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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범포포(范跑跑)의 문제글

by 중은우시 2008. 6. 25.

 

2008년 5월 12일에 발행한 원촨(汶川) 대지진은 여러가지 뒷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중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의 하나는 도강언광아학교의 교사인 범미충(范美忠, 북경대학 역사학과 졸업)이 문천대지진때 교사로서 학생들을 돌보지 않고 혼자서 먼저 도망쳐 나간 내용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자, 네티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를 공격하고, 그에게는 '범포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포()'는 달아난다, 도망친다는 뜻이다.  아래의 글은 범미충이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그 순간 땅과 산이 요동쳤다 - "5.12" 문천지진친력기>> 2008. 5. 28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는 상황하에서, 나는 진앙지 영수(映秀)에서 가장 가까운 도강언에서 일생중 가장 공포스러운 경력을 겪었다: 5.12 문천 8.0진도 대지진!

 

이날 오후는 평소대로 나의 IB 1학년 SL어문과목이었다. 수업전에 학생들과 나는 모두 날씨가 무덥다고 느꼈다. 나는 교실을 한바퀴 돌고는, 모든 창문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이번 수업내용은 <<홍루몽>> 제13회였다. 평소대로, 학생이 먼저 얘기하였다. 그러나, 학생은 10분도 되지 않아 말을 다 했다. 나는 많은 부분을 학생이 그냥 지나갔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생에게 질문하라고 했으나, 학생들도 질문을 하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친히 나섰다. 진가경이 봉저(鳳姐, 왕희봉)의 꿈에 나타나는 장면에서 나는 학생에게 물었다: "이것은 마환현실주의수법인가?" 학생이 말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나는 다시 학생에게 물었다: "조설근도 그것이 미신이라고 생각했을까? 봉저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학생은 대답했다: "아니오. 그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여기서부터 차례로 학생들을 이끌어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가 오늘날은 꿈에 나타나는 것, 점을 치는 것과 풍수를 모두 미신이라고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현대과학실증주의와 이성의 눈으로 이것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은 대단한 점이 있다. 다만, 그것도 그것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나의 생명의 의미를 허무한 과학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친척가족을 잃은 아픔을 과학과 이성이 위로해줄 수 있을까? 과학과 이성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많은 문제와 영역은 과학과 이성이 인식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과학과 이성에 대하여 자부하면 안된다. 우주의 신비한 역량에는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까지 얘기했는데, 교탁이 흔들렸다. 학생들은 깜짝 놀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같았다. 왜냐하면 이전에 몇번 탁자와 침대가 흔들리는 경미한 지진은 겪었으므로, 나는 지진에 대하여 경험이 약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진정하고 태연하게 학생들을 안정시키며 소리쳤다: "놀라지 마라. 지진이다. 괜찮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교실은 지진으로 맹렬하게 흔들렸다. 심지어 화화하는 소리까지 났다(왜냐하면 교실이 단층집의 기초위에 목재를 얹어서 만든 1칸짜리 대자습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 대지진이다! 그후 맹렬하게 계단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 한번 쓰러지기도 했다. 이때 나는 돌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중국이 핵공격을 받은 것인가?" 그후 구르고 기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교실 곁의 축구장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나는 내가 제일 먼저 축구장에 도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곁의 교실건물에서 두살짜리 아이를 안고 외국인이 나왔고, 또 남학생 기숙사에서 학생 하나가 내려왔다. 이때 대지는 다시 한번 격렬하게 수평으로 움직였다. 아마도 1미터 폭은 되었던 것같다. 이때 나는 세계의 종말이 도래했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땅을 발로 딛고 서있는 것같이 확실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때는 땅도 안정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든 믿을 수가 없었다. 이어서 이번 지진으로 축구장 동쪽에 50센티미터두께의 축구벽이 몇초만에 다 무너져 버렸다. 점점 학생과 선생들이 축구장으로 몰려들었다. IB 2학년은 졸업시험기간이었으므로 어떤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떤 학생들은 침실에서 자고 있거나, 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슬리퍼에 반바지를 입고 웃옷은 입지도 않은 채 도망쳐 나왔다. 이때 나는 주의해서 보았다. 내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더 지나자 비로소 그들이 차례로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나는 이상해서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나오지 않은 거냐?" 학생이 대답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선생님이 순간적으로 도망쳐서 안보이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는 모두 탁자 밑으로 숨었습니다! 격렬한 지진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 왜 우리를 데리고 나오지 않으셨나요?" "나는 원래 용감하게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생명에만 관심이 있다. 너희는 몰랐느냐? 저번에 한밤중에 불이 났을 때도 나는 빨리 도망쳤지 않느냐."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그 후에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왜 학생들을 모아서 나가게 하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사실, 그 순간 건물이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데, 나는 그저 본능적으로 반응했을 뿐인 것이다. 위기의식이 강한 나는 매번 위험이 있을 때마다 반응이 비교적 빨랐다. 도망도 비교적 빨리쳤다. 그러나, 순간의 본능선택은 아마도 내재적인 자아와 타인의 생명중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형량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중에 나는 나에게 조금 실망했을 학생에게 말했다: "나는 자유와 공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나를 생각하는 용감하게 자아를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생사선택의 순간에, 나의 딸을 위해서라면 비로소 자신을 희생할 것을 생각해보겠다. 다른 사람이라면 설사 나의 어머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하에서 나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은 내가 안고 뛸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되는 순간에 한명이라도 도망칠 수 있는 만큼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만일 위험이 커서, 내가 너희와 함께 죽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위험이 없어서 내가 너희를 돌보지 않더라도 너희는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너희는 이미 17, 18세된 사람이다" 이는 아마도 나의 스스로에 대한 변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도덕적인 죄책감은 없다. 나는 또한 학생에게 말했다: "나는 절대 칼을 든 강도에게 용감하게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다." 말을 이렇게 했지만, 다음에 위험이 닥치면, 나도 현재는 내가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자신이 극한상황에서 절대로 제일 전면에 나서서 감옥에 들어갈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나는 성도의 가족과 소호(小狐) 그리고 이옥룡(李玉龍)의 안위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처음에는 핸드폰에 신호가 없었다. 분명히 정전으로 기지국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을 것이다. 좀 있으니 핸드폰에 신호가 잡혔다. 아마도 기지국이 예비전력을 가동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전화거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 전화는 아예 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수도, 전기, 통신과 교통이 중단되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운동장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 학생은 심지어 이렇게 긴장된 순간에도 공을 차고 있었다. 나도 등산화를 신고 가담했다. 이때 나는 이처럼 태연한 태도로 내심의 긴장과 놀라움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오후 5시까지 기다렸다. 그제서야 어느 선생이 소형 라디오로 덕양라디오방송국의 방송을 들었다: 7.8급 지진, 진앙지는 문천이다. 당산대지진과 같은 겁이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멍하게 있었다. 진앙지가 도강언에서 이렇게 가깝다니. 모두 추측했다: "문천은 분명히 박살 났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한 학생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형제등 친척이 모두 문천현성에 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진앙지가 문천경내의 영수이고 문천현성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도강언이 사실 문천현성보다 진앙지에서 더 가깝다는 것도 몰랐다. 문천은 외부와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교통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학생은 나에게 말했다: "문천은 자주 지진이 나는데, 전년도에도 6.5급의 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옛날 집 일부를 제외하고 문천의 건물은 모두 7급을 견디게 방진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도강언에서 전년의 문천지진보다 더 심하게...."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 학생은 거의 오열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나는 비로소 침실 사무실에서는 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운동장에서 자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불과 옷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내가 성도로 돌아가면, 거기도 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나는 건물을 돌아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나의 침실로 되돌아갔다. 물통은 음수기에서 이미 지진으로 바닥에 떨어져 내려와 있었다. 의자 위에 놓아둔 옷은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급히 손발을 움직여 돈은 찾아서 챙겼는데, 옷과 이불은 못챙겼다. 내가 살던 기숙사는 만든지 16년된 집이어서, 화장실의 벽과 집의 벽에 큰 균열이 이미 생겼다. 그래서 나오고 나서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다시 운동장으로 가서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소학부와 유아원의 학생들도 모두 그 곳에 있었다. 경 교장도 마침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가가서 그와 얘기를 했다. 나는 "내가 보기에 광아학교의 건물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은데, 어떻게 하나도 안무너졌지요?" 경교장은 약간은 득의만면하여 대답했다: "우리 학교의 건물은 조보(堡, 소수민족의 돌로만든 집)처럼 지었어요. 어떻게 무너지겠어요. 나는 일은 맡겼지만 재료는 안맡겼어요. 건설업자와 싸웠지요. 자기들에게 공사와 재료를 다 맡겨달라고, 그래도 나는 그렇게 안하겠다고 고집부렸어요. 공사비는 더 줄 수 있지만, 집은 그자리에서 부어만들었어요. 지변과 벽이 하나로 되어 있지요. 다 짓고 나서 우리는 기기로 강철과 시멘트의 함량을 조사하기도 했어요" 원래 그도 무슨 선견지명이 있는 것은 아니고, "투공감료(偸工減料, 공사를 빼먹고 재료를 줄이는 것)"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무슨 품질보증이나 방진설계를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광아학교처럼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건물도 무너지지 않는데, 다른 곳이라면 무슨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계속하여 곽초양, 여동과 나복갱의 안부를 묻는 메세지를 받았다. 그리고 모두 회신에 성공했다. 이외에 이옥룡에게 보내는 메세지도 성공적으로 발송되었고, 회신도 받았다. 그와 소호는 아무 일이 없었다. 이때 나는 비로소 생각이 났다. 나의 고향의 부모와 형님누나도 아마 도강언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았을 것이고, 걱정할 것이라고. 집에도 전화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는 고정전화는 그래도 통화가 되었다. 그러나 전화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포기했다. 이때 걸어서 시내의 상황을 관찰하고 온 학생이 말했다: "도강언시내는 참혹합니다. 백분의 이십의 건물이 무너졌어요. 광아학교의 건물은 이번에 정말 잘 견뎌낸 것입니다"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은 광아학교의 건축품질에 대하여 계속 말들이 있어왔는데, 이번 지진이 지난 후에는 경교장과 그의 광아학교 건물에 대하여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이때 성도의 교장부인도 돌아왔다. 그녀는 "성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도강언의 취원중학은 교실이 무너졌어요. 18개반의 학생이 아래에 묻혀 있고, 수백명이 죽었어요. 교육국장이 거기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요." 또 취원진에서 돌아온 광아학교 부근의 주민도 말했다: "당시 나는 상점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빨리 도망쳤어요, 거리의 양쪽 건물은 순식간에 모두 무너졌어요. 나는 시신들 위로 뛰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또 광아학교의 학부모도 "보기에 돈을 좀 더 내더라도 품질을 좋게 해야겠어요. 우리 나들은 광아에서 괜찮잖아요"

 

오후 5시 6시경부터 도강언과 성도의 일부 학부모들이 속속 학교로 와서 아이를 데려갔다. 나도 9시 좀 넘어서 학생부모의 차를 얻어타고 성도로 돌아왔다. 도강언의 교통은 길이 막혀서 엉망이었다. 굴삭기, 구호차도 순조롭게 들어가지 못했다. 길을 마구 달려가는 차들이 너무 많았다. 이환로를 가는데만도 1시간이 걸렸다. 10시넘어서 비로소 성관고속도로를 들어갔다. 조금 달리는데, 나는 위용의 메세지를 받았다: "아직 살아있으면 회신해달라" 나는 바로 회신했다: "난 괜찮다. 우리 학교도 괜찮다. 도강언은 상황이 심각하다" 차가 톨게이트를 나온 후에 우리는 비로소 서쪽노선은 이미 재난구조전용도로로 되어서, 차량은 고속도로를 우회하고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그후 나는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전에 나는 처가 보낸 메세지를 받았다. 그들이 이미 부근의 화덕복학교의 공터에 피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은행카드를 들고 신속히 화덕복학교를 찾았다. 학교에는 이미 두 개의 큰 텐트와 십여개의 작은 텐트를 치고 있었다. 내 딸은 이미 그녀의 작은 차에서 자고 있었다. 처는 마침 화덕복의 선생과 학생들과 둘러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의 돌연한 출현에 처는 놀라면서 기뻐했다. 왜냐하면 지진이후 나의 전화는 계속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화덕복학교의 학교버스안에서 잠을 잤다. 몸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차문을 닫으니 답답했고, 차문을 열면 모기가 들어왔다. 어쨌든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다시 두번인가 차안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실외에 있었으므로, 심리적인 부담은 없었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6시경이 되어, 처제가 와서, 그녀의 언니가 밤새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환경에 적응이 안되어서라고 한다. 모기가 계속해서 물고, 아이가 계속 깨어나서 우는 바람에 그랬다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집으로 급히 돌아갔다. 다만 이때 모든 사람들은 이미 경궁지조(驚弓之鳥)가 되어 있었다. 지진에 대한 반응도 풍성학려(風聲鶴),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수시로 음료수통과 차잔을 보고, 찻물이 흔들리는지를 보았다. 쇼파에 앉아니 쇼파가 움직이는 것같았다. 나는 바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방금 또 흔들린 것같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모두 도망치자고 하려고 했다. 실제로 찻잔의 물이

흔들리는 정도의 여진은 하루에도 여러번 있었다. 샹들리에가 흔들릴 정도의 큰 여진도 두번이나 있었다. 우리는 이미 옷을 다 챙겼고, 마른음식도 샀고, 우산도 들고, 문앞에 서 있었다. 수시로 뛰어내려갈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뛰어내려가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뛰어내려갔다. 왜냐하면 바깥에서 잠자는 것이 아주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3일저녁에 우리는 아예 집에서 자기로 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걱정되어서 나는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거의 잠들지를 못했다. 나 자신은 잘 뛰어나갈 수 있지만, 만일 아이를 안고 뛴다면, 잘 모르겠다. 그리고 급한 중에 넘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반드시 반응이 빨라야 시간도 벌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흐트려서는 안된다.  실제로 나는 추산해 보았다. 여진은 5.12의 지진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5.12의 지진에도 성도는 위험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후으 여진에 성도가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맹렬한 지진을 겪어보지 않았으므로 성도시민은 모두 놀라자빠진 것같다. 그들이 만들어낸 긴장된 분위기는 나에게도 전염되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긴장하게 되었다. 이날 정오에 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 나보가 빨리 물을 담아놓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강언 화공공장이 새어나와서, 성도의 수원이 이미 오염되었단다. 그래서 모두  손발을 급히 움직여 독마다 통마다 물을 가득 채?다. 나는 물을 쓸 수 없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하여 급히 생수회사에 물 다섯통을 더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도 이제는 2통밖에 안남았다고 한다. 상점안에는 사람들이 광천수를 앞다투어 샀다. 이 때 나는 아예 고향인 융창이나 처의 형제가 살고 있는 곤명으로 가버릴까도 생각했다. 티비를 켜니, 방송국에서는 반복해서 유언비어를 부인하고 있었다. 화공공장에서 유독물질이 새어나간 일도 없고, 성도의 용수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안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당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이번에 하는 말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강언의 광아학교 경교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화공공장에서 유독물질이 새어나간 일은 없다. 가스폭발로 불이 난 적은 있다"고 했다.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틀 연속으로 편안하게 식사를 하지 못하다보니, 14일 오전에는 신경써서 3채1탕을 준비했다. 따뜻하고 향기와 색을 갖춘 요리가 식탁위에 올라왔고, 토마토탕이 곧 다 끊을 예정이었다. 이때 돌연 소호의 전화를 받았다. 1시에서 2시경에 큰 지진이 올거라는 것이다. 나보고 빨리 나가라고 했다. 나는 시간을 봤더니 1시 16분이었다. 대지진은 언제든지 날 수 있었다. 나는 바로 불을 끄고 식구들을 불러 뛰어나갔다. 처는 아직도 요리맛에 연연했다. 처제의 5살짜리 아들은 막 끓여서 한 두개 먹었던 탕원을 아쉬워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생명과 비교하면 맛있는 요리 하나 탕원 한 그릇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 파괴적인 지진이 난다면, 이렇게 우물쭈물해서야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여자들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비이성적이고 결단성이 없다. 황급히 화덕복으로 갔는데, 거기는 다시 적지 않은 학생과 학부모가 모여 있었다. 하늘에서 작은 비가 내렸다. 우리는 계속 큰 텐트의 아래에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거기서 떠들어서, 아이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아마도 마음이 우울할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우리는 두번의 비교적 큰 흔들림을 느꼈다. 내 생각으로 진도는 5내지 6일 것같다. 진앙지의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여야 할 정도이다. 그러나, 진앙지에서 성도까지 오면 2도정도가 감소되니 3,4급 정도일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실로 너무 두려워하는 것같다. 흔들림이 너무나 경미하여, 우리는 대지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오후 5시경까지 계속 기다렸다. 나와 처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야 이런 환경을 참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아이는 참을 수가 없었다. 14일밤에 용기를 내서 집안에서 잤다. 집안 사람 특히 아이가 걱정되어서, 여전히 계속 경계심을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비몽사몽간에 밤을 보냈다. 이제서야 비로소 느낄 수있었다. 나는 나의 가족 특히 나의 딸에 대하여 가진 관심의 정도가 학생들에 대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그날 밤 11시경, 다시 비교적 강진이 발생했다. 우리 집에 있던 3명의 1살이 되지 않은 아이의 모친은 반응이 신속했다. 모두 아이를 안고 방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같은 단지내의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건물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보기에 진동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그들에게는 자라고 하고 나는 혼자서 거실에 앉아 밤을 샜다. 이렇게 하룻밤을 꼬박 지낸 것이다. 이후 며칠간은 이렇게 놀라는 와중에 지나갔다. 연일 계속되는 긴장과 걱정으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고, 너무 피곤했다. 내 생각에, 지진이 오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쓰러지겠다고 느꼈다. 정말 곧 닥칠 것인데,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공포였다. 17일 저녁, 나는 편안하게 자기 시작했다. 18일, 나는 심지어 이미 안심하고 있었다. 다시는 의자가 흔들린다고 놀라지도 않았고, 눈이 항상 찻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이미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느낌에 정력이 거의 회복된 것같았다. 어찌 알았으랴, 그날 저녁 10시경에, 다시 단지의 사람들이 모두 바깥으로 도망쳐 나갔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통지했어요. 오늘 내일 이틀간 6에서 7의 여진이 있다고" 나는 바로 텔레비젼을 켰다. 과연 텔레비전에서는 반복하여 긴급통지를 발표하고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분위기는 갑자기 긴장되었다. 나는 다시 냉정하게 분석했다. "이름 그대로 여진지역은 여진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성도는 확실히 여진지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겁을 내지 않아도 된다" 처는 나가자고 우겼다.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성도가 제외된다고 말하지 않았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지진전문가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집안에 아이가 셋이나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나는 마침내 함께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때 거리는 이미 혼란상태였다. 이날 밤은 다시 화덕복학교에서 지냈다. 어린아이는 흥분한 것같았다. 거의 내내 잠을 자지 않고, 와라와라라고 하는데, 무슨 느낌을 펼치는 건지 모르겠다. 곁에서 자고 있던 화덕복학교의 외국인 선생도 있으니 좀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석은 더 큰 소리로 와라와라와라...라고 소리를 질러 모두 한참을 웃었다. 아이는 사태가 엄중한 지를 알지 못하니,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에 다시 차 속에서 3,4시간을 잤다. 거의 10일간 긴장상태로 지내니 피로했고, 내 몸은 마침내 더 견디지 못했다. 코가 막히고 머리가 아팠다. 분명히 감기를 심하게 걸린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진이 마침내 지나간 것같다는 것이다. 이후의 지진의 빈도와 강도는 모두 하락했다. 아마도 점차 안심해도 되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