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명(張鳴)
외국인도 회의를 열고, 중국인도 회의를 연다. 둘이 근대에 맞부닥쳤는데, 비로소 양쪽에서 회의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동방이건 서방이건, 회의를 열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문명의 표지였다. 어디든 형식은 모두 비슷했고, 모두 할 말을 다했다. 장로가 최종적으로 의견을 내면 결론이 되었다. 만일 장로의 의견에 반대의 목소리가 많으면 다시 논의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인류학자들은 '씨족민주'라고 부른다. 이런 민주의 가장 정치한 형태는 바로 고대그리스, 로마의 공화국이었다. 확실히 이러한 민주적인 회의에 투표로 표결하는 것은 아직 흥성하지 않았던 것같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공화국에서 여는 공민대회는 직접민주라고 불리는데, 사람들은 병기를 두드리는 것으로 찬성 혹은 반대를 표시했다. 이처럼 두드려서 표시하는 것은 동방초원에서도 있었다
중세기에 들어선 후, 동방과 서방에서 회의는 여전히 개최했다. 그러나, 민주는 없었다. 회의를 여는 것은 나라의 과두들이 서로 나눠가지는 식이 아니라, 나라의 권위자가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서방은 동방만큼 회의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왕조는 황제가 한마디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회의는 자주 개최했다. 한나라를 예로 들면, 어전회의, 재보회의(宰輔會議), 백관회의가 있었고, 대조회(大朝會), 소조회(小朝會)가 있었다. 황제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 조정으로 가서 회의를 열었다.
이런 회의는 기본적으로 대신들이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었고, 의사결정자가 참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사결정자는 아마도 황제일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황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태후, 외척, 권신 혹은 불알이 없는 환관이기도 했다. 회의를 열 때, 토론은 없었다. 그러나, 논쟁은 있을 수 있다. 왕왕 서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회의를 주재한 황제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까지 있었다. 황제와 죽어라 맞선 경우도 없지 않았다. "신은 그래도 아니된다고 아뢰옵나이다" 끝까지 반대하는 신하에 대한 기록이 역사서에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논쟁은 사적으로 해결되었고, 타협되었다. 사적으로 타협되거나 사적으로 교섭하게 되는데, 술자리에서나 기루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곳이 중국의 큰 인물들이 실제 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였다. 회의상에서 하는 말은 모두 '단합에 불리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회의는 하나의 절차로 되고, 조정의 대소사를 정하는 절차는 모두 사적으로 미리 정해진 바에 따라 처리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논의가 끝난 사항에 대하여도, 회의상에서는 모두 엄숙하게 관화로 의견을 나타냈다. 이 경우 반드시 관리의 지위, 신분에 따라, 상하위계질서에 따라야 한다. 누가 먼저 말하고, 누가 다음에 말할지, 절대로 중간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만일 간크게 중간에 끼어들었다가는 어사가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이후에 절대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관청이 이러하니 민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종친의 일을 논의하는 때에도 대체로 이러했다. 사적으로 상의하고, 회의는 형식이고, 의례였다. 몇몇 주요인물들이 일을 협의한 다음에, 회의를 열 때면, 그대로 통과시킨다. 약한 곁가지 종친들은 의견이 있더라도 제대로 반영시킬 수가 없고, 그저 참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회의를 중국은 천년이상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양인들이 왔다. 불청객인 서양인들은 전쟁을 일으킬 뿐아니라, 아편도 팔고, 무역도 하고, 중국인들과 교섭도 하고 같이 회의를 하자고 덤볐다. 중국인들은 아주 골치아프게 느꼈다. 서양인들도 괴이하게 느꼈다. 온갖 경험을 다 한 영국공사 Thomas Fancis Wade는 그의 일기에서 그가 중국의 총리아문의 여러 대인들과 회의를 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총리아문의 규칙은 유럽각국의 외교부와 전혀 다르다. 여러 각국의 사신이 총리아문에 도착하면, 반드시 술과 과일을 내놓는다. 왕과 대신이 차례로 손님들과 자리를 잡고, 마치 음식을 먹는 것이 주요한 업무인 것같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일과 권한이 한 군데 집중되어 있지 않아서, 대신들은 자기의 의견을 제시할 수가 없다. 매번 사신들이 의견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 대신은 친왕을 쳐다보고, 새로 들어온 대신은 오래된 대신을 쳐다본다. 만일 친왕이 한마디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돌연 그에 호응한다. 그리고 아니라고 하는 말은 전혀 없다. 만일 친왕이 말을 하지 않으면, 여러 대신은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하루는 내가 관청에 갔는데,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발언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직 심모라는 자가 더이상 침묵을 지키기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먼저 답변을 했다: "오늘 날씨는 과연 좋군요" 왕대신이 '오늘 날씨가 과연 좋군요"라고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대신들이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는 것처럼 호응하는 일은 없었다.
보기에 중국인들이 처음에 서양인들과 회의를 할 때, 비공개적인(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이 섞여있었던 것같다. 사적인 교섭을 위한 술과 과일도 나오고, 먹고 마시면서 감정을 쌓았다. 그리고 진짜 얘기할 때가 되면, 등급에 따라 시작한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먼저 말한다. 만일 그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하면 모두 그의 말에 호응한다. 심지어 '날씨가 아주 좋다'는 말 한마디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서양인들에게는 웃음거리였지만, 그래도 중국인들은 잘못을 범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총리아문은 중국의 외교부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부가 이러한 회담으로 무슨 외교를 하겠는가? 참을성있는 영국인은 그래도 예의로 대하였지만, 성격이 급한 프랑스인들은 그냥 소리지르곤 했다. 당연히 그런다고 되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에, 청나라정부의 대외교섭은 모두 직예총독겸 북양대신과 남양대신 겸 남양대신이 처리했고, 증국번, 이홍장과 같은 인물들이 담당했다. 위로는 태후의 묵인이 있고, 총리아문은 그저 나중에 추인하면 그만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홍장이 지방대신의 신분으로 수십년간 청나라 외교를 좌지우지한 기술적인 원인이다.
'중국과 사회 > 중국의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경의 가난한 중산층 (0) | 2008.06.19 |
---|---|
중국식 강제기부의 이해득실계산 (0) | 2008.06.04 |
북경의 어느 폐품수집왕의 인생유전 (0) | 2008.03.10 |
중국의 개방(丐幇) (0) | 2008.03.08 |
중국의 심각한 성비(性比) 불균형 (0) | 2008.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