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숙방(張淑芳)
유건(劉建. 가명)은 가장 먼저 상해로 온 대만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제1세대 대만상인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륙에 대한 깊은 감정, 대만의 앞날에 대한 우려, 조국에 기여하려는 마음, 양안(兩岸, 대륙과 대만)의 조기 삼통(三通, 通郵,通商,通航을 가리킴)에 대한 희망. 그는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구정연휴기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친척들을 만나볼 기회도 포기하고, 3월 22일의 비행기표를 예약해서 투표했다.
같은 날, 회사에서 상해로 파견나온 간굉(簡宏)은 거의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 동안 친구가 보낸 메세지로 투표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한번 슬쩍 보고는 회의를 밤10시까지 계속했다. "개략 십여개의 이런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구정에 축하한다는 메세지보다는 적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도 의외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서 누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니, 누가 당선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젊은 간괴은 제2세대 대만상인을 대표한다. 이들은 전혀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남록(藍綠, 국민당과 민진당을 대표하는 색깔)을 묻지 않고, 경제를 위주로 생각한다.
제1세대 대만상인: 정치와 경제의 갈등
유건처럼 대만으로 돌아가서 투표하겠다고 고집하는 대만상인이 적은 수는 아니다. 규모는 이전에 있었던 3번의 대만총통선거의 기록을 갱신했다. 전국대만동포기업연의회(臺企聯)의 책임자는 25만명이상의 대만상인이 대만으로 가서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중심국제(中芯國際)는 개략 400-500명의 대만출신 직원이 있는 반도체회사이다. 가족을 포함하면 800-900명에 이른다. "아마도 70%의 대만직원들이 대만으로 갔을 겁니다" 그중의 한 사람인 Peter는 여러가지 이유로 대만으로 가서 투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선거의 진전에는 관심을 계속 가졌다.
그는 "투표는 민주사회의 기초상에서 법률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입니다. 투표하지 않는 것은 이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대만의 일원으로써, 당연히 투표를 통하여 마음속의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은 자비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서 투표를 하기 위하여 대만으로 갔습니다. 대선이 끝난 후, 돌아오는 항공편이 많지 않아, 투표에 참가한 많은 대만상인들이 아직 대륙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아오는 일정이 1주일이나 밀리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건은 바로 자기처럼 대륙에서 근 20년간 일하고 생활한 사람들이야 말로 양안 상호작용의 중요성과 장점을 몸으로 느낀다고 말한다. 이는 대륙의 환경을 접해보지 않은 대만인들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대륙의 대만상인은 대부분 국민당편이라고 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다수의 대만상인은 대만해협의 평화를 원하고, 양안의 국면이 안정되기를 원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삼통"을 주장하고, 양안간에 경제교류를 강화하기를 요구한다.
대만 해기회(海基會)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대륙에서 장기간 거주하며 일하는 대만상인이 75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비공식적인 추산에 의하면, 장기간 대륙에서 사업, 근무 혹은 정착한 대만인은 아마도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한다. 만일 여기에 그들의 가족을 가산하면, 수치가 상당할 것이다.
대만에는 약 1700만명의 선거인이 있고, 과거 총통선거에서는 개략 80%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대만상인들의 표는 남록간의 실력차가 크지 않은 상황하에서 선거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쌍방진영에 모두 큰 영향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남록진영에서 서로 쟁취하려는 대상이 된다.
2004년, 국민당의 "연송(連宋, 연전, 송초유)팀"이 민진당의 "진여(陳呂, 진수편, 여수련)팀"에 아슬아슬하게 졌을 때, 대만상인들 중 되돌아가서 투표에 참가한 사람의 수가 적었다는 것이 결과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당시 대륙의 각지 대만상인들 중 대만으로 돌아가서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약 20만명이었다.
"연속 2번이나 선거에서 지자, 우리는 또 질까봐 두려워졌습니다" 유건의 말이다. 민진당이 집권한 8년간은 민생이 힘들어지고, 경제는 쇠퇴했다. 비록 자신은 오랫동안 상해에서 일해서, 대만상황의 제한을 받지는 않지만, 대만내의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수입이 줄고, 생활이 갈수록 힘들어진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좋지는 않다. 대만은 원래 아시아의 사소룡(四小龍)중 으뜸이었는데, 지금은 맨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시류를 역행한 방식은 대륙에 머물고 있는 많은 대만상인들이 우려하는 점이다.
대만경제와 양안무역교류에 대한 관심은 금년에 대만으로 돌아가 투표한 대만상인의 비율을 매우 높게 하였다. 여러가지 곤란한 점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위축되지는 않는다. 만일 민진당이 양안간의 직항만 추진했다면, 대만상인들이 되돌아가 투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8년간, 양안직항을 제외하고, 민진당에서 추진하지 않았지만, 양안교류를 촉진하는데 유리한 일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대륙여행객의 대만관광, 대만금융기구의 내지경영개방등.
그러나, 국민당은 일관되게 양안교류를 주장하고, 이로 인하여 대륙대만상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2008년 3월 22일,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총통후보)는 마침내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는 대만상인들의 귀향투표의 열정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제2세대 대만상인: 정치와 경제는 무관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난을 극복하고 1장의 총통투표권을 행사했고, 어떤 사람들은 더욱 현실적인 고려를 했다. 이들 대만상인들은 대부분 젊은 대만상인들이다. 상해에서 일하는 대만적의 매니저는 대만에 한번 갔다오려면 비용을 많이 쓰므로, 아직 월급쟁이인 대만적의 일반직원으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고 한다.
간굉에 따르면, 각종 제약으로 토요일에 대만에 가서 투표를 하면, 월요일에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어, 일에 지장을 줄 수 있다. "요 며칠이 공휴일이지만, 갔다왔다하려면 아주 피곤하다"
간굉은 4년전에 상해로 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이 곳의 생활에 적응했고, 대륙의 친구도 대만보다 적지 않게 되었다. 자기에게 선거결과를 알려준 메세지도 대만과 대륙의 친구들이 반반이었다. 일부 상해에 있는 비대만적인사들도 대만상황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는 간굉이 대만에 대하여 정보를 취득하는 주요 루트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 티비를 보면, 특별히 대만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보지는 않는다. 만일 두개의 티비채널이 각각 대만정치와 음식이야기를 한다면, 리모콘은 분명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대륙의 환경과 대만은 좀 다릅니다. 인문, 기후, 습관, 시장등이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는 여러 요소중 하나이고,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간굉이 보기에, 사업은 사업이고, 정치와 연결시킬 필요가 없다. 이런 "경제지향"의 관점은 주류가 아니기는 하나, 대륙의 대만상인중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대륙을 그저 투자장소로 여길 뿐이고, 일본, 미국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무정치태도'를 취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녹영(민진당)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런 대만상인은 대부분 대만상인이 형성한 제3차대륙투자열기때 형성되었다. 이 투자열기는 2000년에 시작되었다. 중국은 2001년에 WTO에 가입했고, 대륙경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만상인은 이 중요한 역사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대륙투자를 확대했고, 대륙투자전략을 조정했다. 제조업영역에서 단계를 높이는 외에, 투자범위와 영역도 계속 확대했다. 부동산개발, 유통, 금융, 보험, 의료, 교육, 미디어등 여러 영역에서, 대만상인들이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이다.
이전에도, 대만상인의 대륙투자는 두번의 열기를 겪었다.
1980년대초기, 대만상인은 시범적으로 대륙투자를 시작했다. 이때는 지연과 문화가 가까운 복건성의 연해지구가 대상이었다. 수량도 한계가 있었다. 이후 점차 대만상인의 제1차대륙투자열기가 형서왼다. 대부분은 대만에서 주문을 받고, 대륙에서 가공생산하여, 제품을 해외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양두재외)兩頭在外)"의 경영모델이었다. 평균대외판매비율은 85%에 달하였고, 투자주체는 중소기업이 위주였으며, 투자규모도 적은 편이었다. 프로젝트당 투자금액이 100만달러가 되지 않았다. 투자방식은 합자 혹은 합작경영이 위주였고, 독자기업은 비교적 적었다. 투자산업에서, 신발, 플라스틱, 방직, 기본금속등 전통산업과 노동밀집형 산업이 위주였다.
1992년봄, 등소평의 남순강화후에 양안관계는 가장 안정된 시기를 맞이한다. 대만당국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개방정책을 취한다. 그리하여 대만상인의 대륙투자의 제2차열기가 시작된다. 통계에 의하면, 1992년에서 1994년까지, 대만상인의 대륙투자프로젝트는 2.3만개였고, 계약금액이 200여억달러이고, 실제투자금액이 75.8억달러였다. 양자는 이전에 대만상인이 투자한 누적계약금액의 50%이고, 누적실제투자금액의 31.5%였다. 제1차투자는 소비성 전자제품, 화학공업, 운수도구, 건자재시멘트, 유리, 식품음료등의 산업이 위주였따.
그러나,1995년이후, 양안관계의 위기가 가중되고, 아시아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대만상인의 대륙투자는 배회 혹은 하강국면을 맞이한다. 2000년이 되어서야 제3차투자열기가 다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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