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漢武帝)를 말하면, 사람들은 금방 이 웅재대략(雄才大略, 사기에서 한무제를 형용한 유명한 4글자)의 군왕을 도와 흉노와의 전쟁을 수행한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등 명장들을 떠올릴 것이다. 수십만의 대군은 삭풍을 무릅쓰고 사막을 가로질러 흉노를 북으로 몰아냈으며, 서한이 건립된 이래로 수세에 처했던 국면을 일거에 전환시키고 "불교호마도음산(不敎胡馬度陰山, 오랑캐의 말이 음산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당당한 호기를 나타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상홍양이라는 사람이 있어,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한무제시기에 상홍양은 대사농(大司農)등 직위에 있는 동안 후방에서 재정을 담당해며 장기간의 한-흉노전쟁기간동안 군대에 대한 공급과 조달을 책임졌다.
그렇지만, 위청과 곽거병이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것과는 달리, 상홍양에 대하여는 "언리소인(言利小人, 이익을 따지는 소인배)", "취렴지신(聚斂之臣, 재물을 긁어모은 신하)"의 전형으로 비난받고 있다. <<한서(漢書)>>에는 아예 그의 전(傳)을 두지 않았다.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은 그를 가리켜, "세금을 추가로 부과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는 재물이 풍부했다. 그러나, 갖은 방법으로 백성의 이익을 몰래 가로챘다. 그 폐해는 세금을 추가부과하는 것보다 심했다"고 했다. 소철(蘇轍)은 "법술부정(法術不正, 방법이 올바르지 못했다)" "민수기병(民受其病, 백성이 그 병폐를 당했다)"고 했다. 소식(蘇軾)은 더욱 심해서, "한나라 이래로 학자들은 상앙(商鞅), 홍양을 언급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를 입에 담으면 입과 혀를 더럽히는 것이고, 그를 글로 쓰면, 간독(簡牘)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기>>에서 상앙과 상홍양의 공로를 쓴 것은 태사공 사마천의 이대죄(二大罪)라고 하였다. 심지어 상홍양의 생전에 일찌기 "팽홍양, 천내우(烹弘羊, 天乃雨, 상홍양을 삶으면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다)"라는 저주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상홍양의 반대자들은 상홍양이 지나치게 가렴주구하여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무제에게 상홍양을 처벌해달라고 요구했다. 도대체 상홍양이 무슨 짓을 했길래 이처럼 가혹한 평가를 받고, 비난을 받은 것인가?
한무제 유철(劉徹)이 대권을 장악한 후, 정사에 힘을 쏟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국토를 확장했다. 부친과 조부의 방식을 바꾸어 흉노에 대하여도 강경한 조치로 전환했다. 이처럼 전방위적인 개혁을 시행하다보니 사회경제적으로 큰 압력이 왔다. 쓸 돈은 많은데, 가진 돈은 부족한 것이다. 일시적으로 재정위기가 온 것이다. 이러한 곤경을 벗어나는 것이 한무제와 그 신하들에게는 시급한 문제였다. 이전의 "매작속죄(賣爵贖罪,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아먹고, 돈을 받고 죄를 사해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물컵의 물로 불을 끄는 격이었다(杯水車薪). 게다가 세금을 올리는 것도 장기적인 대책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상홍양은 직접 돈을 벌 수 있는 몇 가지 경제정책을 시행하자고 건의했다.
한나라초부터 대상인들과 제후들은 소금과 철을 경영하여, 큰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로써 국가수입이 감소되고, 정치적으로 서한조정이 불안정하게 되었다. 상홍양은 소금과 철(염철)을 관청에서 경영하고, 사인들이 소금을 만들거나 철을 주조할 수 없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한무제의 명을 받아 어사대부 장탕(張湯), 대농승(大農丞) 공진(孔盡)등과 더불어 염철국영을 시행했다. 나중에 그는 치속도위를 맡고 대사농의 업무를 맡아서, 천하의 염철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그가 부임한 후, 이전의 폐해가 일소되고, 염철관영이 실시되며, 생산량과 판매량이 대폭 증가했고, 정부에게는 무궁무진한 재정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이리하여 이 돈으로 변방을 공고히 하고, 흉노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제적인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대상인들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조종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고, 정부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상홍양은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운송을 담당하는 균수관과 물가를 담당하는 평준관을 두고, 백성들은 균수관에게 공물을 환산한 돈과 운송료를 지급하면 되고, 균수관과 평준관은 저가인 지방에서는 물건을 사서 경사(京師)로 옮기거나 고가인 지방으로 보내서 판매했다. 관청은 "천하의 화물을 모아서 비싸면 팔고, 싸면 사들였다. 이로써, 대상인들이 이득을 볼 여지를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든 물건의 가격이 급등급락하는 일이 없어졌다" 균수, 평준을 실행한 결과는 백성이 멀리까지 공물을 운송해야하는 부담을 줄여주었을 뿐아니라, 대상인들의 매점매석행위를 발본색원했고, 물가를 안정화시켰으며,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화시켰다. 동시에 조정은 운송과 무역을 독점하여, 서한왕조는 거액의 재정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한서. 식화지>>에 의하면, "균수, 평준을 시행한 후, 조정창고에 저장된 곡식과 비단은 급격히 늘어났다. 1년만에 태창, 감천창은 꽉 찼고, 변방의 도시에도 곡식이 남았다" 이리하여 변방으로 물자를 공급할 경제적인 능력을 충분히 갖추게 된 것이다.
화폐개혁도 상홍양 경제정책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한나라 초이래로, 사주(私鑄, 사사로이 화폐를 주조하는 것)의 풍습이 성했했고, 화폐제도가 문란했으며, 동전은 날로 가벼워지고, 물가는 폭등하는 현상이 가속화 되었다. 원정4년(기원전113년), 한무제는 상홍양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제도를 철저히 개혁한다. 일체의 구화폐를 폐지하고, 국가가 통일적으로 신화폐를 발행하게 된다. 새로 주조한 삼궁전(三宮錢, 후세에 五銖錢-오수전-이라고 부름)의 중량을 실제중량과 일치시키고, 규격을 동일하게 하고, 품질을 향상�며, 원가가 비교적 많이 들도록 해서, 사사로이 동전을 주조하더라도 이익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민간에서 만든 화폐가 유통되는 폐해를 없앴고, 화폐제도를 통일시켰다. 오수전은 나중에도 오랫동안 사용된다.
당시, 서한정권이 실행한 또 다른 중요한 경제조치는 산민(算緡), 고민(告緡)이다. 이것도 상홍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홍양등이 기획한 다음, 서한조정은 원수4년(기원전119년) 다시 산민고민령을 시행한다. 이것은 공상업자와 고리대금업자에게 재산세를 거두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 대하여 거부 상인들이 세금탈루의 위법행위를 고발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산민, 고민의 실행은 거부 상인들에 큰 타격을 주면서, 동시에 정부의 재정수입을 상당히 증가시켰다. 이외에 상홍양은 주류전매, 공전(公田)경영등의 조치를 취해서 재정을 개선하고, 변방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상홍양이 실시한 일련의 경제정책을 보면, 주요한 착안점은 정부수입을 증대시키고, 정부재정위기를 해결하며, 거부상인들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목적은 오랫동안 지속되던 한-흉노전쟁의 물자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방에서 써야 할 곳이 많아서, 염철법을 시행하고, 주류에 세금을 거두고, 균수를 두었다" 이러한 조치는 확실히 예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처럼 후방에서 충분한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을 수 있게 되자, 한무제가 30년간이나 흉노와 싸웠지만,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추가징수하지 않고도 물자조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한나라는 흉노와 끝까지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의 소위 "문치무공(文治武功)"은 바로 염철전매, 균수등 일련의 재정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상홍양은 한무제가 위업을 달성하는데 큰 조력자였다. 그의 공로는 절대 위청, 곽거병보다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비록 상홍양이 국가의 재정을 충족하게 하였지만, 그는 공공연히 유가의 "휘언재리(諱言財利, 재물과 이익을 말하지 않는다)", "여민쟁리(與民爭利, 정부가 백성과 이익을 다툰다)"는 전통적인 신조를 위배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및 이후의 여러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특히, "세금을 중과하지 않으면서 정부는 충분한 재물을 확보하는 것"이 실제로는 귀족계급과 부유한 상인계급의 이익을 희생시키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이런 계층으로부터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었다. 염철회의에서 날카로운 설정이 오고간 이후에, 상홍양은 점차 세력을 잃게 된다. 결국 외척들의 정치투쟁과정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이후 왕조에서 그가 한 정책을 본따서 많은 사람들(귀족, 상인)에게서 돈벌 기회를 빼앗아 갔으므로, 후대에도 그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게 되었다.
분명히 상홍양이 제창한 관영모델 자체는 폐단이 없지 않았다. 고도의 정부독점구조는 공상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본다면 이런 조치는 현실에 맞는 합리성은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어느 정도 공상업의 정부운영과 정부독점은 필요한 점이 있다. 이로 인하여 상홍양은 천고에 욕을 먹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가 시행한 염철전매, 균수등의 정책은 아주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 위 ,수, 당이래로 모두 이 정책을 승계했다. 비록 인의를 중시하고 이익을 언급하지 않는 유가들이 주류가 된 왕조에서도 국가를 운영하는데 돈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송나라의 유학자인 여조겸도 이렇게 말했다: "상홍양이 돈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이래로, 비록 현군양신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이를 따르고 고치고자 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겉으로는 그러한 것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상홍양은 중국고대의 걸출한 경제인이었다. 한무제가 그가 모아준 돈을 아무렇게나 낭비한 점이나, 흉노와 끊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한 것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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