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안(潘安, 285-312): 위진시대에 살았고, 본명은 반안이 아니고 반악(潘岳)임. 자는 안인(安仁)인데, 나중에 반안으로 전해지게 된 경위에 대하여 하남대학 문학원의 왕리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대의 문장은 변려체나 시가는 대장, 압운을 위하여 줄여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 반악은 자가 안인이므로 반안인으로 불리웠는데, 그가 일찌기 중국역사상 가장 음탕하기로 이름난 가남풍 황후를 모신 바 있으므로 어질 인(仁)자를 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인(仁)을 빼고 반안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반안은 중국역사상 최고의 미남으로 불리운다. 그리하여 "모사반안(貌似潘安)"은 잘생긴 남자를 칭찬할 때 쓰는 문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생겼는가? 키는 얼마이고, 오관은 어떠했는가? 이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그저 "미자의(美姿儀, 자태와 의표가 아름다웠다)"라는 표현만 쓰고 있다. 이로써 그는 외모도 출중했고, 기품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세설신화>>의 기록에 의하면 반안이 매번 집을 나서면, 많은 여자들이 그를 쫓아왔고, 그에게 꽃도 던지고 과일도 던져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꽃과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척과영거(擲果盈車)"라는 고사의 기원이다.
중국역사의 유명한 미남자중에서 반안은 아주 복잡한 인물이다. 그의 일생에서 80%는 완벽했지만, 나머지 20%는 길을 잘못 들었다. 그는 50년을 군자로 살았는데, 50세가 넘은 후 갑자기 성격이 바뀌어서 권력자에 아첨하고, 간교한 가남풍의 집단에 가담하여 태자를 모함하였으며, 결국 자신은 목이 잘리게 된다. 그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를 모해한 자는 그보다 100배는 후안무치한 소인배였다. 그자가 반안을 모함한 이유는 무슨 광명정대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자는 바로 서진시대 "팔왕의난"에서 가남풍을 타도하는데 주역이었던 손수(孫秀)이다.
손수는 자가 준충(俊忠)이고 낭야(오늘날 산동성 임기)사람이다. 오두미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일반백성들에게 제법 영향력이 있었따. 오두미교는 한나라말기에 나타났고, 도교의 전신이며, 위진시대에도 신봉하는 무리가 많았다. 동진의 손은(孫恩)은 도교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손은은 바로 손수 집안의 후손이다. 이로써도 손수의 집안이 도교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손수의 가장 큰 특징은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 일찌기 반안의 수하로 하급관리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반안은 아직 젊었고, 지방에서 관리를 지내면서, 인품이 바르며, 백성들을 위하여 적지 않은 좋은 일들을 해주었다. 그렇지만 손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항상 문제를 일으켜서 상사인 반안의 책망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반안에 대하여 원한을 품게 되었고,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나중에 손수는 기회를 잡아 사마의(司馬懿)의 아홉째 아들인 조왕 사마륜(司馬倫)의 수하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아부에 재능이 있어 바로 사마륜의 총애를 받는다. 사마륜으로 말할 것같으면 그다지 좋은 자는 아니었다. 황족이면서 사람을 시켜 황제가 입는 가죽옷을 훔치게 한 적이 있었다. 법률에 따르면 참형을 받아야겠지만, 황족이라는 이유로 진무제가 사면해준다. 나중에 조왕에 오르고, 업성을 지키게 된다. 그리하여 손수가 이러한 주군과 함께 일하니 서로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손수와는 반대로 반안은 명성이 너무 뛰어나다보니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게 된다. 반평생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아 관직은 항상 낮은 편이었고, 관료로서는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5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반평생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가 "졸(拙)"에 있다고 보고, "졸"을 버리고 "교(巧)"를 택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반안은 이때부터 권력자에게 아부하기 시작하며, 당시 세도가였던 가충(賈充)등에게 의탁한다. 가남풍이 황후로서 수렴청정을 할 때, 반안은 당시의 권력자인 가밀(賈謐, 가남풍의 조카)의 문학집단인 "이십사우(二十四友)"의 우두머리가 된다. 가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는 자주 가밀의 집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밀이 문을 나서면 바로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을 했다.
그렇지만, 반안은 정치를 할 재목은 못되었다. 정치의 바람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고, 중요할 때 줄을 잘못 섰다. 299년, 반안이 23세가 되던 해의 말에,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진다. 연혜제(燕惠帝)의 아들인 민회태자(愍懷太子)는 태자에서 폐위되고, 서인으로 강등된다. 민회태자는 가남풍의 소생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가남풍이나 가밀에게 있어서 그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일단 그가 즉위하면 가씨집안은 끝장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남풍과 가밀등은 태자를 폐위하고자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서. 민회태자전>>의 기록에 의하면, 하루는 가남풍이 황제가 병이 들었다는 거짓말로 태자를 입조하게 했다. 태자가 도착한 후 별실로 데려갔고, 시녀가 술과 대추를 내놓으며, 황제가 내린 것이라고 하면서 태자에게 억지로 마시게 했다. 이때 또 다른 시녀가 종이와 붓을 들고 오고 초서로 된 글을 가져와서 태자에게 베껴쓰게 하였다. 원고는 신령에게 기도하는 문투이며, 태자가 평소의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폐하는 스스로 끝내야 합니다. 스스로 끝내지 않으면, 내가 들어가서 끝내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글은 바로 반안이 쓴 것이다. 태자는 이 글이 반역을 꾀한 것이라고 하여 폐위된다. 이 사건은 반안의 일생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는다. 물론 당시 시대배경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는 있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또 다른 당시의 명망가인 왕연(王衍)의 행동도 의미심장하다. 왕연은 장녀를 가밀에게 시집보내고, 작은 딸을 민회태자에게 시집보냈었다. 태자에게 문제가 생기자 바로 딸로 하여금 태자와 이혼하게 하였다. 태자가 가남풍에 의하여 감금된 후, 겨우겨우 부인인 왕연의 작은 딸 혜풍(惠風)에게 서신을 써서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고 한다. 왕연은 딸로부터 이 서신을 받았는데, 만일 즉시 황제에게 보고했더라면, 태자는 아마도 억울하게 죽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연은 이 서신을 묻어두고 보고하지 않았다. 태자는 결국 피살된다.
가남품이 태자를 폐위시킨 조치는 멍청한 짓이었다. 민심을 잃었을 뿐아니라, 가씨집안 내부의 분열도 가져왔다. 당시 여러 왕들과 대신들은 불만이 있기는 해도, 가남풍의 위세에 눌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평민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궁중금군의 중하급군관들은 여기에서 기회를 보았다. 그들이 고위관료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들은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시 밀려나있던 태자에게 승부를 걸었고, 태자와 한 편이 되었었다. 언젠가 태자가 황제에 오르면 자기들도 승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태자도 그들에게 잘 해 주었다. 고급군관들은 모두 가씨집단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태자도 중하급군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자가 폐위되자 이들 중하급군관들은 미래에대한 청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가남풍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가씨집안이 똘똘뭉쳐 하나로 되어 있었다면 그저 원망으로 그쳤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가씨집안은 스스로 분열되고 만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가남풍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이들은 자신의 꿈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남풍을 폐하고, 새로 태자를 옹립하면 이들은 세력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방으로 뜻이 맞는 중하급군관들을 연락했고, 상당수 사람들을 포섭했다. 그런데, 이들도 자신들의 역량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누군가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사람이 신임 금군두령인 조왕 사마륜이었다.
중하급군관들은 손수를 통해서 조왕 사마륜에게 정변에 관한 정보를 알린다. "태자가 폐위되고 후계자가 없어졌다. 그러니 반드시 혼란이 올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조왕도 가남풍과 한편이라고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일을 벌이면, 당신은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다. 차라리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손수는 이 방안에 찬동했다. 이는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왕에게 극력 권한다. 사마륜은 원래 보통사람이고 용렬하며 무슨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손수에게 맡기고 그의 말에 따랐다. 이리하여, 사마륜은 중하급군관들과 손을 잡고, 황궁내외의 주요한 인물들을 포섭한다. 어느 날 조왕 사마륜은 정변을 일으켜 "중궁과 가밀은 우리 태자를 죽였다. 이제 중궁을 폐한다. 너희들이 내 명을 따르면 관중후에 봉해질 것이고, 어기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라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손수는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야심이 있는 자였다. 주군을 도와서 조정을 장악한 후 다시 사마륜을 황제에 앉히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그는 정교한 계획을 세워서 결국 301년 사마륜이 황제에 오르게 한다. 혜제는 태상황으로 밀려난다. 손수는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생살대권을 장악한 중서령에 오르게 된다. 소인배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아주 잔인해지는 법이다. 손수의 손에 많은 자들이 죽었다. 반안은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어느 날 조정에서 손수와 마주쳤다. 그는 "아직도 옛날 일을 기억하시고 계십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손수는 "항상 간직하고 있다.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반안은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반안은 요행을 바라고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떠나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히 떠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 보더라도 반안에게는 정치적인 식견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조카인 반니(潘尼)도 그와 함께 가밀에 의탁하였었지만, 이때 병을 핑계로 집에 돌아와 쉬고 있었다. 그는 사마륜과 손수를 이렇게 피한 후에 나중에 관직이 더욱 높아졌다.
정변이 일어난 3,4개월후에 반안은 손수에 의하여 모반죄로 몰려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게 된다. 함께 처형된 사람은 반안과 함께 가밀에게 절하곤 했던 석숭(石崇)이 있다. 석숭이 피살된 것에는 그가 가씨집안과 일당이라는 것이외에 손수가 그에게 애첩 녹주(綠珠)를 넘겨달라고 했을 때 ,석숭이 다른 것은 다 주어도 녹주는 안된다고 거절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손수는 석숭을 모반죄로 몰아 처벌하게 된다. 석숭을 모반죄로 모는 김에 반안도 함께 끌어넣는다.
반안은 난신적자에 의하여 살해되었지만, 사마륜이 정권을 잡고 있던 동안에는 아무도 감히 그를 정식으로 매장하지 못했다. 다음 해 4월, 제왕이 병사를 일으켜 사마륜, 손수등을 죽이게 되자, 조카인 반니가 비로소 반안을 정식으로 안장한다. 그리고 묘비를 세웠는데, 묘비에 새긴 글자는 "급사황문시랑반군지묘(給事黃門侍郞潘君之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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