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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대청제국, 오스만제국, 무굴제국의 비교 (I)

by 중은우시 2008. 4. 10.

글: 진명원(陳明遠)

 

16-17세기, 서구각국은 르네상스, 신대륙발견, 계몽운동, 종교개혁, 산업혁명, 민주공화등의 비약적인 변화와 발전을 겪으며, 현대문명을 계속 새롭게 만들어갈 때, 동방에는 3개의 "석양의 노을이 아름다운(夕陽無限好)" 늙은 대제국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대청제국(1616-1911), 남아시아의 무굴제국(1526-1858), 서아시아/북아프리카/동유럽에 걸친 오스만제국(1453-1922).

 

무력정복,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통해 건립된 이 세개의 대제국은 여전히 그들의 거대한 몸집을 가누고 있었다. 셋은 모두 천만평방킬로미터가량의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고, 모두 수천만 내지 억이상의 많은 인구를 통치하고 있어 당시 세계의 3대 "지대물박(地大物博, 영토도 넓고, 물산도 풍부하다)"의 인구대국이었다; 그들의 영토와 인구는 각자가 모두 유럽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유럽은 전체 합쳐 인구가 1억이 되지 않았고, 프랑스와 영국은 1천만명도 되지 않았다)

 

3대제국은 모두 이민족이 고대로부터의 전통있는 문명지구를 침입하여 건립한 것이었다.

 

그들은 각자 지역문화권내에서 중심적이고 지도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이슬람문화권의 대표였고, 무굴제국은 인도문화권의 대표이며, 대청제국은 한자(유가)문화권의 대표였다. 정치체제에 있어서, 3대제국은 모두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적 전제군주국가였고, 방대한 행정관료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황제는 "유아독존"의 정통권위이며, 정치경제권리의 분배와 행사는 모두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3개제국은 모두 농업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공업이 부수적이었다. 서방은 현대화된 산업사회에 돌입하였는데, 이 3대제국은 여전히 중세고대시대의 '자급자족'적 자연경제기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내부는 갈수록 엄중해지는 '흰개미'식의 부패가 발생하였고, 중앙통치의 권위는 점차 경직되고 쇠락하였으며, 관료체계의 효율이 점차 저하되고, 매관매직, 탐관오리가 이미 보편화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일찌기 용맹을 떨쳤던 군사역량도 현저히 기울어졌다. "한때는 유럽에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던 오스만 군대는 그들 자신의 군주와 백성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랑제브황제이후의 무굴제국의 군대도 형편없어졌고, 대청제국의 만몽한팔기와 녹영병은 이미 아편에 찌들어 전투력이랄 것도 없었다.

 

3대제국의 기술과 생산력수준은 점차 서방에 뒤지기 시작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그들은 낙오하면서도 여전히 혼자서 희희낙락하고, 자기만 잘난 줄 알았던 병폐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발명이랄 것도 새로 한 것이 없지만, 심지어 서방의 새로운 발명에 대하여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방인들이 스스로 자부하는 "현대문명의 정수"를 세 나라의 군주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군주들은 모두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기기음교(奇技淫巧)'로 폄하되거나, '알라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배척했다. 그 결과, 3대제국의 생산력과 경제상황은 갈수록 경직되고 쇠락하며 썩어들어갔다. "자존에서 자비로' 전락하는 파락호가 되어갔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운명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이 건립한 군사봉건제국이다. 오토만제국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창시자인 오스만(Osman) 1세의 선조는 우구스 투르크(Uyghus Turk)사람이다. 소아시아서북부는 오스만제국의 발상지이다. 1299년, 오스만은 독립을 선포하고, 술탄을 칭한다. 무하마드2세(1451-1481년재위)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1453년), 동로마(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다. 콘스탄티노플(나중에 이스탄불로 개칭)은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다. 이때, 오스만제국은 이미 동유럽발칸지구 및 다뉴브강유역을 직접 지배했다.

 

무하마드2세는 법전을 제정하고, 제국의 행정관리제도를 완비한다. 방대한 봉건군대와 선진적인 군사장비로 승승장구했다. 셀림(Selim) 1세(1512-1520년재위)는 이란을 공격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했다. 이리하여 아랍세계(이란 제외)를 지배한다. 영토는 1배이상 증가된다. 오스만 술탄은 무슬림세계의 우두머리 즉 칼리프가 된다.

 

술레이만1세(1520-1566년재위)는 동서로 정벌하여 6번 헝가리에 출정하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포위공격하며(1529년), 여러번 이란을 원정하여 바그다드를 탈취한다. 셀림2세(1566-1574년 재위)의 재위기간동안,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스페인, 베니스와 교회의 연합함대를 격파한다. 해군은 지중해동부를 장악했고, 강역은 중유럽 헝가리 및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에 이른다.

 

오스만제국의 전성기때, 영토는 북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경내에 이르고, 서로는 아프리가의 모로코에 이르고, 동으로는 아시아 코카서스와 페르시아만에 이르렀으며, 남으로는 아프리카내륙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지금으로 따지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근 40개국가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683년에 영토는 합계 1,195만평방킬로미터로 현재의 중국이나 인도의 영토보다 넓었다.

 

16세기초, 오스만제국의 통치기구는 완비된다. 종교법과 민법이 병행실시된다. 경내의 비이슬람민족은 밀레트제도에 의하여 종교자치권을 누렸다. 16세기중엽이후, 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술탄은 친정을 하지 않고 후궁에 빠지게 되며, 대권은 "수상(다비치)"의 손에 떨어진다. 근위군이 정치에 간섭하고, 술탄을 통제한다. 공상업은 몰락하고 사회는 불안해진다. 1683년-1792년간에 여러번의 대외전쟁에서 실패를 겪는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투르크전쟁(1828-1829), 두번의 투르크-이집트전쟁(1831-1833, 1839-1841)에서 연이어 실패한다. 1839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5개국이 연합하여 투르크-이집트전쟁에 간여한다. 이집트는 이미 사실상의 독립을 취득했고, 그리스, 세르비아도 모두 자치권을 획득했다. 제국은 겨우 아나톨리아, 이라크 및 루미리아의 일부지역을 지배했다. 압둘메치디1세(1839-1861년재위)와 압둘아지즈(1861-1876년재위)의 통치기간동안, 일련의 개혁령을 반포한다. 칙령에서 기독교도들이 일부 기본권리를 향유하도록 허용하였으나, 이 약속은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개혁의 중점은 여전히 군대와 행정의 개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교육과 법률을 개혁했다. 이어서 해군, 육군, 공정, 의학, 군사과학등의 학교를 만들고, 외교, 행정학원도 만들었다. 1846년 첫번째 국민교육계획을 만들고, 대학, 중학, 소학교의 완비된 체계를 확립한다. 1869년부터 소학교교육을 보급하기 시작한다. 개혁중, 유럽식의 민법, 형법, 해사법, 상법을 제정하는데, 이는 외국의 영사재판권을 취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오스만제국의 재력이 바닥나고, 국내인민의 봉기와 속지민족의 독립운동이 이어지고 열강의 침입을 받아 제국의 개혁은 효과를 보기도 전에 위기가 심화되게 된다.

 

186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신오스만인들의 군주입헌운동이 일어난다. 1877-1878년의 러시아-투르크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군대는 대패하고,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세인트 스테파노조약을 체결한다. 베를린회의(1878년)에서 루마니아, 세르비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불가리아의 자치를 인정하며, 카스르와 바툼을 러시아에 할양한다. 그리하여, 오스만제국이 유럽영토는 겨우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와 트라키아만 남게 된다.

 

1920년 앙카라에서 대국민의회가 구성되고, 1921년 대국민의회는 근본법을 통과시키고, 국명을 터키(Turky)로 고친다. 1922년 대국민의회는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술탄제를 폐지하기로 한다. 이로써 오스만제국의 역사는 끝이 난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건립되고 케말파사가 대통령에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