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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이약슬난제(李約瑟難題)와 호윤문제(胡潤問題)

by 중은우시 2008. 10. 8.

글: 오효파(吳曉波)

 

1942년 11월 이약슬(李約瑟, 영국인 Joseph Needham의 중국이름, 1900-1995)은 런던에서 출발하여, 4개월만에 쿤밍(昆明)을 통해 충칭(重慶)에 도착했다. 그는 영국캠브리지대학의 생화학자였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이약슬은 '중영과학합작관'의 관장 신분으로 11차에 걸친 장거리고찰에 나섰는데, 노정은 3만리가량에 달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 "이약슬난제(Needham's Grand Question)"을 내놓는다.

 

이약슬의 관찰에 따르면, 16세기이전에 중국은 세계에서 과학기술이 가장 선진적인 국가였다. 중국인은 868년에 첫번째로 날짜가 기재된 도서를 인쇄하였고, 1088년에는 '자력으로 작동하는' 나침반을 만들었다. 1161년에는 폭탄을 쏘는 투석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후에는 정체되고 진전이 없이 갖은 수모를 당하는 늙고 쇠약한 제국으로 되었다. 왜 그런가? 이 "난제"는 이약슬의 이후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생화학자에서 저명한 중국과학사 전문가로 변신한다. 그는 1954년에 <<중국과학기술사>> 제1권을 출판했고, 서거전인 1995년에 제17권을 출판했다. 서방의 학술세계에서, 그와 미국의 비정청(費正淸, John King Fairbank, 1907-1991)은 중국문제연구에 있어서 양대 최고봉이다.

 

나는 오늘날의 호윤(胡潤)이 아직은 이약슬의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거의 비슷할 정도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도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당대의 중국상인의 재부는 도대체 어떻게 모은 것인가?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가 계속 견지할 수 있고, 당연히 가장 좋기로는 마찬가지로 장수한다면, 아마도 여러해 후에는 그가 아마도 중국사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또 하나의 영국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호윤은 국경절(10월 1일)후의 첫째주에 '백부방(百富榜)"을 발표했다. 이번에 부호방에 속한 사람은 1000명에 달한다. 작년보다 200명이 많다. 이 영국인의 '랭킹게임'은 이미 10년째를 맞이하였다. 이것도 놀라운 성적이다.

 

호윤의 본명은 Rupert Hoogewerf이다. 그는 1970년에 출생했고, 유명한 이튼스쿨 졸업생이다. 만일 이약슬이 그의 학생이자 애인인 노계진(魯桂珍)과의 결혼으로 중국사람들의 호기심을 이끌어냈다면(당시 이약슬은 89세, 노계진은 85세였다), 호윤과 중국의 인연은 더욱 강한 시대적 특질을 지닌다.

 

호윤이 중국에 온 것은 1990년이다. 그는 진수생의 자격으로 중국인민대학에서 한동안 중국어를 배웠다. 1997년 9월, 전세계5대 회계법인중 하나인 앤더슨에서 얼마동안 일을 한 후에 호윤은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상해탄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제대로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향의 부친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부친의 말에 그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너는 도대체 중국에서, 상해에서 누구이냐?" 호윤은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이름을 알리고, 자기가 그 '누구'인가가 되어야만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회계사재능을 발휘할 거리를 찾고, 중국부자들의 랭킹을 매길 생각을 한다.

 

일찌기 1995년 2월, <<포브스>>는 중국부호방을 만든 적이 있다. 그후에 만들기가 어려워 중단했었다. 1999년, 호윤은 엉성하지만 랭킹리스트를 만들어 냈다. <<포브스>>는 리스트에 관심을 보였고 이것을 <<포브스>> 글로벌판의 표지에 실었다. 이렇게 하여 호윤은 이름을 날리게 된다.

 

명단이 세상에 나오자, 의문, 질책의 목소리가 높았다. 일부 리스트에 들어간 기업가는 호윤과 소송을 벌이겠다고 하였고,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부호는 '정의를 되찾겠다'고 소리높였다. 심지어 어떤 매체에서는 이것은 아주 웃기는 리스트라고 말했다. 자료도 부정확하고, 관심범위도 협소하며, 계산방법도 잘못되었으며, 심지어 이런 방식 자체가 무수한 문제를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호윤은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인물이 된다. 거의 모든 중국의 최고급 부호들은 그가 자신을 빠트릴까봐 우려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리스트에 나오게 되면, 다시 여론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걱정했다. 호윤은 하룻밤만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각종 매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가 어느 부호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은 바로 재정이나 가십난에 올라갔다. 그는 CCTV의 <<실화실설>>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여, MC 최영원(崔永元)은 옛날 모택동이 백구은(白求恩)에 대하여 쓴 어조로 그를 소개했다: "호윤, 한 영국의 젊은이는, 불원천리 중국으로 와서, 중국인이 원래 몰랐던 백부방을 만들었고, 중국부자를 세계에 소개했고, 세계가 중국을 이해하게 하였다"

 

이때, 호윤과 그의 랭킹리스트는 이미 아주 재미있는 상업인문현상을 불러왔다. 재부에 대한 추구와 관심은 랭킹리스트를 더욱 주목하게 하였다. 그러나 원시적인 재산집적의 회색과 랭킹의 비과학 내지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미워하는 정서가 있어, 관념과 상업운영의 측면에서 혼란이 나타났다. 그리고 매번 랭킹리스트가 공포되면, 바로 세무기관은 리스트에 오른 부호의 세금조사를 벌였다. 그리고 왕왕 조사해보면 그것이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리스트에 오르는 거부들, 특히 랭킹10위내에 들어가면 매체의 추적하에 드러나야하면 안되는 '꼬리'가 잡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앙융(仰融), 양빈(楊斌), 고추군(顧錐軍)등이 그들이다. 모두 부호리스트에 올라서 유명해진후에 매체의 집중조명하에, 그들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쪼그라들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수도방(囚徒榜)' 혹은 "살저방(殺猪榜)'이라고도 부른다.

 

호윤은 자신이 중국비지니스계에 불러일으킨 영향에 어느 정도 득의만면하고 있다. 한번은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말한 바 있다. "포브스 랭킹리스트는 나의 하나의 도구이다. 만일 어느 중국인이, 어느 중국기구가 랭킹리스트를 만든다면, 모두 죽어라 욕을 먹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마침 영국인이고, 미국잡지에 실렸으므로, 우리가 하는 것이 더욱 순조로울 수 있다" 호윤의 이 견해는 확실히 진실이다. 이 서른 조금 넘은 영국청년은 대담하고 거친 방법으로 하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을 열어제쳤다.

 

2003년부터, 호윤은 포브스와 결별한다. 그는 먼저, <<유로머니>>잡지와 협력하여 부호리스트를 만들었다. 2005년, 그는 자기의 이름으로 명명된 "호윤백부방"을 만들었다. 그는 이미 완전히 중국특색의 재부유희에 몰입되었고, 물만난 고기와 같았다. 그는 여러가지 다른 랭킹리스트도 만들었는데, 부동산부호리스트, 자선가리스트, IT부호리스트, 금융부호리스트, 철강부호리스트 및 사치품리스트등등을 만들었다. 심지어 아예 온주만을 대상으로 하는 온주부호리스트도 만들었다. 그는 <<백부(百富)>>라는 자신의 잡지도 만들었다.

 

필자는 2003년말에 호윤과 한번 만났다. 그와 8시 30분에 상해포트만호텔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그가 늦었다. 10여분동안 그는 연속 2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으며, 상해교통때문이라고 사과를 했다. 인터뷰는 포트만호텔 곁의 스타벅스에서 진행하였는데, 이것도 호윤이 건의한 것이다. 그는 포트만은 커피 한잔에 50위안인데, 스타벅스는 10여위안이라는 것이다.

 

이날, 호윤은 아주 편하게 입고 왔다. 옅은 황색의 외투에 흑회색의 격자무늬의 목도리를 하였는데, 나에게 Salinger의 영국신사에 대한 묘사가 생각났다: "그들은 우산 하나를 끼거나 파이프를 물고 있거나 아니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격자무늬의 목도리를 두른다." 호윤의 말하는 모습은 아주 세심했다. 상대방의 느낌에 주의하였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영국식표정으로 상대방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는 중국어가 뛰어났을 뿐아니라,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도 아주 의외였다. 그는 나에게 반문했다. '중국역사상 제1차공업문명은 언제 출현했습니까' 내가 대답을 잘 하지 못하자, 그는 득의만면하여 '그것은 송나라입니다. 사대발명이 있잖습니까?'라고 했다"

 

그때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호윤이 일종의 시공을 초월한 배경에서 관찰한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의 부호중 가장 많은 것이 부동산업자인데, 2003년에는 농업(이것도 토지라면 토지이다)과 관련된 새로운 부자가 많았다. IT업종과 관련된 사람은 4,5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10위이내의 부호중 3명이 IT출신이다. 소매업에서 월마트 가족은 부호리스트의 10위내에서 4자리나 차지한다. 중국에는 단지 궈메이와 자스제(家世界)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미국 400명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많은 분야는 오락매체분야인데, 중국에는 겨우 1명뿐이었다.

 

호윤 "부자구락부'의 문턱은 1999년에는 600만달러였는데, 2002년에는 8000만달러로 올라갔다. 이들 대륙부호의 평균연령은 46세이다. 그중 영문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3명뿐이다. 이들 부호의 아이들 중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50%가 넘는다. 전세계 10억달러이상의 부호리스트중에서 홍콩사람이 13명인데, 그들의 평균연령이 얼마인지 아는가? 72세이다. 대만은 5명이 있는데, 평균연령은 80세에 가깝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우리의 부하는 아직도 제1세대라는 것이고, 아직 성장기에 있다는 것이다. 2002년, 광동지역에서 17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1,2,3위는 모두 다른 성에서 이민온 사람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전국에서 유일하였다.

 

이들 재미있는 데이타는 만일 랭킹리스트가 없고 다각도로 비교분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호윤은 그의 발견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역사와 그림조각맞추기를 즐겨하는 '영국습성'은 이때 생동감있게 드러난다. 호윤은 믿고 있다. 부호리스트는 하나의 열쇠가 되어, 많은 숨은 비밀의 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고.

 

당시 나는 이미 예감했다. 이 영국청년은 수수께끼를 탐색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시간과 데이타가 집적되면, 그가 형성한 학술역량은 도저히 경쟁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들 랭킹리스트는, 벌써 10년간 지속되고 있다. 호윤은 이미 사실의 진상에 더욱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와 데이타가 많아짐에 따라, 업무방법과 계량체계도 날로 완비되고 있다. 오늘의 중국상업계에서, 호윤백부방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랭킹리스트가 되었다. 오락의 분위기는 이미 사라졌다. 사람들은 날로 학술적인 의미와 시대적인 가치로 접근하고 있다. 호윤이 집적한 리스트의 변동은 매년 수천명을 샘플조사해서 이루어지며, 마침내 방대하고 수량화된 분석이 가능한 데이터베이스가 되는 것이다.

 

과거 10년동안, 호윤과 영국여자친구는 중국에 자신들의 가정을 차렸다. 그리고 두 명의 예쁜 딸을 낳았다. 현재 그 자신은 "신상해인"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를 "외국적의 중국관찰가"라고 본다면, 그는 이 동방국가에 거주한 시간이 이미 비정청, 이약슬의 합계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