문이 큰 은환(隱患)을 안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왜 계문을 순찰하지 않고, 동강으로 달려가서, 모문룡을 죽여버렸는가? 동강의 모문룡의 은환이 계문보다 훨씬 급했다는 말인가? 더 위험했단 말인가?

 

실제로 원숭환이 왜 모문룡을 죽였는지에 대하여 청나라 초기의 사서는 모두 한가지로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원숭환이 청태종에게 속았기 때문이다. 원숭환은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그냥 모문룡을 죽여버린다.

이 내용은 나중에 원숭환의 천고의 억울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유명하다. 그저 나중에 건륭황제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하여 이 주장을 부인해 주었을 뿐이다.

 

청나라 대군이 장성을 돌파하고, 북경성에 도착하는데 모두 1개월여의 시간이 걸렸다(10월 24일에 장성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1월 20일에 북경성아래에 도착했다)

이 긴 기간동안 원숭환은 군대를 조직하여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어느 하나의 방어선도 구축하지 못했다. 그래서 20여일후에, 적군은 북경성의 아래까지 몰려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제에게 큰소리쳐던 5년평요(오년만에 요동을 점령한다)하겠다는 최고지휘관의 실상이었다.

더욱 우스운 일은 원숭환은 그 전에 청나라대군을 마주한 것이 있는데, 그냥 병사를 끌고 계주성안으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그는 적군이 병사를 몰아 계주성을 공격해주기를 기다렸던 것같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영원,영금대첩의 휘황한 전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제는 왜 청나라 대군이 계주성에 신경을 쓰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북경성으로 돌진하지...

당시 청나라군대는 영원, 금주를 맹렬하게 공격했는데, 그것을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지, 절대로 영원, 금주를 점령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고작 이틀, 24일만 공격한 후 철수했겠는가. 굳건히 수비하는 성을 공격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나중에 행산, 금주의 하락은 모두 수개월, 1년이 걸렸다. 만일 그때 누르하치가 이런 시간을 들여 영원성을 공격했다면 원숭환이 무슨 재주로 영원성을 더 이상 지켰겠는가. 그저 당시는 누르하치가 동쪽의 조선, 서쪽의 몽고때문에 이런 장기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 때 청나라가 반드시 영원, 금주성을 함락시키려 하지 않은 것은 그 이전에 이 일대는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는데도 병사 한명 내보내지 않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원숭환이 영원, 금주성을 수리할 때도 청나라는 그저 놔두고 보고만 있었다. 당시의 전략배경하에서 청나라의 주요군사역량은 조선정복과 몽고점령에 두고 있었지, 영원, 금주와 같은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그렇지 않다면 영원, 금주는 결코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외의 몇 개성은 모두 고립된 성이어서, 적이 사면을 둘러싸고 오래 포위하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명나라가 지원군을 보낸다면 그것은 야외전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명나라군대가 버텨낼 수 없다.

홍승주의 실패는 실제로 원숭환이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

원숭환이 영원, 영금대첩을 이끈 후에 하나의 군사정보를 얻어냈다. 즉, 이후 청나라와 싸울 때는 성을 높이 쌓은 후, 대포의 위력을 이용하여 적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적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보가 아니라면, 모두 이런 정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왜 나중 사람들은 원숭환이 이것을 발견한 것을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떠드는 것일까?

공성, 수성의 난이도의 차이는 하나는 하늘이라면, 하나는 땅과 같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수성하는 측에 대포가 있는 것뿐아니라, 대포가 없다고 하더라도 유리한 것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적군이 너의 성을 공격하지 않으면 어떡할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적이 너의 성벽에 가까이 오지 않으면, 성벽과 대포의 위력을 어떻게 발휘하겠느냐는 것이다.

적이 성벽밖의 모든 지역을 통제하면, 이 성은 고립된 성이 아닌가. 만일 성문만 나갈 수 없다면, 성내의 양초(양식과 풀)로 얼마나 버틸 것인가. 만일 나가서 적과 싸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방법이 없지 않는가. 만일 중앙에서 구원병을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야외에서 결전을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조대수, 홍승주가 이런 전술을 다시 사용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기회를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적이 사방을 포위해 있으면, 결국은 갇혀서 죽어버리는 것이다.

적들이 죽어라 성벽을 기어오르고, 네가 성에서 돌을 바깥으로 던지는 형국이라면 당연히 너에게 유리하다. 문제는 적의 사령관도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 방식으로 너와 싸우려 하겠는가?

적은 장성을 돌파하고 북경성을 포위하는데 겨우 20여일의 시간밖에는 걸리지 않는다. 이런 시간동안 원숭환이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적보다 하루 먼저 북경성에 도착한 것이다. 그 동안 한번도 제대로된 전투를 하지 않았다.

 

본인이 어릴 때, 원숭환의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청나라군대는 2,3일만에 북경성에 도착한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원숭환이 적보다 하루 먼저 북경성아래에 도착한 것을 보고 매우 신기해 했다. 나중에 역사를 보고나서야 원래 시간이 20여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다면 원숭환이 청나라군대보다 하루먼저 북경성아래에 도착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고, 자랑할 것인가.

적들이 북경성을 포위했다. 황제는 원숭환에게 20만의 근위대군을 이끌고 적을 장성밖으로 내쫓으라고 한다. 원숭환은 적을 쫓아낼 능력이 없다. 그래서 적과 성하지맹(城下之盟, 약한 입장에서 화해조약을 맺는 것)을 맺는 것만이 유일한 출로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원숭환은 신화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숭환이 북경성아래에서 9천으로 10만에 대항했다고 하고, 청나라군대를 대패시켰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논리도 없는 것같다. 역사라고 하지 말고 그저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당초에 원숭환은 6만대군을 이끌고, 영, 금지구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적군 10만대군의 공격에 한걸음도 성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적군이 영원, 금주를 왔다갔다 하면서 위세를 보이고, 성밖의 각종 시설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이런 점은 영금대첩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준 위충현마저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청나라군대가 장성을 돌파하였지만, 원숭환은 아무런 방어선도 마련하지 못했고, 감히 적과 한번도 싸움을 하지 못했다. 거의 적으로 하여금 아무런 방비도 없는 상태에서 북경성 아래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이다.(1개월의 기간동안)

 

그가 보여준 전투력을 보면, 9천의 병력으로 적군의 10만을 맞아서 야외전투를 벌일 수 있었겠는가? 특히 적을 궤멸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나 허황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원숭환의 군사적 재능은 모두 위충현이 떠벌려댐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북경보위전후에 원숭환의 명성은 이미 철저하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다만 나중의 건륭황제가 명나라왕조를 더욱 추악하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원숭환 신화를 만들어 낸다.

당연히 이것은 긴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는 간단히 설명한다.

 

원숭환을 신화로 만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명왕조를 미워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건륭의 이런 목적은 달성되었다. 왜냐하면 그 효과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원숭환을 거론할 때마다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라고 얘기하고 예외없이 명황조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으니까.

사실상, 청태종의 반간계(反間計)라는 것은 100여년의 시간동안 한번도 얘기된 적이 없는 것이다.

사실상, 청나라군영으로 도망쳐 왔다는 환관에 관한 이야기도 100여년동안 명황조, 청나라의 관방, 개인문서에 전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체는 건륭연간에 이르러 청나라 관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히 이유는 명황조를 추악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본인은 만일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숭정황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가. 도망쳐온 태감은 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는가. 청태종등의 사람들은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는가.

비록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들이 이 일을 떠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명청이 교체되는 100년이라는 기간동안 이에 관한 내용이 일언반구 언급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100년이 지난후에 그 사실을 겪지도 않은 황제에 의하여 아주 우연히 발견된다는 말인가.

본인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 이처럼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같은, 아무런 증빙도 없는 이야기가 보편적으로 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