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해문(李海文)
중국공산당이 설립된이래 중앙기구는 여러차례 변화를 겪었다. 1930년대에 중앙에 서기처를 두었다가; 1966년 8월, 중앙서기처의 업무가 정지되었다; 1980년 제11기 5중전회때 중앙서기처는 부활했다.
중앙서기처는 어떤 기구이고, 중앙정치국과는 무슨 관계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공중앙기구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 변화는 중국공산당의 발전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가장 낮은 관직칭호인 "서기"를 당중앙의 최고지도자에 대한 칭호로 삼다.
1921년 7월, 중공중앙 제1차당대회("1대")가 소집개최되었고, 전국에는 겨우 50여명의 당원이 있었다. 사람도 적고, 일도 적었다. 중앙에는 겨우 3인으로 구성된 중앙국(中央局)이 있었고 책임자를 서기(書記)라고 불렀다. 중공 제2차대회("2대"), 제3차대회("3대")에 비록 중앙집행위원회를 선거했으나, 중앙기구는 여전히 중앙국이었고, 책임자는 위원장(委員長)으로 불렀다. 제4차대회("4대")때가 되어서는 총서기(總書記)로 개칭했다.
중공 "1대"때,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를 "서기"라고 불렀는데, "서기"는 당시의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공산당은 백성들의 위에서 군림하지 않는다는 것고, 백성들을 압박하고 착취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각급 지도자와 당중앙 최고지도자의 호칭을 '서기'로 사용한 것이다.
"5대"때 처음으로 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상임위원, 총서기를 선출하다.
1927년 4월, 중공 "5대"를 소집개최할 때, 중국공산당은 이미 5만여명으로 당원이 늘어나 있었고, 군중배경을 지닌 정당이 되었다. 중앙기관에 중앙국만 두어서는 전체 당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없었다. 대표대회에서, 처음으로 중앙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임위원,총서기를 선출했다. 의사결정기구와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을 처음으로 두 개로 나눈 것이다. 정치국은 의사결정기관이다. 상임위원회는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총서기는 상임위원중의 한 명으로 의사결정기관을 영도하면서 동시에 일상업무기관을 책임졌다.
오래지 않아, 중공중앙은 상해로 옮겨온다. 정치국상임위원은 분산되어 각지에서 투쟁을 이끈다. 백색테러가 심각함에 따라, 자유롭게 상해를 오갈 수가 없었다. 11월, 중앙에는 조직국을 설립하고, 일상업무를 책임지게 했다. 조직국의 주임은 처음에는 뤄이농(羅亦農)이 맡았고, 나중에는 저우어라이(周恩來)가 맡았다. 이는 소련공산당(볼세비키)이 기구를 정치국과 조직국으로 나눈 것과 맞추었던 것이다. 조직국의 직책은 나중에 성립된 서기처의 직책과 동일했다.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소집개최된 중국공산당 "6대"는 "5대"의 관례를 답습하여, 정치국이 의사결정하고, 상임위원이 당중앙의 일상업무를 책임지며, 상임위원중 1인을 총서기로 선출하였다. 전국의 각 농촌근거지가 건립, 발전됨에 따라, 정치국 상임위원은 각 근거지로 분산되어 최고책임자를 맡았다. 이때 각 근거지는 모두 적들의 포위를 당하고, 소탕작전을 당하고 있어서, 상임위원회의를 개최하기 어려웠다. 당의 지도력량은 현저히 박약했다.
중앙서기처의 탄생
1933년초, 당중앙은 강서 소비에트지구로 옮긴다. 당시 전국의 각 소비에트지구는 십여개로 발전해갔다. 홍군은 약 30만에 달하였고, 당원도 30만에 달하였다. 총서기 1인이 전체 당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서기처가 탄생하게 된다.
중앙서기처가 성립된 확실한 시기는 지금 고증할 수 없다. 중앙홍군이 중앙소비에트지구를 떠나 장정(長征)을 시작할 때, 문건을 담은 묶음을 잘못 들고가는 바람에, 중공중앙의 공식기록과 중공중앙의 공산국제에 대한 보고서는 모두 소비에트지구에 남아있게 되었다. 홍군의 주력전략이 이전된 후, 국민당은 대거 '소탕'작전을 펼치고, 이에 따라 근거지를 잃고 상황이 나빠지게 되자, 항영(項英)은 당중앙이 남긴 모든 문건을 불태우도록 지시하고, 종이조각 하나 남기지 않는다. 다만, 공산국제의 자료에는 중공중앙서기처 성립시간에 대한 근거가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당을 건립한 때로부터 1934년 6월이전에 중공중앙과 공산국제는 전신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공산국제는 중국공산당이 공산국제에 보낸 보고서를 보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일부 자료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1943년 3월, 중앙기구의 조정으로, 두차례에 걸친 중앙위원회의 사이에 중앙정치국이 전체 당의 업무책임을 부담하고, 모든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도록 결정하고, 정치국은 모택동을 주석으로 올렸다. 서기처는 정치국이 결정한 방침에 따라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업무기관이었고, 서기처는 모택동, 유소기, 임필시로 구성되었다. 모택동이 주석이고, 총서기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주석이라고 하였다. 이는 중공중앙이 처음으로 '주석'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8대"때 중앙정치국과 서기처가 분리되다.
1956년 9월, 중공 '8대'가 소집개최된다. "8대"는 중앙위원회주석외에 처음으로 '부주석'을 두었다. 모택동은 계속 주석으로 당선되고, 선출된 부주석에는 유소기, 주은래, 주덕, 진운이 있었다. 1958년 5월 제8기 오중전회는 임표를 부주석으로 보충선출한다.
"8대"때, 중앙서기처의 제1인자를 더 이상 '주석'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새로운 당장(黨章)에는 총서기 1인을 뽑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의 총서기는 "6대"와는 다르다. "6대"의 총서기는 당의 최고지도자였지만, "8대"의 최고지도자는 당중앙주석이었다.
"8대" 당장에는 주석, 부주석에 대하여 "7대"와는 다르게 규정했다. "8대"의 당장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었다: "중앙위원회의 주석과 부주석은 동시에 중앙정치국의 주석과 부주석이 된다" '7대' 때에는 중앙위원회 주석이 중앙정치국의 주석이며, 중앙서기처의 주석이었다. 그러나, '8대'에는 중앙서기처의 주석, 부주석을 겸한다는 내용이 빠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여, 중앙정치국과 서기처가 분리된 것이다. 의사결정기관과 일상업무지휘감독기관이 분리된 것이다. 중앙서기처는 매우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중공중앙부주석인 주은래가 총리를 맡은 국무원은 중앙서기처의 지휘감독을 받게 되어 있었다. 서기처의 권력은 정치국위원봐 높고 심지어 부주석보다 높았다.
모택동의 이런 안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우리들은 내가 1개, 총사령관이 1개, 소기동지가 반개(은래동지, 진운동지 그리고 등소평동지는 포함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장파이다)인데, 도와주는 역할이나 하는 것이다". 그는 등소평을 배양하고자 하여, 등소평을 먼저 중앙비서장을 맡기고 나중에 서기처 총서기를 맡겼다.
등소평은 총서기를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
등소평은 1954년 중공중앙비서장을 맡는다. 부비서장에는 이부춘, 담진림, 이설봉, 유란도, 송임궁, 마명방,임풍, 양상곤, 호교목이 있었다. 당시 거의 매일 비서장회의를 개최했고, 각 방면의 업무를 연구했다. 모택동은 한번은 비서장회의를 소집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너희는 일하는 사람들이다. 대외적으로는 일률적으로 당중앙의 이름을 써라. 비서장, 부비서장의 명의로 하지 말라"
"8대"의 당중앙 인선이 무르익을 때, 등소평은 중국의 비서장(秘書長)을 맡고 싶지, 외국의 총서기(總書記)는 맡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명칭이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등소평은 "총서기의 직위에 대하여는 6글자이다. 일불행(一不行, 첫째는 그럴 수가 없고), 이불순(二不順, 둘째는 순리에 맞지도 않는다)" 등소평이 말한 '불순'이라는 것은 첫째는 유소기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소기는 부주석으로 당의 후계자였다. 또 달리는 주은래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등소평이 말한 '불행'이라는 것은 유소기와 주은래는 같은 나이로, 등소평보다 6살이나 많았는데, 그들의 당력이나 경력 명망이 모두 등소평보다는 위였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은 등소평과 당중앙 지도자들의 업무에 대하여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다: "비서장을 총서기로 바꾸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중국말을 외국말로 바꾸는 것이다. 사실, 외국의 총서기는 중앙의 비서장에 해당한다" 그러자, 등소평이 끼어들었다. "저는 그래도 비서장이라는 직무가 아무래도 편안합니다" 그러자 모택동이 보태어 말했다. "그게 순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선전해주겠다. 모두 동의한다면 그게 순조로운 것 아니냐." 그리고는 '8대'에서 등소평을 총서기로 선출한다. 등소평은 모택동보다 11세 어려서, 당시 52세였고, 모택동이 '7대'를 소집개최할 때의 나이와 같았다.
서기처는 정치국보다 정보에 빨랐다.
등소평은 일찌기 모택동에게 제언한 적이 있다. 서기처는 아무래도 정치국의 업무기구로 하는 것이 좋겠고, 군대와 국무원의 문건하달을 책임지는 것이 좋겠다고. 모택동은 동의하지 않았다. 서기처는 당중앙의 업무기구이며, 뭐든지 관여할 수 있고, 중앙의 일은 모두 서기처가 해야 하며, 문건을 발송할 때는 당중앙의 명의로 하라고 했다. 당정군 각 방면에서 중앙상임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나 문건은 모두 먼저 서기처로 보내라고 했다. 일반적인 문제는 서기처에서 토론하여 결정하고, 바로 하달하여 집행하면 된다고 했다. 중대한 문제는 서기처가 의견을 붙여 중앙상임위원회에 올려 토론하고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서기처는 국무원의 업무를 토론할 때, 주은래가 참가하므로, 항상 주은래의 시간에 맞추었다. 기록을 보면, 부주석은 주은래만이 서기처의 회의에 출석했다.
중앙정치국위원은 모두 북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방의 정치업무를 주재하므로, 아주 중요한 회의가 아니면 북경으로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치국이 자주 회의를 개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기처는 대량의 일상업무를 처리하고, 매주 3,4회 회의를 개최하므로, 자주 모택동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서기처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모택동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었고, 중앙핵심의 의사결정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정치국의 일부 인물들보다도 정보에 빨랐다.
'12대'에서 총서기는 당의 최고지도자의 직위로 되다.
등소평이 총서기를 3년간 맡고, 1959년 4월, 중앙은 상해에서 제8기 7중전회를 개최한다. 거기서 모택동은 "소평이 부통수(副統帥)이다"라고 발언한다.
1966년 8월 12일, 제8기 11중전회에서, 중앙지도자에 대한 보충선거와 선거가 실시된다. 임표는 모택동의 뒤를 이어 제2인자가 된다. 등소평은 여전히 제6위였다. 다만, 도주(陶鑄), 진백달(陳伯達)이 그도바 앞 자리를 차지한다. 유소기, 주덕은 제9, 제10위로 밀려난다. 진운은 제12위로 밀려난다. 전회에서는 주석, 부주석을 다시 뽑지 않았다. 다만, 유소기, 주은래, 주덕, 진운의 원래 부주석 지위에 대하여는 별도로 언급이 없었다. 부주석은 임표 1사람만이 남은 것이다. 이로부터,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가 되고, '부통수'가 된다.
비록 총서기의 지위가 여전히 제6위였지만, 정치국상임위원이 변화는 서기처의 전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전회에서 비록 서기처에 사부치, 유녕일의 두 사람을 보완하였지만, 등소평이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서기처는 금방 업무가 중단되게 된다. 제8기 11중전회이전에 이미 새로 성립된 중앙문혁소조가 서기처를 대체하는 것이 추세였던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쪽 업무를 하는 사람이었다. 강생, 진백달등이 그들이고, 각 중앙국은 부서기 혹은 상임위원을 파견해서 참가했다. 이설봉등 서기처의 구성원들은 중앙문혁소조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아마도 모택동은 중앙서기처가 더 이상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였던 것같다. 서기처의 이들 인물들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 정치국에 진입시킬 것인가? 제8기 11중전회에서 담진림, 도주, 섭검영은 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된다. 이설봉, 사부치등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선된다. 회의 후, 중앙서기처는 금방 업무를 중단하고 만다.
1980년, 제11기 5중전회에서 "당의 제8차 대표대회에서의 결정과 10년간 증명된 필요하고 유효한 제도를 회복하고, 중앙서기처를 중앙정치국과 그의 상무위원회 영도하의 일상업무기구로 하며, 호요방 동지를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선출하는 결정"을 한다.
1982년 소집개최된 중공 '12대'에서는 중국공산당은 더 이상 주석, 부주석을 두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때부터 총서기는 중국공산당 당중앙의 최고지도자의 직책이 된다. 다만, 중앙정치국은 여전히 의사결정기관이고,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의 영도하에, 중앙서기처는 여전히 당정군의 일상업무를 책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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