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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수호지 영웅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

by 중은우시 2008. 2. 25.

글: 문재봉(文裁縫)

 

중국의 4대명저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은 송휘종(宋徽宗) 통치시기의 기세가 대단했던 양산박 농민의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상 진실한 송강(宋江)과 양산박의거는 소설책에 나오는 것과 같았을까?

 

실제,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송나라의 300여년간, 크고 작은 농민반란은 수백번있었다. 이는 모든 역대왕조가 모두 그러했다. 다만, 송나라의 농민의거는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그저 일개 지방에 그쳤고, 참여한 인원수도 한계가 있었으며, 지속된 기간도 짧은 편이었다. 송나라에서 일어난 수백번의 농민반란중에서 송강이 이끄는 양산박농민의거는 규모로 보거나 영향력으로 보거나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작은 반란이 이처럼 유명하게 되었는데, 첫째는 남송때 편찬한 <<선화유사(宣和遺事)>>에서 이 농민의거를 소설화하고 이야기로 만들었으며, 둘째는 명나라때 시내암이 <<수호전>>을 썼으며 이때 양산박 영웅호한을 주제로 하게 됨에 따라, 양산박과 송강의 이야기가 민간에 퍼지게 되었고,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게 되었으며,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소설은 비록 역사와 약간의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송강의거는 북송말기인 선화연간에 일어났고, 농민반란을 촉발시킨 도화선은 북송이 설치한 "서성괄전소(西城括田所)"였다. 송휘종은 재정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화원년(1111년)에 이 기구를 설치하였는데,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전념하는 기구였다. 반란은 양산박을 근거지로 하게 된다. 양산박은 황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송강등은 하북극도(河北劇盜)라고 불리웠다. 양산박은 운주(州, 지금의 산동성 동평) 서남쪽에 양산(지금의 양산현 남쪽)을 둘러싼 주위의 큰 호수였다. 이 큰 호수는 북송때 황하가 두번이나 둑이 무너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때 황하의 둑이 무너지면, 강물이 범람하여 원래 얕은 땅에 물이 들어왔고, 양산주위에 방원 800리의 큰 호수가 형성된 것이다. 그때, 양산주위의 생활은 모두 물고기를 잡고, 연밥을 따며, 부들을 거둬서 먹고 사는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그들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그런데, 양산과 같은 이런 생활조건하에서도 북송정부는 방대한 군사적 지출을 감당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곳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원래 지급할 세금부역외에 한꺼번에 10만여관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조정에 세금은 납부한 후에, 생활조차 연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방정부는 세수증가를 위하여, 양산박의 주위에 관문을 설치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양산의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연받을 따는데도 인두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누락된 세금에 따라 바로 형벌을 가했다. 게다가 가뭄이나 홍수등 재해를 입어서 백성들이 수확을 하지 못해도, 세금은 감면되지 않았다. 양산부근의 농민들은 더이상 관청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양산박을 기지로 반항하게 된 것이다.

 

반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송사. 후몽전>> <<선화유사>>등인데, 겨우 36명의 이름이 전해진다. 이 36명은 송강, 조개, 오용, 노준의, 관승, 사진, 시진,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 유당, 장청, 연청, 손립, 장순, 장횡, 호연탁, 이준, 화영, 진명, 이규, 뇌횡, 대종, 색초, 양지, 양웅, 동평, 해진, 해보, 주공, 목횡, 석수, 서녕, 이영, 화화상, 무송이다. 당연히, 36명만으로는 농민반란을 일으켜, "제와 위 지방을 횡행"할 수 없었을 것이고, 송나라관병 수만명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36명은 반란군의 크고작은 장군들로 본다. 즉, 송강과 함께 의거에 참여한 사람은 아마도 36명일텐데, 나중에 이 36명은 각각 부대를 하나씩 통솔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송강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는 도대체 몇명이나 있었을까? 사서에 정확한 기록은 없어, 통계낼 수는 없지만, 개략 계산해보면 수천명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서에 기재된 송강의거에 참여한 사람은 36인인데, 나중에 <<수호전>>에서 108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낭영은 <<칠수류고>>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나관중이 책으로 만들고자 하면서, 36명을 천강으로 하고, 여기에 72명의 지살을 추가했다" 그래서 양산박 백팔호한의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송강반란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수호전>>에 따르면, 양산박의 영웅들이 모인자리에서 송강은 앞날을 생각해여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조정에 귀순한다. 송강은 장군이 되어 방랍의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나 송휘종은 송강을 죽여버리고, 나머지 양산박의 호한들도 죽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여 몇명 남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양산박의 호한들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정부에 귀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송말원초에 만들어진 <<선화유사>>에는 양산호한들이 정부에 귀순한 후 모두 작위를 받았다고 기록하여, 수호전의 내용과 일치한다. 북숭말기에 이약수가 쓴 <<포도우성>>에도 송강등 36인이 함께 작위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약수가 살았던 시기는 북송말년이어서 양산호한들이 활동한 시기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가 비록 직접 양산박 호한들이 귀순하는 장면을 보지는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기록이 그다지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정사의 기록을 보면, 양산호한들은 정부에 귀순하지 않았고, 해주지주(海州知州)인 장숙야(張叔夜)가 이끄는 군에 포로로 잡혔다고 되어 있다. 선화3년3월, 송강은 부대를 이끌고 물길을 따라 남으로 확장하였으며, 부근에 있는 연해의 관리들이 당황하게 된다. 해주지주인 장숙야는 나이가 많은 관리였는데, 신속히 몇 개 현의 무장역량을 끌어모아, 천여명의 결사대를 조직한다 그리고는 매복을 하여 양산호한을 전부 붙잡고자 한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송강일행은 함정에 빠졌고, 그들은 황급히 육지로 올라와 관군과 싸우고자 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인원만을 배에 남겨두었다. 장숙야는 사람을 시켜 배를 불태우게 한다. 송강은 무기와 물자를 싣고 있던 배를 불태운 것이다. 송강일행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고, 투지도 약해졌다. 그러다 결국 장숙야에게 패하여 포로가 된다. 정사를 보면, 양산호한은 초안을 받아 귀순한 것이 아니고, '36인이 동시에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니다. 송강등을 격파한 후, 장숙야와 두 명의 관리는 함께 송휘종의 상을 받고, 장숙야는 이후 관직이 계속 올라가서, 조정의 중신이 된다. 그의 관직이 높아진 것은 송강등을 붙잡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사의 이런 기록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송강등 영웅호한들은 유동성이 커서, 행군이 아주 빨랐다는 석이다. 그리고 이미 백전노장들이고, 지모가 뛰어난 오용등이 있어, 행군노정은 면밀히 계산했을 것이므로, 장숙야가 끌어모은 1000여명의 장사 정도는 송강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송강일행의 전선이 불에 타더라도, 양산호한의 일관된 방식은 배수진을 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인데, 어찌 모두 투지를 잃고 생포된단 말인가. 그리고 하룻밤만에 송강등 36인을 모두 체포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숙야도 역전노장이고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두 명의 경험이 풍부한 관리가 도와주었다. 그러므로, 몇 개 현의 무장역량을 끌어모았고, 장숙야 자신의 부대만으로도 송강을 무찌를 능력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송강등이 생포된 것도 역사적 사실일 수 있을 것같다.

 

이상의 주장 이외에, 양산호한의 결말에 대하여는 다른 몇가지 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중 하나는 왕등(王登) 부자가 송강등 양산호한을 패배시키고,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북송말년의 사인(詞人) 갈승중이 <<승의랑왕공묘지명>>에서 기록하고 있다. 즉, 왕등의 묘지명에 따르면, 왕등이 용감하게 잘 싸운 것을 칭송하고 있다. 웃기는 일은 갈승중이 이 묘지명을 쓴 후 얼마되지 않아, 한 글장이는 왕등의 아들인 왕사심을 위하여 묘지명을 썼는데, 거기에 쓴 내용은 왕사심이 송강등을 격파했다는 내용이다. 이 두 편의 묘지명을 잘 대조해보면 몇 가지 헛점이 드러난다. 왕등(부친)의 묘지명에는 왕등이 스스로 부대를 조직하여 송강의 수천명형제를 섬멸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들의 묘지명을 보면 아들이 송강을 격파했는데, 송강등은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더욱 웃기는 일은 왕씨부자 2명의 관직은 목양현위에 불과했고, 수하는 기껏해야 80명인데, 어찌 송강의 수천무리를 격파할 수 있었겠는가? 송강등이 1개현위의 부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설은 성립되기 힘들다고 본다.

 

또 다른 견해는 양산박의 호한들이 대부분 채거후(蔡居厚)에 의하여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채거후는 북송 내주교수(지금의 산동 평도시) 사람이다. 일설에는 항주사람이라고도 한다. 채거후는 진사급제하고 창주, 응천부, 진주등의 지방을 다스렸었다. 일찌기 기거랑, 우간의대부, 호부시랑등의 직위에까지 승진한다. 나중에 사고로 파직당한다. 채거후는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죽는데, 친척인 왕생도 급사한다 그런데, 3일후 왕생이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신비롭게 알려준다. 자신이 죽은 후에 음조지부(陰曹地府)에 갔는데, 아주 무서웠다고 한다. 거기서 걷고 걷다가 채거후를 만났는데, 그는 죄수의 모양을 하고, 두명의 귀신이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흘렀고 채거후는 고통을 못참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왕생이 다가가서 채거후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채거후는 운주에서 양산호한 500인을 죽였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채거후의 처는 이를 듣고 도사를 청하여 죽은 남편의 망령을 위한 제를 지내주고, 죽은 양산호한의 망령에 사죄하였다. 그러나, 채거후가 농민반란을 진압하는데 가담했다고 하더라도, 운주는 아니었다. 채거후의 경력과도 맞지 않을뿐아니라, 송강등의 사적과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