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국, 모복해, 장방량
글: 채진니(蔡珍니)
장개석과 모복해는 1901년 부모의 명과 중매를 거쳐 결혼했다. 두 집안은 모두 사업을 자그마하게 꾸리는 집안들이어서, 집안이 서로 맞았다. 그해에 장개석은 14세이고, 모복해는 18세였다. 당시 절강일대의 민속으로는 여자가 나이많은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4년화국대길대리(4年和局大吉大利, 4년차이가 가장 좋은 짝이며, 아주 길하고 이롭다)"
결혼식때, 장난꾸러기였던 장개석은 우스갯거리를 만들어냈다. 원래 신부의 꽃가마가 남편의 집안에 도착하면 규칙대로라면 폭죽을 터뜨려야 하고, 놀이를 즐기던 아이나 결혼식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물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줍곤 했다. 장개석은 원래 집안에서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자기가 지금 무슨 입장인지도 모르고, 바로 아이들 틈으로 달려나가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손님들이 이를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봉화에는 '신랑이 폭죽을 주우면 부부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이것은 금기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장개석의 모친은 화가나서 발을 구르면서 욕을 했다. 신부도 가마속에서 그 말을 듣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최종결과는 역시 이 말대로 되었다.
결혼후 처음 몇년간은 장개석이 현성과 닝보(寧波)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모두 모복해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수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때 장개석은 십여세이고 이미 다 컸다. 모복해가 모든 것을 돌봐주었다. 모복해에게 있어서 장개석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성격나쁜 동생과 같았다. 한번은 두 사람이 싸워서 장개석이 그녀의 배를 발로 찼고, 그녀는 유산을 했다.
장개석이 18세가 되어서, 우국우민의 의식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장개석이 귀국하여 여름방학을 보내곤 했는데, 상해에서 머물렀다. 장개석의 모친은 모씨를 보내서 그를 돌봐주게 하였다. 이때, 장개석이 사귀던 사람은 이미 옛날과 달랐고, 모복해는 교육을 받지 못한 소각여인(小脚女人, 전족한 전통여인)으로 장개석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다. 여러번 모복해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으며, 여러날 동안 그녀를 본체만체하기도 했다.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모복해가 돌아간 후 임신한 것을 깨달았고, 다음해 봄에 장경국(蔣經國)을 낳았다.
모복해는 이때부터 정신적인 의지처가 생겼다. 전력을 다해서 아들을 돌보았다. 이때 장개석의 풍류는 점차 장개석의 모친의 귀에도 들려왔꼬, 장개석의 모친은 아들에게 그녀가 죽은 후에라도 모복해를 잘 대해주라고 엄명했다. 장개석은 모친의 말을 잘 따라서, 하나하나 모두 응락했다.
1921년, 모복해가 장씨집안에 시집온지 20년이 지났다. 그녀가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장개석의 모친이 돌연 사망했다. 모복해는 의지처를 잃었다. 장례식을 끝낸 후 반년도 되지 않아, 장개석은 모복해의 오빠에게 서신을 보내어 모복해와 이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0년동안 발걸음만 듣거나 사람그림자만 보아도 자극을 받았다. 내가 이제 결심을 했는데, 이는 10년의 고통이다. 10년동안의 자극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침통하고 비감한 심정이다"
이러써 볼 때 이혼할 생각을 가진 것은 오래전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상해에서 요야성(姚冶誠)을 알았고, 나중에 진결여(陳潔如)를 취했다. 그리고 원래의 부인에게 이혼서를 보낸 것이다. 모복해에 있어서, 이것은 청천벽력이었다. 그와 아들은 함께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고, 더이상 살고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이러서 또 하나의 타격이 뒤를 이었다. 장개석이 아들에게 상해로 와서 공부하라고 한 것이다. 계구(溪口)의 옛날 집인 풍호방(豊鎬房)에는 모복해만이 홀로 덩그렇게 남았다.
삼년후인 1925년, 장경국은 소련으로 유학갔고, 모자는 이후 12년간을 떨어져 지낸다. 첫2년간은 서신이 왕래되었지만, 나중에 장경국이 소련신문에 '장개석을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집안에서의 일체의 서신을 단절되었다. 1927년이 되어,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청혼하고, 송씨집안은 반드시 원부인과 공개적으로 이혼을 선포하도록 요구한다. 장개석은 계구로 돌아가서, 모씨형제에게 자기의 뜻을 밝힌다. 모씨집안에서는 예에 근거하여 "모복해는 이미 장씨집안에 시집갔으니, 살아도 장씨의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의 귀신"이라고 답변한다. 장개석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못처리하면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장개석은 하룻밤에 몰래 풍호방으로 모복해를 찾아간다. 모복해는 마침 불상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그녀의 눈빛이 멍하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영 언짢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혼 후에도 그녀가 여전히 풍호방의 여주인으로 남게 해줄 것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를 "대사모(大師母)"로 부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생활의 모든 필요한 것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모복해는 어쩔 수 없이 이혼서에 서명하였다.
10년후, 장경국은 소련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모자는 마침내 만나게 된 것이다. 모복해가 며느리의 중국이름을 묻자, 장경국은 부친이 이름을 "방낭(方娘)"으로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모복해는 "낭(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녀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마저 그녀를 모두 낭(娘, 어머니라는 뜻이 있음)이라고 부르면 복이 달아날 것이니, "방량(方良)"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이 양(良)은 어질고 현명하다는 뜻이니 좋다고 하였고, 장방량(蔣方良)은 이후 이 이름을 계속 쓰게 도니다.
아들 식구들과 모두 함께 한 기간이 모복해에게는 여러해동안 가장 즐거웠던 기간이다.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있었으며, 그녀는 아들 손자들이 좋아하는 고향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였다. 아들도 생활이 안정되면 모친을 모시고 함께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들과의 이 만남이 그녀와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는 점이다. 반년후 일본군의 비행기가 계구를 폭격했고, 그녀는 불행히도 총알을 맞고, 무너진 담장에 깔려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나이 58세때의 일이다.
1947년, 장개석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성묘를 했다. 아침에 그는 홀로 모씨묘에 가서 묵묵히 세번 절을 했다. 이것이 그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지, 미안함인지, 작별인사인지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모복해는 어려서부터 어려 사람들이 그녀의 명을 점쳐 주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크게 부유하고 크게 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그대로 들어맞았다. 다만, 점쟁이는 남편과 아들의 부귀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더할 수 없이 외롭고 처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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