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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신강(新疆)의 분리독립운동

by 중은우시 2007. 1. 11.

작자: 양진(梁辰)

 

동투르키스탄(東突厥斯坦)의 유래

 

돌궐(突厥, 투르크)은 원래 5세기전후에 알타이산지구에서 생활하던 유목민족의 명칭이다. 6세기부터 8세기중엽까지, 돌궐족은 점차 중국의 북방초원으로 진출했고, 중원지역의 서위(西魏)부터 수당(隋唐)까지 여러채널의 여러 종류의 광범위한 교류를 가졌다. 552년, 돌궐은 한국(汗國)을 건립하고, 전성기때의 강역은 매우 넓었다. 나중에 동, 서의 두개의 돌궐한국(突厥汗國)으로 분리되었다. 8세기중엽, 동돌궐은 회흘(回紇, 나중의 위구르족)에게 멸망했고, 서돌궐은 당나라에 멸망했다. 서돌궐의 후예들은 소아시아반도로 이주해서 나중에 오스만투르크제국을 세웠으며 지금의 터키이다. 동서돌궐한국이 멸명하면서 그 후예들은 점차 다른 민족에 융화되었다.

 

11세기이후 돌궐이라는 개념은 원래의 돌궐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돌궐어계의 여러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되었다. "스탄(斯坦)"은 '지방', '지구'라는 뜻이다. '동투르키스탄'(중국에서는 東突로 줄여부른다)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은 19세기말엽에 나타난다. 그들은 러시아내의 중앙아시아 제국을 '서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고, 중국의 신강을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강은 '동돌궐족'의 고향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래서, 동투르키스탄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인 개념인 것이다. 신강의 분리주의자들은 '동투르키스탄'을 그들의 분리독립운동의 최후목표로 정하고 있다.

 

동투르키스탄운동의 탄생

 

이것은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의 이중영향을 받았다. 범이슬람주의는 19세기중엽 아프가니스탄 사람인 마정로(馬丁魯)가 제안한 것인데, 그 사상의 핵심은 모든 이슬람국가가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이슬람정치실체를 건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범투르크주의운동은 제정러시아통치시대에 압제를 받던 달단인들에게서 유래되는데, 그 목적은 소아시아에서 중아시아에 이르는 모든 돌궐어족의 민족이 연합하여 통일된 투르크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 사상의 작용과 영향을 받아, 신강의 '동투르키스탄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사상("범주의")은 20세기초에 신강에 들어왔다. 신강에 들어오자마자 당시 중국신강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양범주의의 대표자는 터키인인 아이마티 카마르(艾買提 卡馬爾)와 터키에 유학하고 돌아온 위구르족인 마이스무더(麥斯武德)는 추방당했다.

 

1930년대초에 마이스무더, 무하마드 이민등 "쌍범주의"자들이 속속 귀국했다. 이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사상체계와 정치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소위 "동투르키스탄독립운동"이다. 당시 중국은 군벌할거로 상호 혼전인 시대였으므로, 신강지역도 병란이 잦았다. 신강성의 독군인 성세재(盛世才)와 하미농민반란을 지지하는 감숙군벌 마중영(馬仲英)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동탕의 시대배경하에서 동투르크독립운동은 기회를 얻었다. 1933년 11월, 동투르크독립운동가는 영국의 지지를 받아 카스(客什)에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을 건립한다. 1934년 2월 성세재가 소련의 지원하에 마중영을 격파한 후 병력을 남으로 돌려 이 '공화국'을 소멸시켰다. 카스의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은 비록 짧은 3개월간 존속하였지만, 이것은 첫번째의 공개적인 신강의 분리활동이었고, 신강분리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화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오고 있다.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소멸된 이후, '동투르크독립운동'의 주요인물은 해외로 망명했다. 그 주요인물중의 하나인 이민(伊敏)은 인도로 망명하여 신강독립을 선전하는 <<동투르키스탄역사>>를 썼고,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가들에게는 경전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일본도 적극적으로 중국을 분리시키고자 했고, 몽고만주의 독립을 획책하는 동시에, 신강에도 이슬람국가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리를 위하여 일본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아푸두얼 하이미더(阿卜杜爾 海米德) 2세의 아들을 받아들였고, 그로 하여금 신강독립후의 수뇌가 되도록 계획하였다. 항전시기에 마이스무더, 이민, 아이산 위수푸(艾山 玉素莆)등의 분리운동가들은 속속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중국내에서 출판물을 간행하여, 범투르크주의와 범이슬람주의를 선전했다. 1944년 이리, 타청, 알타이의 삼개 지구에서는 소련의 지원하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기도 하였다. 소련의 이 조치는 진정으로 신강을 독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강문제를 교환카드로 활용하려는 것이었고, 중국정부로 하여금 외몽고와 소련의 동북에서의 특권을 인정받는 것과 맞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중소우호조약의 체결로 소련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이로 인하여, 소련은 '동투르키스탄공화국'으로 하여금 국민당정부와 담판하도록 하였고, 신강성연합정부가 구성되었다. 마이스무더, 이민, 아이산등 분리운동가들은 연합정부에서 직책을 가졌다.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의 실권은 신강독립에 반대하는 아허마티장(阿合買提江)등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동투르키스탄공화국'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상의 독립은 1949년 신강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이 이슬람정권은 국민당에 반대하였고, 공공연히 분리구호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신강해방이후, 인민정부는 단결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삼구혁명'으로 칭하고, 중국신민주주의혁명의 일부분으로 취급해주었으며, 민죽군을 해방군 제5군으로 편성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신강해방후 마이스무더는 수감되었고, 이민, 아이산은 미리 눈치채고 다시 해외로 도망갔다. '동투르키스탄독립운동'은 다시 엄중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고, 뿌리뽑히지도 않았다. 그 영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적절한 환경만 조성되면 신속히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의 발전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은 20세기후반들어 악성발전을 이루게 된다. 역사적인 원인으로 오랫동안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조식은 해외에 있었고, 활동도 분산되었으며, 규모나 영향력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1980년대이후,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소련이 해체되며, 중앙아시아각국이 독립하면서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가들에게 권토중래할 좋은 기반이 마련되었다.

 

첫째, 통일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던 동투르키스탄운동가들이 통일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조직, 통일강령, 통일영수, 통일무장, 통일행동"이라는 목표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슬람진주당(伊斯蘭眞主黨)", "이슬람개혁당"등의 연맹성격의 조직이 나타났다.

 

1992년 12월 동투르크분리운동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의 자금지원하에 이스탄불에서 '동투르키스탄민족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중앙아시아, 미국, 호주, 파키스탄,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스위스등 30여개국에서 분리운동의 지도자들이 참가하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동투르키스탄국제민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국가명칭을 '동투르키스탄국', 국기(月牙旗), 국가(샤디야)와 국휘를 제정하였고, 대외적으로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이 통합을 향한다는 것을 나타냈다.

 

1993년 4월 5일, 미국, 독일, 프랑스,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와 중앙아시아등 17개국의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대표들은 다시 터키에서 '동투르키스탄'국제회의를 개최했고, 통일망명정부를 건립하였으며 러자피컨(熱扎彼肯)을 국가수반으로 임명하고,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유엔, 국제인권조직과 이슬람조직에게 중국에 압력을 가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달라이집단과 연합하여 행동하기로 한다.

 

1996년 10월, 호텐(和田)에서는 신강 십여개주(현)에서 온 분열조직대표들이 회의를 개최하고 '이슬람진주당'의 성립을 선언했고, 당의 강령, 조직건설들 7개의 문건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중국내의 분리운동세력이 분산에서 연합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국제화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이후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은 지하에서 나와 공개적으로 활동했고, 국제화추세에 맞추어 발전했다. 중앙아시아지구의 동투르크분리세력의 총지도자인 모하리소프(莫合里索夫)는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다. '독립을 실현하려면 국제적인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방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저 소수국가의 지지만으로도 부족하다 '국제화'를 시키는 것만이 방법이다'  최근들어,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은 더욱 명확한 국제화의 전략을 나타낸다.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등의 이슬람국가에서 정치적인 영향력과 생존공간을 부여받고, 분리운동의 민족종교색채를 덜 드러내며, 소위 민족종교운동을 인권운동과 결부시키며, 분리활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승화시킨다. 이로써 서방각국의 지지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분리조직의 지도자들은 자주 서방각국과 접촉하고, 매년 서방국가에서 열리는 청문회에 나가서 증언하고, 각지역에서 '동투르키스탄문제'에 대한 국제세미나, 전람회를 개최하고 시위를 벌인다. 동시에 인터넷등 현대통신매체를 활용하여,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1994년 4월 '위구르인국제연맹'은 '동투르키스탄혁명영웅'을 기념하는 회의상에서 '동투르키스탄인민의 비참한 운명문제에 대하여 연합국에 서신을 보내기로' 결의하여, 신강문제를 국제문제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99년 5월, 카자흐스탄의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조직은 알마타에서 집회시위를 거행했다. 공공연히 NATO가 유고슬라비아를 포격한 것을 지지했고, 코소보의 오늘날이 바로 위구르스탄의 내일이라고 하였다. 동투르키스탄분열조직의 지도자는 미국대통령 클린턴도 만났고, '동투르키스탄'의 역사와 현황을 잠은 관련자료를 건냈으며, 미국에게 꼬리를 흔들었고, 미국이 코소보의 알바니아인을 도와준 것처럼, 신강의 위구르인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지적할 것은 동투르키스탄의 국제화과정에서 국제적인 반중국세력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미국등 서방국가는 종용에서 지지로, 신강의 민족분리운동에 힘을 보탠 것이 사실이다. 미국대통령 클린턴과 부통령 고어등 정부요인은 여러차례 비밀리에 동투르키스탄 분리주의자들을 접견했다. 미국국회는 신강문제청문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미국 CIA는 요원을 파견하여 동투르키스탄분리주의자들의 교육훈련을 시켰다.

 

1999년 미국정부가 발표한 <<중국인권보고서>>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의 신강에서의 민족정책을 비난했다. 클린턴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투르키스탄민족대표대회'집행위원회 주석인 아이바르(艾尼瓦爾)를 접견했고, 신강위구르족이 박해당하는 자료와 녹음을 건네받았다. 홉킨스중앙아시아-코카서스문제연구소와 스미스-리차드슨기금회도 사람을 알마타로 보내어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지도자를 만났다. 다른 서방국가들도 '동투르키스탄'문제를 이용하여 중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터키와 일부 중앙아시아국가도 겉으로 혹으 드러나지 않게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기지를 건설하고 대외적으로 범투르크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을 허가하고 있다. 이런 국가의 지지하에 분리조직은 각종 간행물을 만들고, 글을 계속 발표하여 중국의 민족정책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독일에 두었던 '해방방송국'과 '자유유럽방송국'은 이미 체코와 카자크스탄의 알마타로 옮겼다. 그리고 터키에 "독립해방방송국"을 추가로 건설해서, 선전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현재 국외의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가들은 중앙아시아에 진지를 건설하고 신강에 침투해들어오고 있다. 출판기구를 설립하고, 독립을 선동하는 서적과 음반을 내놓고, 방송국을 설립하여 위구르어, 카자흐스탄어, 우즈베키스탄어로 방송을 하면서 대대적으로 분리독립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리고 각종 명목의 국제세미나를 개최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며 공개서신을 발표하여 신강독립의 기치를 들게 한다. 국제적인 반중국세력의 지원을 얻고자 한다. 계속하여 핵심인사들을 중국에 입국시켜, 중국내에서의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을 세우고 지휘하고자 한다. 중국의 해외주재인사와 유햑생 친척방문자, 성지방문자를 유인, 매수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전복활동을 벌인다. 돈으로 신강의 중상류인사를 매수하여 분리세력의 확대를 노린다. 종교를 이용하여 분리선전을 벌이고 종교광신을 선동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동투르크분리운동을 확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세번째 추세는 테러주의화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강은 중앙아시아지역의 동부와 연결되어 있어, 동투르키스탄분리운동조직이 당해지역에서 활약하는 민족분리세력, 극단종교세력 및 테러주의세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된다. 테러주의의 영향아래 1997년, 중앙아시아지구의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은 회의를 개최하여, 아이사(艾沙)의 '평화투쟁정책'을 비난하였다.

 

1999년 12월, 18개국에서 40여 분리조직대표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무장건국의 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하자는데 인식의 일치를 이룬다. 계획은 10년내에 만명이상의 정규군대를 건립하는 것이고, 신강지역에서 테러전, 유격전, 심지어 정규전까지 벌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은 대량의 인원을 아프나니스탄, 체첸, 케시미르등지로 보내어 실전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중아아시아, 서아시아, 아프가니스탄등에 20여곳의 훈련기지를 건설하였고, 핵심요인을 훈련하였다. 카자흐스탄 경내의 '동투르키스탄위원회'는 알마타에서 근 100명에 이르는 전소련에서 근무했던 장교와 사병을 모아서 무장부대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위구르족 상인의 자금지원하에, 700정의 권총, 200정의 소총, 10여정의 기관총 및 미사일등 대량의 무기를 구입했다. 이를 신강으로 운송해 들여오고자 했다. 동투르크분리조직은 '동투르키스탄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방할 수 없고, 무력에 의지하여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분리조직은 공공연히 신강남부의 산악지구에서 '무장할거'를 진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부 동투르키스탄조직은 폭력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터키의 '동투르키스탄청년민주연맹'과 카자흐스탄의 '동투르키스탄해방조직' 및 '중앙아시아위구르진주당'등이 있다. 그리고 일부조직은 비록 강령에서는 명확히 무력사용을 드러내지 않지만, 행동에서는 실제로 테러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동투르크정보센터'등이다. 사실상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은 이미 점차 '동투르키스탄테러조직'으로 변모하고 있다. 악명이 자자한 빈라덴이 이끄는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동시에 빈라덴세력의 중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년전에 이미 동투르크테러조직은 경비, 물자에서 라덴의 지원을 받고 있다. 1999년초, 빈라덴은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의 지도자인 아이산 마이허수무(艾山 買合蘇木)을 접견한 바 있다. 그리고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일체의 행동을 탈리반과 협조하도록' 요청하였다.

 

2001년 2월 빈라덴 및 탈리반의 고위층인사는 칸다하에서 동투르크분리조직과 협의를 이루었다. 핵심구성원을 훈련시켜주기로 하고, 2001년의 활동경비도 지원해주기로 했다. 이외에 탈리반, 알카에다와 우즈베키스탄이슬람해방운동은 '동투르크분리조직'에 대량의 무기, 탄약, 교통공구, 통신설비등을 제공해주기로 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10여개 동투르크분리조직의 1000여명의 핵심분자들이 알카에다조직이 아프간 칸다하, 마자리샤리프, 호스트, 후수티등에 설치한 테러훈련소에서 폭파, 암살, 독물주입등의 테러활동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훈련받은 후 비밀리에 중국국내로 파견되어 테러활동을 벌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프간 탈리반과 알카에다조직에 가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러시아 체첸테러세력의 활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중앙아시아지구의 테러활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8월 동투르키스탄의 테러리스트는 키르키즈스탄 남부에서 4명의 일본과학자와 키르키즈스탄 내무부대의 고급장교를 납치하는 테러사건을 벌였다. 2000년에는 동투르크분리조직의 2명이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군대에 포로로 잡혔다가 중국에 건네진 적이 있다. 2000년 8월에는 우즈베키스탄, 키르크즈스탄의 남부산악지구에서 현지정부군을 습격하는 테러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최근들어 신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폭파, 암살테러사건들도 대다수는 이런 조직과 관련이 있다. 현재 중국경찰측은 이미 100여명의 아프간과 가른 나라에서 테러훈련을 받고 비밀리에 중국에 잠입한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하였다. 관련국가에서도 중국측에 10여명의 테러활동중에 체포된 동투르키스탄테러리스트들을 인도한 적이 있다. 2001년 "9.11"테러사건이후, 테러조직은 길거리의 쥐새끼처럼 여기저기서 두드려맞았다. 동투르키스탄테러조직도 부득이 미국의 군사공격에 대한 지원을 표시하였고, 빈라덴 테러조직과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테러리스트로서의 이미지를 변환시키려 애썼다. 구성원들에게 잠시 과격한 언론을 발표하지 말고, 소재국에서 테러조직과 함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남아시아의 테러조직은 전략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아프간의 구성원들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지구로 이전시켜서 세력을 보존하려 했다. 동시에 동투르키스탄 테러조직은 다시 한번 소위 "인권보호" "종교자유" "소수민족이익"등의 깃발을 내걸고 '중국정부가 이기회를 틈타 소수민족을 탄압한다'고 선전했다.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

 

1990년대는 신강 동투르키스탄분리조직이 신속히 발전하고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현재까지 국내외에 있는 동투르키스탄관련조직은 50여개에 이른다. 주요하게, "동투르키스탄성화당(星火黨)", "동투르키스탄청년당", "동투르키스탄요원당(燎原黨)", "동투르키스탄독립조직" "동투르키스탄인민혁명당" "동투르티스탄민족해방조직" "동투르키스탄중앙집행위원회" "천산민주연맹" "천산민족증구자당" "성화당" "성화연맹" "신강이슬람천산당" "모색" 및 "독립당"등이다. 이외에 국내외의 동투르크조직은 "국외지휘, 국내행동; 국외훈련, 국내파괴"의 전략을 취하고 있다. 최근들어 극단주의, 분열주의와 국제테러주의의 영향을 받아, 폭력사상은 이미 동투르크조직내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분리운동은 테러방식을 주요수단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동투르트분리조직은 공개적으로 폭력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동투르크조직은 신강의 테러활동을 단계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폭발, 암살, 납치등의 테러활동이 계속 일어난다. 극단적이고 잔인한 수단으로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있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2002년 1월 21일, 중국국무원신문판공실은 <<동투르크테러세력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동투르크의 죄악을 철저히 드러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90년에서 2001년까지 국내외에서 일어난 동투르크테러세력이 중국신강경내에서 일으킨 것은 200여번의 테러사건이었고, 162명이 사망하고, 440명이 부상당했다. 1990년 4월 5일, 동투르크이슬람당 테러리스트는 신강 아그타오현의 파런향에서 10명의 인질을 붙잡았다. 교통요로에서 2대의 차량을 폭하하여 6명의 무장경찰을 희생시키기도 하였다.

 

1991년 2월 28일, 동투르크테러조직은 신강 아크소지구의 쿠차현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했다. 같은 날, 테러리스트는 쿠차현성의 한 상점내에 폭약을 설치했는데, 다행히 폭파는 미수에 그쳤다.

1992년 2월 5일, 이슬람개혁자당은 우루무치시의 52번, 30번 시내버스에서 두 건의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두대의 시내버스는 파괴되고, 3명이 사망하고 23명의 부상당했다. 동시에 한 영화관과 주택건물에도 각각 폭약을 설치했으나, 미리 발견되어 제거할 수 있었다.

1993년 6월 17일, 동투르키스탄민주이슬람당은 카스시의 농기회사사무실건물을 폭파시켜, 6명이 부상당했다.

1993년 8월 24일, 두 명의 동투르크테러리스트는 카스지구 예청현의 정치협상회의 상임위원 겸 대청진사 주지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여 중상을 입혔다.

1996년 3월 22일에는 2명의 테러리스트가 아크소지구 신화현의 정협부주석 겸 청진사주지를 총살하였다.

1996년 4월 29일 아침, 10여명의 완전무장 테러리스트가 쿠차현의 아라하거향 쿠나스촌에 진입하여 중국정협위원, 자치구이대대표인 카우리 자카의 집에 2개의 수류탄을 던져 그와 부인에 중상을 입히고, 그의 동생, 동생의 처, 아들, 며느리는 살해했다. 이 촌의 촌간부도 중상을 입었다.

1996년 5월 12일, 동투르키스탄테러조직의 4명의 테러리스트는 전국이슬람교협회상임위원. 신강정협부주석, 카스이슬람협의외주석 및 그 아들을 예배도중에 습격하여 모두 중상을 입혔다.

1996년 7월, 동투르크시탄이슬람정의당은 사야현의 감옥폭동을 획책하여 15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1996년 8월 27일 6명의 테러리스트는 예청현의 장거러스향정부를 습격하여 부향장과  당직경찰을 살해했다. 이후 마을에 난입하여 3명의 치안원과 1명의 물관리인을 살해했다

1997년 2월 5일에서 8일가지, 동투르키스탄이슬람진주당은 테러를 획책하여 이닝교란사건을 일으킨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왕국건립"등을 외쳤고, 평민을 습격하고, 상점을 훼손하였으며, 차량을 불태웠고, 7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30여대의 차량이 불에 탔고, 많은 집들이 파괴되었다.

1997년 2월 25일, '동투르키스탄민족단결연맹'은 우루무치시에서 2번, 10번, 44번 시내버스에 폭약을 설치해서 3대의 시내버스가 폭발하엿다. 9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입었다.

1997년 3월, 국외 동투르크테러리스트는 중국 주터키대사관을 습격하고, 중국주이스탄불총영사관을 공격했으며, 중국총영사관에 걸린 국기를 불태웠다.

1997년 3월 23일, 동투르크 테러리스트는 아크소지구 금은천개간지구의 책임자의 집에서 그 부부를 살해하였다.

1997년 6월 4일, 4명의 동투르크테러리스트는 호텐지구의 묵옥현 차치커향 황무지촌간부의 집을 침입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1997년 7월 3일, 동투르키스탄테러리스트는 아와티현의 바스리커향의 촌간부집에 들어가 부부를 살해하였다.

1997년 11월 6일, 동투르키스탄테러리스트조직은 전국과 신강의 이슬람협회 위원이고 아크소 이슬람협회주석을 예배도중 살해하였다.

1998년 1월 27일, 동투르키스탄 테러리스트는 예청현 정협상임위원, 현대청진사주지를 살해하였다.

1998년 1월 30일에서 2월 18일까지 동투르크해방조직은 카스시에서 23건의 독극물주입사건을 일으켜, 4명이 중독되어 1명이 사망하였고, 많은 가축이 중독되거나 사망하였다.

1998년 2월 22일에서 3월 30일까지 동투르크테러조직은 카스지구의 예청현에서 6건의 폭파사건을 일으켜 3명을 부상입히고 천연가스수송관을 파괴하여 큰 화재가 났다. 직접 손실만 100만위안을 초과하였다.

1998년 3월 5일, 국외 동투르크테러조직인 동투르크민족센터는 폭약으로 중국의 주터키이스탄불총영사관을 습격하였다.

1998년 5월 23일, 동투르크해방조직의 구성원은 우루무치시의 화도상하, 대서문, 하탄로포료도매시장, 장정여행사도매시장, 홍산목재시장, 우루무치여행하, 상무성등의 번화한 장소에 40여개의 화학자연발화장치를 해서 15건의 화재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적시에 발견하여 껐으므로 큰 위해는 끼치지 않았다.

1999년 8월 23일, 10여명의 동투르크테러리스트들은 카스지구의 저푸현의 보스커무향 파출소의 지도원의 집안에 들어가 그와 아들을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 그의 처는 중상을 입었다.

1999년 10월 11일, 3명의 테러리스트는 호텐시의 면마공사의 면화구매소에서 면화에 폭팔물을 설치하여 면화2톤을 태워버렸다.

1999년 10월 24일, 동투르크테러리스트는 저푸현 차이리향의 공안파출소에서 2명을 총살하고 2명을 부상입혔다. 파출소 10칸의 집과 1대의 지프차와 3대의 오토바이가 불에 탔다.

2000년 3월, 동투르크해방조직은 키르키즈스탄에서 협력을 거절하는 위구르청년연맹의 주석 니하마이티. 보사코프를 살해하였다.

2000년 5월, 국외 위구르해방조직은 자금모집을 위하여 키르키즈스탄에서 신강상인을 납치하여 10만달러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 상인으 ㅣ조카를 살해하고, 비스카이커의 중국상품시장을 불태웠다.

2000년 5월 25일, 동투르크테러리스트는 신강인민정부 키르키즈스탄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업무인원을 납치하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이후 그들은 카자흐스탄으로 도망쳤다.

2000년 9월, 알마타시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던 2명의 카자흐스탄 경찰이 살해되었다.

2001년 2월 3일, 동투르크 테러리스트는 카스지구의 법원간부를 살해하였다.

2001년 8월, 위구르성전조직은 자동무기를 이용하여 신강 쿠차현 공안국을 습격하였고, 쿠차현 공안국의 당위서기 겸 국장인 진평이 사망했다. 나머지 7명의 공안인원이 부상했다. 스위스의 '동투르키스탄정부센터'는 이 사건이 자신들의 목적을 선전하기 위하여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중략)